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20화 (520/1,277)

##  520화

에르네스트는 식탁에 앉아 접시와 포크 수를 헤아렸다. 오늘 초대한 인원 수에 모자랄 것 같진 않았다.

“개수 맞니?”

“예. 맞아요.”

어머니 이자벨라는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힘겨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건 그녀였다.

에르네스트는 열 살이 넘었을 무렵부터 생일 파티를 하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여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그까지 거기에 휩쓸릴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생일에 콩쿠르나 연주회 일정을 잡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 점에 대해 어머니는 약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찬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음식들을 차리는 어머니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그동안 많이 잘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

그가 이렇게 파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작년에 있었던 서프라이즈 덕분이었다.

작년에도 연주회 일정을 잡으면서 그는 생일을 스위스에서 지냈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돌아오니 생각도 못 했던 파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의 기억은 부끄러워질 정도로 좋은 추억으로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슬슬 올 때인데.”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보았다. 묘한 긴장감이 등을 타고 오른다. 에르네스트는 왜 자기 생일인데도 긴장이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번개 같은 속도로 사샤가 달려 나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타티아나 누나 왔네!”

그 말을 듣자마자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긴장감이 어떤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샤가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 주었고, 이자벨라는 하던 음식도 놓고 마중을 나갔다. 곧 타티아나가 아나톨리와 류보비, 그리고 세연을 데리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거실에 있던 에르네스트는 살짝 고개만 빼서 막 들어온 타티아나와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타티아나는 평소 입는 교복도 무대 위에 오를 때의 드레스도 아닌 단정하고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편한 모습의 타티아나는 약간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서 오렴! 타티아나, 다 같이 데려와 줬구나?”

이자벨라는 타티아나와 짧게 포옹하고, 다른 세 명과도 번갈아 포옹했다.

“아나톨리와 류보비…… 그리고 어제 연주회에서 봤던 친구네.”

난데없이 포옹을 당한 세연은 조금 당황해했지만 그래도 곧 긴장을 풀고 밝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후후, 환영할게. 자, 들어오렴. 에르네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단다.”

어머니가 괜한 말을 덧붙이는 바람에 에르네스트는 억지로라도 기다리지 않은 척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잠시 후, 거실로 네 사람이 들어왔다.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질문했다.

“기다렸나요?”

“…….”

도저히 아니라고 딱 잡아 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고.

목 근처가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조금.”

“일찍 오길 잘 했네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만 돌려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예전 자선 연주회를 함께했을 때 에르네스트를 데리러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는지 살피는 것 같기도 하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두 사람 다 소파에 앉으라 말했다.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사샤가 집을 소개해 주겠다며 데리고 갔다.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은 곧장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진 않았다. 세연은 본래 밝은 성격이지만 지금은 약간 긴장해 있는 것 같았고, 타티아나는 평소 분위기를 잘 살피고 모두에게 상냥하긴 하지만 사실 사교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내거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이럴 때 필요한 특출한 유머감각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호스트로서 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을 의무는 있었다.

“오는데 막히거나 하진 않았어?”

“평소와 비슷했어요. 예상한 시간에 출발했고, 예상한 시간에 도착했죠.”

“다행이네. 다른 애들은 택시를 보냈으니까 곧 올 거야.”

“아, 그런가요?”

세연은 잘 모르는 러시아어를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차 마시면서 기다릴래?”

“그럴까요?”

“잠깐 앉아 있어. 끓여 올게.”

같이 일어나려던 것 같던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는 부엌으로 가서 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잎을 준비했다.

세연이 대화에 끼진 못했지만 그리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를 마시면서 영어로도 이야기를 조금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차를 끓이는 사이 초인종이 또 울렸고, 사샤와 이자벨라가 손님을 맞이했다.

차를 끓여서 거실로 가니 소파엔 어느새 네 명이 앉아서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인기척을 내자 아나스타샤가 돌아보았다.

“우리 왔어.”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와 줘서 고마워.”

“그럼 우리도 차 줄래?”

“…….”

게스트로서 당당하게 차를 요구하는 아나스타샤에게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도로 부엌으로 향해야만 했다.

다시 찻잔을 준비하고 있자,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차를 내버려 두고 거실로 가니 리처드와 한승우도 모여 앉아 있었다. 부엌에 갔다 올 때마다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니 정신이 없다.

리처드가 웃으며 팔을 펼쳤다.

“이야, 오늘의 주인공.”

맞는 말인데도 어쩐지 짜증이 난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에도 리처드와 티격태격 할 순 없었다.

리처드는 그런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리처드는 약간의 선을 지켜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에르네스트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 없었다.

거실에 모인 인원만 에르네스트까지 일곱 명이었다. 절로 왁자지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약간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점점 들뜨게 되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리셉션 파티에서 이어지는 파티처럼 느껴졌다.

“얘들아, 식탁으로 오련?”

