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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21화 (521/1,277)

##  521화

파티는 너무 길지 않게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에르네스트의 부모님은 우리가 저녁까지 있길 바라시는 것 같았지만,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늦기 전에 파하기로 했다.

홈파티의 마지막은 당연히 뒷정리와 설거지였다.

“그냥 가려무나.”

“아녜요, 저희가 어지른 거니까 저희가 정리해야죠.”

아나스타샤가 먼저 나서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의 말에 따라 거실에 나와 있던 과자와 음료들, 그리고 보드게임 등을 치우고 테이블을 접는 등 정리는 척척 진행되었다.

그릇을 주방으로 나르던 내 눈엔 설거지를 해야 할 식기들이 보였다. 식기세척기가 있긴 했지만 고장이 나서 못 쓰는 상태라 한다. 가득 쌓여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난 그간의 주방 경험을 살려 설거지를 도와 드리겠다고 했다.

“손님이잖니! 할 필요 없단다, 타티아나.”

“금방 도와 드릴게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면 만류하셨지만, 열두 명이 사용한 식기는 정말 산더미처럼 싱크대에 꽉 차 있었다. 도저히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고무장갑을 낀 다음 식기들을 종류별로 쌓았다. 그것만으로도 싱크대가 조금 정리가 되었다. 난 얼른 적당한 크기의 냄비부터 하나 씻은 다음 거기에 물을 붓고 주방용 세제를 풀었다.

마구잡이로 하지 않고 드미트리에게 배운 대로 하니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내 모습이 불안한지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도 말씀이 점점 없어졌다. 내가 하는 게 어설퍼 보이진 않는 것 같다.

“타티아나…….”

“예?”

“요리를 배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거지는 또 언제 배웠니?”

어머님은 요리와 설거지가 따로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난 드미트리에게 배운 그대로 대답했다.

“절 가르친 선생님은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릇 닦는 방법부터 배웠죠.”

“드미트리 셰프에게서 배웠다고 하지 않았니?”

“예,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님이 약간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분도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드미트리가 오로지 깨끗한 팬에 깨끗한 재료들로 요리하는 법만 가르쳐 주었다면 난 그를 제대로 신뢰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요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드미트리가 내 편의를 봐주지 않고 기본부터 충실하게 가르쳐 주려 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이럴 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다 된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뒷정리도 모두 끝났다. 내가 제일 오래 걸렸지만 발렌티나가 옆에서 도와주니 금방이었다.

우리도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난 재킷을 다시 입고 베샤스트니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핫, 언제라도 환영이지.”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스테판 니콜라예비치께선 약간 더 다가오시더니 작게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이번 연주회는 못 가봐서 미안하구나. 에르네스트 녀석에게도 중요한 연주회였는데, 정말 아쉽게 생각하고 있단다. 다음엔 꼭 가 보도록 하마.”

“……예.”

다음에라는 말은 언제나 내게 무겁게 와닿으면서도 밝은 이정표처럼 보이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는 어제 독주회가 끝나서 그런지 아직은 다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스테판 니콜라예비치가 보는 나는 머잖아 또 무대에 설 사람이었다. 난 그러한 믿음들 위에 서 있다.

고개를 끄덕이고 옆의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이다음에도 그대로 있겠지. 그런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눈이 마주친 에르네스트는 짧게 인사했다.

“모두 잘 가.”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지만 난 그가 속으론 굉장히 기뻐한 나머지 그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걸 느꼈다. 살짝 놀려 줄까 싶다. 그러나 오늘은 생일이니까 한 번 봐주기로 했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택시가 몇 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을 위한 택시였다.

“잘 가, 전화할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랐고, 리처드와 한승우도 뒤를 따랐다.

난 내가 데리고 온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희도 갈까요.”

“예.”

가는 길은 살짝 달라졌다. 이 시간대의 막히는 도로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빅토르가 일부러 경로를 조금 바꾼 까닭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나톨리를 먼저 데려다주고 그다음 류보비와 세연의 순으로 내려 주기로 했다.

홈파티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시 이야기하며 서로 공유하고 있던 추억들을 되새기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차 안엔 나와 빅토르, 그리고 세연만이 남아 있었다.

“…….”

세연과도 영어로 추후 일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남게 되니 약간 어색해진다. 드문드문 단답으로 된 말들이 오가는 사이, 세연이 머무는 호텔 앞에 차가 멈췄다.

난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세연.”

이 정도 러시아어는 이제 잘 알아듣는지라, 러시아어로 작별을 고했다.

세연은 차 문을 열다가 말고 멈칫했다. 러시아어를 떠올리는 건가 싶어 잠시 기다렸더니, 그녀가 날 불렀다.

{저기, 타티아나.}

{예?}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차 한 잔 마시지 않을래?}

난 유심히 세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려워하는 만큼 그녀 역시 날 가깝게 여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둘이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세연의 얼굴엔 두려움 또한 맺혀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을 한 건 단순히 활발해서가 아니었다. 난 그런 세연을 매몰차게 대하지 못했다. 그간 쌓여 온 미안한 감정도 많았고.

