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22화 (522/1,277)

##  522화

차가 식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차가 식어 갈수록 테이블 위의 이야기는 조금씩 열기를 더해 갔다.

세연은 타티아나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티아나는 오늘따라 되도록 세연의 이야기를 잘 받아 주려 노력하는 것 같아 보였다. 세연은 거기에 힘입어 평소엔 하지 않던 이러저런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 보았다.

오늘 봤던 타티아나의 모습에서 색다른 면모를 보기도 했었고, 세연은 이 애에게서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으로도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질문이 조금 앞서나갔다.

{그런데 타티아나, 에르네스트에게 받은 곡도 어떤 보답 같은 거니?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야?}

{예……?}

조금 사적인 부분에 너무 파고든 걸까?

하지만 세연이 보기에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관계는 이렇게 물어봐도 무방할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세연은 이렇게 음악가들끼리 곡을 헌정하고 초연하는 광경을 처음 봤다. 심지어 두 사람은 같은 또래이기도 했다. 음악사 수업 등에서 배웠던 걸 실제로 본 기분이라서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어젠 연주 자체에 감탄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조금 여운이 가시고 나니 곡 이면에 있는 배경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

곡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인과가 되는 배경도 알아야 한다는 좋은 핑계를 학교에서 배웠다. 그 핑계를 쥐고 세연은 한 번쯤 묻고 싶었던 걸 이참에 살짝 물어보기로 했다.

“…….”

타티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끔 보이는 것처럼 조금 예민해 보이면서도 울적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연의 질문을 듣고서야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은 잠시, 타티아나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보답 쪽이겠지요?}

{엥…… 정말?}

{예. 제 기호를 사용한 것에 대한 로열티 명목으로 헌정받은 곡이니까요.}

{……????}

영어로 로열티니 트리뷰트니 하는 단어들을 듣다 보니 어떤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이 들린다.

지금 무슨 말이야?

어제 들었던 그 곡이 타티아나가 어떤 계약으로 받아 낸 거라고?

타티아나가 어떻게 말할지 열 개도 넘게 예상 답변들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 예상을 벗어나도 정말 아득히 벗어나는 대답이었다.

세연은 자신이 들은 것이 믿기지 않아서 입을 벙긋거렸다. 타티아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세연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러시아 애들은 그런 식으로 곡을…… 그, 거래해?}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 생각해요.}

{아니…… 그것도 그럼 특별한 일에 속하는 건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일반적인 게 아니면 특별한 거긴 한데, 그냥 이상한 거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세연은 자신의 머릿속을 그리듯 티스푼으로 찻잔을 빙글빙글 저었다. 돌아가는 찻물을 보니 눈도 돌아갈 것 같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그 속을 모를 미소를 지으며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재미있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한참을 차를 젓던 세연은 결국 항복했다.

{뭔가 예상 못한 이유라서 어지러워졌어.}

{차를 드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음.}

세연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차를 마셨다. 무언가 석연찮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달달한 차가 정신을 들게 해 준 건 사실이었다.

괜히 뭔가 더 물어봤다간 본격적으로 서류나 인감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세연은 더 이상 충격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고는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내일 돌아가면 또 바빠질 것 같아.}

{아직 학기 중이시죠?}

{응.}

돌아가면 바로 공부도 실기곡도 산더미처럼 해야 했다. 세연은 그냥 모든 걸 벗어던지고 여기로 유학을 와 버리고 싶단 생각까지 했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간접적으로 본지라 도피 유학 생각은 얼른 지워 버렸다.

그동안 한국에 살면서 공부량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여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공부에다가 독주회까지 말끔하게 해결한 친구가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세연은 저 애를 정말 신으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변명은 해 본다.

{물론 일주일 동안 그냥 쉰 게 아니라 학교 공부로는 절대 얻을 수 없던 경험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이득이지.}

어떻게 들어도 공부 싫어하는 사람들의 변명으로만 들리는 말이었는데, 착한 타티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타티아나는 기이할 정도로 세연이 연주자로서 성공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지금 친구라 여기고 있긴 하지만, 사실 남남이라 해야 옳을 텐데……. 타티아나의 태도는 선생님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연은 한국에 있을 선생님들과 교수님을 생각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교수님한테도 똑바로 말씀드려야겠어. 레슨도 제대로 받고 싶고.}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셨잖아요?}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세연을 가르치는 교수는 그녀를 엄격하게 교육시키면서도 언제라도 깨질 유리처럼 애지중지하기도 했다.

은연중에 세연에게 가지는 기대 목표치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세연이 거기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면 그 속도를 늦추려는 듯 낮춰 버린다.

때문에 세연은 러시아에서 가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배워 오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교수가 혹시라도 반대하거나 슬퍼한다면, 그 이유를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같이 울어 버릴 것 같았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연 역시 교수를 언제까지고 조심조심 대할 순 없었다.

