## 519화
난 모든 일정 등을 캘린더에 기록하면서 관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여러 일들을 병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그리고 캘린더를 사용하는 습관은 비단 학생이나 연주자로서의 생활에만 활용됨에 국한되지 않았다. 난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구들에 관련된 중요한 일들도 모두 캘린더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해 놓고 밤마다 체크하면 잊고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특별했다.
독주회는 내게 있어서 정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나는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삼고 뒷날들은 거의 체크하지 않고 달려오기만 했다.
에르네스트의 생일을 확인하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난 아나스타샤가 언질을 주기 전까지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단 것에 대해 미안해졌다.
에르네스트는 되레 어색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과는 먼저 해야겠다.
“미안해요, 연주회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연주회가 훨씬 중요하니까 당연한 거야.”
그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왜 이렇게 말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생일이라는 날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작년에도 그는 자신의 스위스 연주회 때문에 생일을 유야무야 넘겨 버린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우리끼리 생일을 축하해 주긴 했었지만, 매번 이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종종 역정을 내는 심정이 이해갈 것 같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다 끝난 후에도 왜 아무 말도 않으셨나요?”
이젠 다 끝난 참이니 생일 파티를 우선하며 친구들을 초대해도 괜찮을 텐데, 아무리 봐도 에르네스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넘어가도 별일 없…….”
“에르네스트.”
“…….”
진지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장담하건데, 내가 오늘 집에 돌아가서 캘린더를 확인했다면 그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을 테고, 그럼 난 지금보다 훨씬 더 화가 났을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오늘 그냥 넘어갔다면 별일이 생겼을 거란 걸 느꼈는지 물 잔을 들고 들이켰다. 그리고 자기 입장도 이해해 달라는 투로 말했다.
“네 연주회 자리인데 이야기 꺼내기가 조금 그렇더라고.”
“언제 그런 걸 신경 쓰셨다고 그러시나요?”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괜히 억지로 한마디 했더니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생일보다 연주회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나나 에르네스트나 같았고, 그건 자신의 연주회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대로 리셉션 파티가 끝날 때까지는 온전히 연주회에만 집중력이 돌아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난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서, 더 강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하실 생각이신가요?”
되도록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혹시 그가 성가시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지 날 바라보더니, 잠깐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양손을 펼쳐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눈엔 그게 그냥 뜻대로 하란 제스처로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작년에 당한 게 있어서 그런가, 그러면 안 될 것 같네.”
작년 에르네스트의 서프라이즈 파티는 내 제안과 주도로 이루어졌었다. 올해라고 못할 것 없다. 더 잘할 수도 있었다.
난 웃으며 장난으로 말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을 거예요.”
에르네스트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난 기억으로 같이 웃어 주길 바랐던 건데, 예상과 사뭇 다른 반응에 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때 내가 어느 정도는 진짜 화가 나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무서웠었나……?
“할 거야?”
생일 파티를 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정해졌다는 걸 느낀 아나스타샤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작게 모으며 답했다.
“그러려고. 그냥 집에서 작게.”
“생일 겸 작곡가 데뷔 축하 파티를 하면 되겠네.”
“뭐가 그렇게 길어?”
“작년에도 생일 겸 스위스 연주회 축하 파티였잖아.”
“……그러네.”
누가 보면 평범한 생일 파티는 하는 법이 없는 줄 알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웃긴지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우리 집에 와 줄래?”
주저 없이 제안하고 있긴 하지만 조금 쑥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일 파티에 초대한다는 게 뜬금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난 반드시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져서 고개를 기울이며 스마트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글쎄요? 시간이 될지 스케줄을 봐야 알 것 같아요.”
“…….”
그러자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생일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잠적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했다. 난 재빨리 수습했다.
“농담이에요, 꼭 갈게요.”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가 다음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넌?”
“나도 내일 스케줄을 봐야…….”
그런 장난은 굳이 이어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처음 에르네스트의 생일 파티 이야기를 꺼냈던 아나스타샤가 막상 일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괜히 몇 번 정도 더 장난을 치다가 가겠다고 전했다. 에르네스트는 힘이 빠지는지 인상을 썼지만 그래도 실수로라도 아나스타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짜증을 내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리처드에게 붙잡혀 이것저것 시식회 비슷한 걸 하던 발렌티나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왔다.
“무슨 이야기들 해?”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연속으로 당해서 그런지 조심스러워 보인다.
“내일 내 생일이라서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혹시 올 수 있으면…….”
“가야지!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었어!”
에르네스트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발렌티나가 덥석 받아들였고, 에르네스트는 처음으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에르네스트는 동생인 사샤에게도 가서 내일 파티를 할 것이라 전했다.
“형 내일 생일이었어?”
“……야.”
브루투스의 칼에 찔린 카이사르 같은 표정으로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렸다. 다행히 사샤는 옆에 있던 아나톨리와 류보비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겠냐고 제안하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두를 초대했다.
그다음엔 리처드와 한승우의 순서였다.
