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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23화 (523/1,277)

##  523화

무슨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우선 루슬란 오빠에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무대에 서 달라는 부탁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오빠의 부탁이라면 더더욱이요.”

“……난 네가 한 연주회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알아.”

“항상 하는 일이니 괜찮…….”

“항상 어렵다고도 했었잖아. 안 그래?”

오빠는 예전 내가 했었던 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곡을 준비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고 어렵다. 그건 지금도 같다.

하지만 그 또한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날 찾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오빠가 날 필요로 한다면 힘들다고 해서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 난 태도를 살짝 바꾸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제 마음이 내키도록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

“알았어.”

일부러 사무적인 태도를 보였더니 루슬란 오빠로서도 편하게 말하기 좋은 듯했다.

“정말 얼마 안 됐어. 우리가 메세나 협회와 정식적으로 파트너쉽을 체결한 건.”

오래 전 로마 시절부터 귀족들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존재해 왔고, 그런 사람들의 지원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메디치 가문의 활동에 이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선 그러한 활동을 메세나라 부른다.

러시아에도 수많은 메세나 재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베르체노프 콘체른은 기업 차원의 이득은 없는 기부 형식인 필랜스로피philanthropy 활동으로 국립 재단 등에 일정액을 후원하는 정도였고, 그 이상으로 예술계와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파트너쉽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필랜스로피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제대로 예술계와 상호 이득이 되는 관계가 된 것이다.

난 그 구조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진 못하지만,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이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 있다.

“좋은 일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딸이 피아니스트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아니,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

“오해요?”

갑자기 무슨 말씀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자 오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아버지가 우리 기업 활동에 널 이용하려고 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아.”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메세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날 내세우는 방법일 테지.

난 작년에 이러한 이야기를 실제로 들은 적도 있었다. 사업화라면 자신 있다던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사장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그의 수완은 적절했고 굉장히 현실성 높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오빠가 하는 말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버진 네 생각을 많이 하셨어. 네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뭘 하실 수 있을까 생각하시다가 결정하신 일이야.”

난 그제야 그간 예술계에 큰 관심이 없던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최근에야 메세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기업적인 이미지 상승을 꾀하거나 예술계에 뛰어듦으로서 상업적 이득을 취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해 주려 하시는 간접적인 선물에 가까운 것이었다.

“…….”

이 간접적인 선물은 그 어떤 직접적인 선물들보다 더 기쁘게 다가왔다.

물론 직접 선물을 받는다면 무척이나 행복하겠지. 하지만 내 개인적인 욕망들은 거의 대부분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때문에 아버지는 대신 내 공익적인 쪽으로 향하는 바람을 읽어 내셨다. 그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아버지가 내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누릴 수 있게 되리란 것도. 그건 조금 막연하면서도 궁극적인 내 지향에 닿아 있었다.

나와 아버지가 서로 엇나가고 있을까 봐 오빠는 걱정인 듯한데,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아니라 절 보고 결정하셨단 건 이해했어요.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이해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왜 알려주지 않고 비밀로 하신 건가요?”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본격적인 메세나 활동이 내게 영향을 받은 아버지의 선물이란 건 알겠다. 하지만 그런 선물이라면 내게 바로 알려 주어야 하지 않나? 얼마나 좋아할지 알고 계실 텐데.

아버지는 비밀이 많은 분이긴 하지만 이런 일까지 비밀에 부칠 이유는 없었다. 서프라이즈로 계획하고 계셨던 건가 생각해 보아도 약간 이상했다. 아리송한 얼굴로 바라보니 오빠가 웃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만도 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루슬란 오빠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이유를 설명해 주려나 기다리는데, 거꾸로 질문을 해 온다.

“타티아나, 메세나 협회나 재단들과 파트너쉽을 맺은 뒤로 가장 많이 받은 요청이 무엇일 것 같아?”

갑자기 퀴즈시간인가?

난 사업적인 식견이 정말 어두운 편이지만 그래도 충실히 대답하기 위해 생각해 보았다.

공익적인 예술 산업엔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간다. 단순히 관계자들의 월급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홀의 설비나 운영, 페스티벌이나 콘서트의 개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콩쿠르 등으로 어린 영재들을 찾아내는 것부터 대여해 줄 악기를 구매하거나 유지관리 하는 것까지 정말 광범위한 부분에 자금이 필요했다.

과거 소련 시절엔 정부에서 독점하여 이런 산업들을 후원했기 때문에 그리 문제될 게 없었지만, 이젠 기업의 메세나 활동이 없다면 당장 힘들어지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금전적 목적 말고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이어진 관계이기도 하고.