환담을 나누면서 잠시 기다리자 이자벨라가 모두를 불렀다. 아나톨리와 류보비를 데리고 갔던 사샤가 돌아오면서 인원은 더 많아졌다.

거기에 이자벨라와 아버지 스테판까지 열두 명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에르네스트는 집에서 이런 광경을 본 게 열 살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스테판 역시 마찬가지인지 이곳에 모인 모두를 찬찬히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모두 와 줘서 고맙구나. 편하게 있다 가거라.”

“감사합니다.”

식탁 위엔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파티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스테판이 케이크에 초를 꽂고 촛불을 켰다. 에르네스트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에서 촛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미리 쥐고 있던 폭죽을 터뜨렸다.

“생일 축하해!”

“작곡가 데뷔도!”

에르네스트는 뭐라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휩싸였다. 생일과 작곡가 데뷔를 동시에 축하한다는 말로부터 뭔가 새로운 삶도 동시에 시작되는 것 같았다.

물론 기존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다. 단지 보다 많은 것들이 시작되면서 차오르는, 벅찬 기분이었다.

“다들 고마워. 기분 이상하네 뭔가.”

“와, 쑥스러워하는 거 봐. 대박, 사진 찍어 빨리.”

“망할.”

이때다 싶어 스마트폰을 드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덕분에 모두가 웃으면서 시끌시끌한 파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선물이야. 자.”

“고마워.”

아나스타샤가 먼저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에르네스트는 상자를 받아 바로 열어 보았다. 그 안엔 작은 멀티툴이 들어 있었다.

“아빠가 그러는데 이런 걸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고 하더라고.”

귀찮아서 대충 골랐다는 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하지만 척 봐도 대충 고른 물건 같진 않았다. 잘 쓰면 유용할 것 같았다. 어디에 써야 할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저거 어디서 샀어? 아나스타샤. 나도 하나 사게.”

“아빠 말이 맞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의 말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지고, 그다음으로 리처드는 작곡을 열심히 하란 뜻으로 오선지 천 장, 발렌티나는 키링을 선물했다.

한승우는 저번에 에르네스트가 물어본 양말을 한인 시장에서 구했다면서 양말을 몇 켤레나 줬고, 세연도 조금 주저하더니 에르네스트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앞선 선물들을 보니 이걸 좋아할진 모르겠는데, 러시아 사람들도 차를 많이 마신다고 해서…….}

상자를 열어 보니 다기 세트가 들어 있었다. 동양풍의 모양과 그림 등이 새겨져 있어서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오선지 천 장보단 이 다기들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굉장히 예쁘네. 고마워, 잘 쓸게.}

세연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류보비와 아나톨리도 작은 선물들을 건넸고, 마지막으로 타티아나만 남아 있었다. 언제 주어야 할지 타이밍을 보다가 마지막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 받아 주세요. 에르네스트.”

“……고마워.”

저번 타티아나의 생일 땐 미처 악보를 헌정하지 못하고 슬리퍼를 선물로 주었으니 아마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포장을 풀어 보았다. 그 안엔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이미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없다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몇 자루 있어도 괜찮을 테고요.”

몇 개 중복해서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물건이라는 점에선 슬리퍼와 만년필이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선물이었다.

중요한 건 가격의 차이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은연중에 필요로 했던 물건을 타티아나가 정확하게 준비했다는 점에서 에르네스트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할 말은 정말 많았지만, 입을 열면 엉망으로 이야기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간신히 말들을 정리해선 차분하게 말했다.

“만년필은 처음이야. 그리고 필요했었어.”

“정말인가요?”

타티아나는 기뻐하며 웃었다.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는 글씨도 잘 쓰시잖아요? 평소엔 쓸 일이 잘 없겠지만, 작곡을 하시다 보면 악보에 쓰실 일이 종종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악보엔 음표 말고도 여러 가지 문자들이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서명부터 시작해서 제목이나 부제, 그리고 여러 지시사항 등. 그냥 펜을 써도 되겠지만, 만년필을 쓴다면 보다 멋지게 악보를 쓸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써 봐.”

“뭐?”

“오선지 있잖아.”

리처드가 자신이 선물한 오선지 묶음을 가리켰다. 에르네스트는 그중 한 장을 뽑아선 그 위에 만년필로 서명했다. 처음 쓰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썼던 것처럼 편했다.

“잘 쓸게, 타티아나.”

“잘 써 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타티아나는 정말 그것 말고는 바랄 게 없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손에 쥔 만년필의 감촉을 느끼며 오선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로 바로 진학해서 모든 재능을 피아노에 쏟아붓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는 작곡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확실하게 결정하게 해 준 건 바로 타티아나였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후 써낸 첫 번째 곡을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초연으로 성공시킨 것도 타티아나고, 이렇게 앞으로도 멋진 악보를 쓸 수 있게 선물을 해 준 것도 그녀다.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병행하기로 한 뒤로 타티아나만큼 최선을 다해 응원하고 도와준 사람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에게 보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만년필을 조금 더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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