“너희들도 내일 바쁘지 않으면 와서 밥 먹고 가.”
점점 더 생일이라는 말은 없어지고 있었다. 난 살짝 떨어진 곳에서 숨죽여 웃었다.
한승우는 바로 가겠다고 답했고, 리처드는 예상외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 사 가도 돼?”
“마음대로 해.”
리처드의 미소를 마주하고도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답했다. 물론 리처드도 순수한 의도로 케이크를 준비하겠다 말한 건 아니었다.
“작년엔 못했지만, 생크림 화장 한 번 정돈 해 줘야 생일 파티 느낌이 날 것 아냐?”
“마음대로 하라고. 난 네 몫으로 펄펄 끓는 보르쉬를 한 냄비 준비해 둘 테니까.”
“……살인사건 내려고 하네.”
여전히 오가는 말들이 상냥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예전처럼 정색하고 다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시선은 러시아어를 몰라서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세연에게로 향했다.
{내일 특별한 여행 일정이 없다면 내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
세연은 상상도 못한 제안에 깜짝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있던 일정도 취소해야겠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부담 없이 생각해.}
{사실 아무 일정도 없어. 반드시 갈게.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
세연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가 먼 이곳까지 와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이 착한 아이들로부터 느꼈던 것처럼.
그리고 나보다 백 배는 긍정적인 세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적극적이었다.
「저기, 승우야. 여기 애들 생일 파티는 어떻게 해? 우리랑 똑같이 케이크 켜? 생일선물은 뭘 준비하면 좋아?」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한승우를 붙잡고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난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티는 똑같고…… 선물은 글쎄, 우리나라 물건은 어떨까.」
「매운 라면?」
그런데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자니 왜 이렇게 걱정되는지 모르겠다.
***
일요일 아침.
평소 같았으면 진즉에 일어나 연습실로 갔겠지만, 바로 어제 연주회를 마친 내겐 휴식이 필요했다. 실제로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고.
때문에 난 스트레칭이란 명목하에 침대에서 열심히 뒹구는 중이었다. 누워 있자니 졸음이 솔솔 쏟아진다. 계속 이러다간 조금 더 자 버릴 것 같다.
“으음…….”
황금 같은 아침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건 낭비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난 어깨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 뒤편이 뻐근해져 온다. 팔을 뒤쪽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리면서 슬리퍼를 신고 책상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잘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늘 에르네스트에게 줄 생일 선물이었다.
동시에 작곡가인 그에게 줄 선물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작곡가로서 꼭 필요할 물건이란 생각이 들어서 신경 써서 고른 거니까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한 뒤 시간을 보냈다. 약속 시간까진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준비하면 된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여유로운 건지 모르겠다.
난 이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일부러 음악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단조로운 선율이라도 귀에 들리면 나도 모르게 분석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계속 바짝 몰아붙여져서 긴장되어 있던 신경을 조금 풀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멍하니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고, 벨카와 놀아 주거나 책을 읽기도 했다. 6월의 날씨는 잠깐만 앉아 있어도 온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곧 나갈 시간이었다.
“음…….”
뭘 입고 갈까 고민되었지만 너무 딱딱하게 하진 않기로 했다. 포멀한 파티는 어제도 충분히 즐겼었고, 오늘은 홈파티니까 편안하게 가면 될 것 같다. 블라우스와 슬랙스 그리고 짧은 트위드 재킷을 걸쳤다.
운전은 오늘도 빅토르가 맡아 주었다. 난 일부러 조수석에 앉았다. 빅토르는 뒷좌석에 앉아 달라 했지만 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태워야 할 사람들도 있었고.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누나. 빅토르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우선 아나톨리를 먼저 태웠다. 그의 집은 에르네스트의 집까지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따로 시간이 걸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살짝 길을 돌아선 류보비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그쵸?”
“그렇네요, 류보비.”
원피스 차림의 류보비는 정말 소풍이라도 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차에 탔고, 바로 옆에 있는 아나톨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근처 호텔에 머물고 있는 세연을 데리러 갔다.
세연은 주소를 가르쳐 주면 지하철을 타고 알아서 찾아가겠다며 사양했지만, 어차피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고 같이 가는 쪽이 편했다.
“…….”
호텔 앞으로 가니 길가에 서 있는 세연이 보였다. 그녀는 차가 앞에 섰는데도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나톨리가 문을 열어 주고 나서도 머뭇거리면서 차에 올랐다.
“오늘 고마워…….”
이 정도 표현은 꽤 자연스럽게 말할 줄 안다. 난 뒷좌석의 세연을 돌아보며 미소로 답했다.
이건 정말 최소한의 친절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난 세연에게 해 준 게 별로 없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바쁘기도 했지만 집에 남는 방도 많으니 한 번쯤 초대해도 괜찮았을 텐데, 난 한 번도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연주회 건으로 초대까지 해 놓고서 집에 한 번 부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 네 명을 태운 차량은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