세연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못 숨길 것 같아.}

교수가 종종 언급하는 신예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의 표현력이나 해석이 조금씩이나마 묻어날지도 모른다. 그 예민한 교수가 레슨을 하면서 그런 부분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세연은 그냥 빨리 말할 건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티아나의 무대를 제대로 본 뒤로는 모종의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같은 나이인데도 수준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나 열등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저 애가 한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만이 든다. 그 생각은 세연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타티아나는 가만히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종종 아련한 눈빛을 하거나 곤란해하곤 한다. 그래도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

타티아나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차 어떤가요 세연.}

{너무 좋아.}

세연은 이 달달한 체리 홍차와 바레니예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타티아나는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가실 때 선물로 드릴…… 지금 이 매장에서도 판매하는 것 같으니 사 가세요. 주변분들에게 드릴 선물로 좋을 거예요.}

{응. 그럴게.}

세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차를 좋아해서 자주 마시곤 한다. 이 차를 선물한다면 분명 좋아해 주실 것 같았다.

***

방학 첫날이 밝았다.

월요일 아침이다. 학교에 갈 일은 없지만 내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방금 전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또 봐, 타티아나!]

세연의 메시지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녀가 자주 웃고,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대에서 만난다면 음악을 교류하고, 어제처럼 만난다면 차를 마시며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도 욕심일까?

난 잠시 고민하다가 안전히 돌아가길 기도한다고 짤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젠가 건강히 만나기를.

“…….”

난 침대에서 내려와선 허리도 펴고, 몸 상태를 다시 확인해 보고는 오늘도 연습은 최소한으로 하고 쉬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연주회의 피로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피아노 연습을 안 하면서 요리 교습을 받을 순 없어서 스케줄을 싹 비웠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기로 정하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난 설렁설렁 거실로 나왔다.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나제즈다.”

반갑게 아침인사를 하니 나제즈다가 살다가 이런 날도 다 보겠다는 듯 방긋 웃었다.

“오늘은 연습 안 하세요?”

“예, 아침은 쉴 생각이에요. 이따 오후에 살짝 손 풀기만 하려 해요.”

“그럼 식사 전에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제가…….”

“아뇨,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알아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대신 나제즈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두었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좀 볼까 하다가 어차피 이 시간에 볼 만한 프로가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평소 스마트폰으로 하는 거라곤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이렇게 여유로울 땐 종종 인터넷을 보기도 했다. 뉴스 페이지를 보면 가십거리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난 이런 것들도 상식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기분으로 뉴스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터넷을 보고 있자 나제즈다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난 찻잔을 받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고, 찻물을 조금 쏟고 말았다.

나제즈다가 깜짝 놀라 티슈를 가지고 와 닦아 주었다.

“괘, 괜찮으세요? 뜨거우세요? 이를 어쩐…….”

“아니에요…… 괜찮아요…….”

차가 뜨거워서 흘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놀란 이유는 순전히 뉴스에 있었다.

“차 때문이 아니라 조금 놀라서…….”

“무엇에 놀라셨는데요?”

“…….”

난 화면을 힐긋 바라보았다.

거기엔 지난 토요일 자르야드예 콘서트홀에서 열린 독주회에 대한 뉴스가 실려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헤드라인이 ‘건반 아래의 안내자’라는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받아들이기로 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막상 보려니까 못 보겠다.

얼른 뉴스를 내려 버리고 나제즈다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나제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이죠?”

“예.”

몇 번이나 더 물어보고, 내가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걸 보고 나서야 나제즈다는 안심했는지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

내 무대에 대한 리뷰가 인터넷 등에 올라가는 건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지만 이만큼 읽기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겨울의 표리 작곡가로 알려진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앞으로 온 인터뷰들을 모조리 거절했었다. 결과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나.

일단은 내 연주회 리뷰는 나중에 평정을 찾았을 때 봐야겠다. 일단은 관계없는 걸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난 결국 또 나와 관계있는 기사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건 베르체노프 콘체른과 다른 대형 기업들이 연합해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와 그 수혜자들에 대한 기사였다.

메세나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기업 활동을 뜻한다. 아버지에게 이런 걸 들은 적이 없는데 무슨 기사인가 싶어서 조금 살펴보는 사이, 루슬란 오빠가 거실로 나왔다.

“학교 안 가네. 타티아나.”

“오빠.”

대학교 역시 방학인지라 루슬란 오빠의 얼굴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버지가 맡기는 숙제는 변함없겠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오빠가 소파 옆자리에 앉더니 물었다.

“뭐 봐?”

“그냥…… 음, 회사 이름이 있어서요.”

“무슨 말이야?”

“여기요.”

난 내가 발견한 기사를 오빠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베르체노프가 메세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이거…….”

“알고 계셨나요?”

“응.”

“언제부터였나요?”

“꽤 되었지.”

“전 듣지 못했는데요.”

조금 이해가 안 간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예전부터 메세나 활동을 했다면 모를까, 불과 몇 달 전부터 시작했다면 지금 우리 가족 중에서 예술에 몸을 담고 있는 내게 알려 주는 게 자연스러웠다.

오빠는 잠시 고민하더니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네겐 당분간 비밀로 하라 하셨거든.”

“왜요……?”

실망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오빠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티아나.”

“예.”

“내가 너한테 무대에 서 달라고 부탁하면…… 어때? 괜찮을까?”

갑자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은연중에 느껴지는 바로는, 이건 어떠한 가정이 아니라 실제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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