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4화
노을이 질 무렵. 루슬란은 유리의 서재를 찾아갔다.
서재는 유리의 휴식 공간이자 동시에 사무실이었다. 유리는 퇴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식사 전까진 이 방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차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루슬란은 사실 이 시간에 유리를 찾아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창 사업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을 유리에게 말이라도 걸었다간 최소 30분은 붙잡혀서 질문에 답하면서 공부를 당해야 하고, 운이 나쁘면 보고서를 써 오란 숙제라도 한 아름 받아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오늘은 저녁 식사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루슬란은 해야 할 말을 다시 정리한 다음, 서재 문을 노크했다.
“아버지.”
“그래, 루슬란.”
유리는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사업가로서의 냉정한 안광이 번뜩인다. 이 시간에 루슬란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이미 몇 가지나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유리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루슬란은 지금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앞뒤 설명 없이 루슬란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늘 높게만 보이는 아버지에게 유치하게 반항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유리는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근엄한 짜증. 그런 것이 루슬란에게 돌아왔다.
“……쓸데없이 에둘러서 내게 장난 칠 생각은 마라. 시험을 하고 싶다면 상대를 봐 가면서 하라고 가르쳤던 것 같은데.”
루슬란은 뜨끔해져서 눈을 돌렸다.
계속 생각해 왔던 것들은 다 날아가 버렸고, 조금 당황한 루슬란이 서둘러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런 이유만은 아니고…….”
“이번 주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윽.”
어림도 없었다. 루슬란은 이번 주 아버지에게 받을 숙제와 업무들을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필이면 또 월요일이네. 기나길 일주일을 생각하며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한숨을 내쉰 유리가 물었다.
“똑바로 말해 봐라.”
물론 관심이 없으실 리가 없지.
루슬란은 이미 했던 실수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간략히 설명했다.
“메세나 협회의 사람들이 했던 요청 있잖습니까? 타티아나가 협회 주최의 행사에도 한 번 출연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 그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유리는 그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냉정하게 딱 자르곤 했었다. 타티아나의 스케줄에 대해선 유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반대로 타티아나가 자신의 스케줄을 맞출지도 모른다.
유리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타티아나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상황을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안다면 피하지 않을 터. 타티아나는 그런 부분에선 정말 강직하게 대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학을 맞이한 동생에게 굳이 일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유리가 짧게 물었다.
“왜?”
“뉴스에서 다 봤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뉴스를 자주 보는 편이다. 그녀는 자신이 상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틈틈이 남는 시간에도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동안은 우연찮게 베르체노프의 메세나 활동에 대한 기사를 못 봤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루슬란이 굳이 있는 그대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눈빛이다.
베르체노프의 이름이 음악 저널에 올라왔다고 해도 그냥 비즈니스 활동이라 넘어가면 타티아나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수긍할 타입이었다. 그런데 루슬란은 일부러 그녀에게 향한 요청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유리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
그러나 이유를 묻진 않았다.
루슬란이 나쁜 의도로, 동생을 이용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고 자수하듯 찾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유리는 차분히 벌어진 일에 대해 물었다.
“타티아나는 뭐라고 했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루슬란은 유리의 목소리에서 의심과 근심을 읽어 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랬다간 이번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은 넘게 회사 일로 죽어날지도 모른다.
“감사하다고요.”
“뭐?”
“그 애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보다 더.”
평범하게 보자면 아버지의 애정이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의 메세나 활동같이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굉장히 기이하게 생각할 만도 하다.
유리도 루슬란도 그러한 부분에서 오해를 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해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려 했다.
“어느 무대든 상관없다고 했어요.”
유리가 기업에 도움이 될 거라며 한마디만 한다면 타티아나는 어디든 가서 피아노 앞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점에 대해서도 유리는 걱정스레 여기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자기가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그게 걱정이다. 루슬란.”
기억을 잃고 있었을 때도 타티아나는 두 사람의 걱정거리였다. 정신력이나 해내는 일에 대해선 문제가 없었지만, 평소 생활이 너무 힘든 까닭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연습실로 향하는 딸을 보면서 그저 열심히 하는구나 하고 흡족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기억을 되찾고 나니, 무언가에 쫓기듯 그렇게 필사적이던 타티아나의 생활은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동시에 유리와 루슬란에게 향하는 죄책감과 헌신 역시 늘어나 있었다. 그건 조금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과거의 일로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전에도 그런 점은 있었지만, 이젠 보다 분명해져 있다. 타티아나는 늘 밝게 웃으며 행동하고 있지만 종종 무거운 책임감을 보였다.