{좋아요.}

잠깐 차를 마시는 것 정도는 괜찮다. 세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난 빅토르에게 부탁했다.

“빅토르, 미안하지만 딱 30분만 이야기 하고 올게요.”

“저녁 전까지 2시간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30분으로 할게요.”

난 빅토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내 말은 내 스스로에게 제한사항처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문을 열고 나왔다. 차 옆에서 어물거리고 있던 세연은 밖으로 나온 날 보고는 환하게 웃더니, 호텔 옆에 있는 카페로 안내했다.

***

차를 주문하고 잠시 앉아 디저트 메뉴판을 조금 더 보고 있자니, 금방 주문한 차가 나왔다.

난 평소처럼 허브티, 세연은 체리 홍차였다.

그녀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스푼을 들고는 함께 나온 딸기 바레니예를 푹 떠선 홍차 안에 넣었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에서 몇 년은 산 사람같이 보인다.

세연은 달달한 향기가 마음에 드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어색한 긴장을 풀어내려는 화두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안 건데, 러시아 사람들은 터키, 영국 다음으로 차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라고도 하더라. 세계 3위라는 게 조금 의외였어.}

난 픽 웃으며 말했다.

{보드카인 줄 알았나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세연은 당황했는지 스푼을 놓고 손사래를 치다가, 고개를 들고 웃고 있는 날 보더니 내가 농담을 했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세연을 어렵게 여기는 건 그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두 내 죄에 얽혀 있는 이유들이다. 그러니 잠깐이나마 편하게 이야기하고자 용기를 낸 세연을 괜히 힘들게 하는 건 해선 안 될 일이다.

미소를 주고받자 분위기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세연은 차를 저었다.

{이런 차도 맛있고 말야. 처음엔 잼을 넣는 게 특이했었는데, 이젠 이 잼…… 바레니예 맞지? 바레니예 없이는 차 못 마실 것 같아.}

세연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지난 일주일간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을 찻잔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여기 와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계속 몰랐을 거야. 콩쿠르 일정으로 왔을 땐 이런 문화를 접하기 어려웠었거든.}

그리고 그녀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날 바라본다. 맑은 눈웃음이 잘 어울리는 눈이 순수한 미소를 머금고 휘어진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별 말씀을요.}

{너무 많은 걸 받아가는 것 같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난 세연의 말에서 깊은 의미를 읽어 냈다.

그녀는 단순히 내가 연주회 티켓을 준 것만을 고맙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세연에게 당부했던 것, 얻어 갈 것이 있으면 꼭 얻어 가라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실제로 얻어 낸 사람의 어투였다.

아마 특정해서 짚자면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그리고 라벨의 라 발스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두 곡들은 세연이 바로 이해할 만한 음악을 레퍼런스로 두고, 보다 나은 해석과 음색을 끼얹어 완성한 것이었으므로.

음악성이 뛰어난 연주자들은 다른 연주를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음악에 덧씌워 발전시킬 줄 안다. 난 세연 역시 그게 가능한 연주자라 생각한다.

{달리 하셔야 하는 건 없어요.}

세연에게 받고 싶은 건 없다.

그저, 혹시라도 교수님을 사사하며 피아노를 연구하면서 막히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승우가 그러더라고.}

요 며칠 동안 친해졌던 한승우와 여러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유학생활 내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넌 엄격할 정도로 아무것도 돌려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승우가 그런 점에서 내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되도록 그가 그걸 음악 쪽으로 집중시켜 주길 바랐다.

그게 결국 내게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는 음악으로 제게 갚아 주었죠.}

{응. 그거라면 네가 반드시 받을 거라 생각했었대.}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던 세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 티켓이나 세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연주, 그런 것들에 대한 보답을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음악을 돌려준다면 난 거부하지 못할 테지.

언젠가 세연이 연주회를 한다면 날 초대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연습실을 빌려 날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난 한 번 그녀의 연주를 견디지 못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괜찮으리라 확신할 순 없다.

세연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는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타티아나. 그걸 물어보고 싶었어.}

이렇게 그녀와 관계되는 걸 피하고 싶은 마음과, 조금씩이라도 이어져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상충한다.

사실 세연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한다고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도 된다. 이 세상에서 세연만큼은 그래도 되는 사람에 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 그런 식으로 관계를 비틀고, 이미 망가져 있는 섭리를 더더욱 무너뜨리는 짓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난 지금도 세연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방향으로 그녀를 이끈다. 내 스스로를 미끼로 써도 상관없었다.

{음악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역시 그렇구나?}

세연은 예상대로라는 듯 말했다.

흡사 음악에 미친 사람과도 같은 대답은 그녀에게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까 같이 놀거나 네가 설거지를 할 땐 참 평범해 보이기도 했었어. 음악 말고도 네가 환영하고 싶은 일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

난 허를 찔린 기분이 들어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반나절 정도 같이 보내면서 세연 안에서 내 이미지는 평범함 쪽으로도 꽤 기울어졌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세연은 약간 더 여유를 가지고 날 대했다.

그 점이 조금 무서우면서도, 반가웠다.

난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이런 시간은 즐거워요.}

{정말?}

세연은 내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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