“재정적인 지원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약속한 부분들이 많거든. 안 그래도 아버지는 나중에 재단들을 통합할 생각이신 것 같기도 하고.”

“통합요……?”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아무튼, 어떤 요청일까?”

나중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이 될 것 같은데……

멍하니 있는 사이 오빠가 정답을 말해 주었다.

“바로 네 스케줄을 잡아 달라는 요청들이었어.”

“……예?”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올려다보았다. 기업과 재단의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서서히 정리되어 간다. 이제 와서 당황해 할 일은 아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메세나 활동에서 내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그게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나 루슬란 오빠의 뉘앙스를 약간 달랐다.

“요번 연주회 때에도 협회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버지와 내가 놀랄 정도로 필사적이더라고.”

“그런가요?”

“그래, 그 사람들이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거의 전부 타티아나 네 이야기였어.”

협회에서 나온 분들이 우리 기업과의 관계를 위해 날 필요로 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연주자로서의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난 엊그제 봤던 몇몇 분들을 떠올려 보았다. 일전에 뵌 적이 있는 아버지의 지인 분들도 많이 계셨지만 처음 보는 분들도 많았다. 그 전부를 알아볼 순 없어서 똑같이 대응했는데, 메세나 협회 관계자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날 필요로 한다면 왜 직접 이야기를 안 하신 거지?

“그분들은 저랑 이야기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막으셨거든.”

난 왜냐고 묻지 않았다. 차츰 상황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간접적인 선물을 주고 싶었던 아버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물에 내가 얽히게 되면 상황은 복잡해지게 된다.

“그 이유는 방금 전 말씀하셨던 오해와 관계된 건가요?”

“그래…… 메세나로서 기업 이미지 상승에 널 내세운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철저히 기업의 활동과 내 활동이 분리시키려 하셨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오해할 거라 생각해서.

아버지가 무엇을 꺼려하셨던 건지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조금 안타까워졌다.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걸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라면 고마워.”

당연히 진심이었다.

늘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미소로 고개를 주억이자 오빠는 내가 억지로 이런 태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본 듯했다. 계속 조심스럽던 오빠의 태도가 한결 편안하게 바뀌었다.

“아버지는 불확실한 걸 그리 좋아하시지 않아. 그래서 지금은 자리만 잡아 둔 다음, 나중에 너에게 적당한 위치를 주고, 네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될 나이가 되면 맡기려 하셨지.”

“……예?”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되묻자, 오빠는 그런 이야기는 알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짧게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랬다고. 그런데 난 지금 네 의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예술계에 줄 수 있는 건 재정지원뿐만이 아니다. 연주자도 한 명 내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연주자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잖은가? 오빠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네가 무대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그곳에 서는 걸 얼마나 원하는지 알 것 같거든.”

“…….”

협회에서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무대에 세우려는 이유였다. 난 아마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무대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무대에 설 기회였다. 심지어 내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기회.

“그래서 이번 역시 제가 선택할 일이라 생각해서 제안해 주신 건가요?”

“맞아.”

오빠는 두 가지를 저울에 달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오빠는 아버지의 방침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한다.

이번 역시 그러한 일환이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모르도록 내버려 두면 내가 기업의 이름을 부담감으로 짊어지는 일도 없을 테지만, 그 부담감을 지고서라도 무대에 서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기회를 준 건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정작 이렇게 다 털어놓은 이유는 따로 있다는 듯 장난스레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전했다간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도 했고.”

“아하하하, 그랬을까요?”

시간이 흘러 몇 년 후에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면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예전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느냐고 할지도 모르지.

지금은 당황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잘 모르는 것에 가까이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음악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생각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기 시작했다. 일방적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빠는 내 표정만 봐도 알겠다는 듯 웃었다.

난 테이블 위의 찻잔의 끄트머리를 슥 매만지고는, 오빠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직접 말씀드려야겠죠?”

“그게 낫겠지.”

“협회의 요청에 응할 필요는 없다고 반대하시면 어쩌죠?”

“뭘 어떻게 해?”

루슬란 오빠는 피식 웃더니 내 어깨를 쿡 찔렀다.

“너도 한 고집 하잖아.”

“…….”

음반을 녹음했을 때도 그렇고,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내가 진짜 고집불통인 것처럼 말할 건 없지 않나?

난 괜히 리모콘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정형화된 소음이 사방을 채웠고, 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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