유리의 걱정처럼 그녀는 거절을 할 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싫은데 승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 따르는 것일지도.
“…….”
그러나 루슬란은 오전에 봤던 타티아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거절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거운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자유롭고 당연한 이유가 그녀를 이끈다.
루슬란이 물었다.
“타티아나가 바보라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보가 아니라 너무 똑똑해도 문제인 게다. 루슬란.”
“그럼 걱정하실 필요 없겠네요. 그 애는 바보가 맞으니까.”
“……?”
유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반응이다. 루슬란은 장난스레 킥킥 웃으며 말했다. 항상 어렵고 커다란 베르체노프의 총수가 아닌, 아버지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걱정 같은 건 타티아나의 안중에도 없어요. 물론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 정도는 되니까, 거기에 부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보였죠. 하지만 그건 부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확신을 담아 루슬란이 말했다.
“그 애에겐 무대에 설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는 것 정도면 충분해요.”
여러 복잡한 이야기들을 할 땐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저 무대에 설지 말지를 결정하면 된다고 단순하게 정리하자마자 타티아나의 눈엔 생기가 깃들었다. 마치 그 말만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보일 정도여서, 결정에 대해선 달리 물어볼 것도 없었다.
언젠가 집사장 예고르가 말한 적이 있었다.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존재의 이유에 가까운 것일 거라고. 루슬란은 그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말없이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루슬란은 그때 타티아나가 보였던 태도를 조금이라도 전하기 위해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니 어렵게 보지 마시죠. 아버지. 지금까지도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애 아닙니까.”
“…….”
음악과 함께 하는 한 타티아나는 잘 할 것이다. 게다가 그 애가 음악에 얼마나 강한지는 이틀 전 함께 본 바 있었다.
타티아나의 연주회를 본 사람들은 모두 타티아나가 부리는 음악에 빠져들었고,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타티아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루슬란은 그곳에 발끝만 담그고 있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거대한 세계가 있음을 느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큰 그 세계에 타티아나는 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연주자는 분명 어디서나 괜찮을 것이다. 루슬란은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계속되는 내내 유리는 무표정했다. 그러나 내심 결정은 마친 듯 보였다. 이윽고 유리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알겠다. 타티아나에겐 분명히 말하마.”
“예.”
“네가 그 애를 바보 취급하면서 어차피 단순한 애니까 마음대로 하게 둬도 된다 했다고 말이지.”
“예?”
슬슬 이야기가 다 되었다 싶어 안심하고 있던 루슬란은 당황하며 재차 말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제가 단순할 거라 하긴 했지만, 타티아나도 분명 깊은 생각 끝에…….”
“그건 직접 말하든가.”
유리는 루슬란의 말을 툭 잘라 놓으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그 표정엔 변함이 없었지만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루슬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리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서랍에 있던 서류들을 꺼냈다. 그리곤 그것들을 읽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다면 타티아나의 의사에 따라 차즘 쥐여 줄 건 쥐여 주는 게 낫겠구나.”
분명 메세나와 협회에 대한 서류겠구나. 루슬란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는 농담을 하던 태도를 지우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까지 너무 빠르게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직 열여섯 살인 애니까, 그 애도 바라지 않고 협회에서도 바라지 않겠죠. 그거야말로 선물이 아닌 부담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가장 좋은 건 그저 타티아나가 연주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겁니다. 후원 연주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죠.”
“……흠.”
유리는 침음을 삼키며 서류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루슬란은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유리가 타티아나에게 쥐여 주려고 하는 것들의 규모는 지금까지 나온 것만 해도 타티아나가 기겁할 정도였다. 그런데 앞으로 더 어떤 것들이 나올지, 루슬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루슬란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들의 크기를 타티아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키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동생에게 많은 걸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동생이 되도록 다른 것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좋아하는 것만 하고 거기에 집중할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일단 아직은 괜찮았다. 나중에 천천히 물어봐도 될 일이고.
“최소한 대학에 입학한 뒤에. 아니면 대학을 졸업한 뒤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사회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야겠죠. 음…… 솔직히 지금도 저보다 그 애가 더 유명할 것 같긴 한데.”
“하하. 그렇지.”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좋고말고.”
“좋아 보이시니 저도 좋네요.”
실없이 대답하면서 루슬란은 웃었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타티아나도 좋게 받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