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화
조금 긴장했었던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루슬란 오빠에게서 메세나 협회의 요청에 대해 들었으니 거기에 응하고 싶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말씀하실지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열 개 정도 예상 답안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루슬란 오빠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메세나 활동에 대해 설명해 주시며 파트너쉽을 맺은 곳들을 일러 주셨다.
“그중에서도 네가 관심 있어 할 만한 곳들이 몇 있으니 나중에 보여 주마.”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래라.”
루슬란 오빠가 슥 끼어들었고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라 하신다.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곧바로 내가 원하던 것에 대한 답도 해 주셨다.
“타티아나, 네가 장차 후원 연주자로 활동하기 바란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뜻대로 하거라.”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너무 쿨하게 허락해 주셔서 농담하시는가 싶을 정도였다.
만약 하게 된다고 해도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 될 테니 그렇게 가볍게 허락해 주실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이런 상황도 다 예상하고 계셨던 것 같다.
“네가 그쪽에 연락을 해 놓거라. 루슬란.”
“알겠습니다.”
칼같이 척척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선 내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예상외의 상황이지만 나쁘진 않았다. 난 그냥 식사만 하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에 내게 물었다.
“하나만 기억해라 타티아나. 무엇이든 간에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부디 베르체노프로 살면서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거라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난 그것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의무감에 휩쓸려서 따르고 있을까 싶어 계속 걱정이셨다.
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짚어 보았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죄책감 등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어두컴컴하게 날 잠식하지 않는다. 이 감정들은 내 주변을 맴돌며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들이기도 했다.
이번 일을 결정할 때 의무감이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난 이제 그 의무감 또한 자랑스럽고 의미 있게 생각한다.
이로써 난 연주자로서의 개인적인 목표만 좇는 것이 아니라, 조금 넓게는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더더욱 넓게는 음악계에 공익적인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미비할 테고 이제 첫 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막다른 길이 아니다. 막다른 골목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담을 넘어서고 나니 길게 펼쳐진 길이 보인다.
바로 앞을 똑바로 보면서도 끝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전에 끝을 보기 두려워서 매번 발치를 확인하고 내 위치를 찾아 두리번대던 때와는 다르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이 또한 끝나겠지. 하지만 난 다시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연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방학인데도 며칠 동안은 별일 없이 느긋하게 지냈다.
애초에 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피아노를 연습하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 놀러 다니기도 했다. 두 사람과 놀다 보면 마지막은 꼭 연습실이나 음반 매장이 된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일도 생겼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녹음과 프로듀싱에 관련한 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난 두말 않고 바로 스튜디오로 향했고, 그 뒤로 이틀간 왔다 갔다 하면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일을 도와주었다.
“방금 구간 다시 한 번 연주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대신 페달을 거의 최대한으로 활용해 주십시오.”
“페달을요?”
“예. 그렇게 되었을 때의 부피감과 위상 상태를 체크하고 싶군요.”
“알겠어요.”
주문에 따라 피아노를 연주했다. 똑같은 곡이지만 페달을 꾹 밟으며 음을 늘어뜨린다. 동시에 여러 음이 뒤섞이면서 화성이 흐트러진다.
보통은 페달로 음들을 구분 짓지만, 난 주문받은 그대로 페달은 될 수 있는 한 길게 밟으면서 오로지 손가락의 터치로만 명료함을 살려 냈다.
잠시 후 유리 저편의 컨트롤 룸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박수를 쳤다.
“정확하게 들립니다. 하하, 타티아나의 건반 컨트롤 능력과 표현력은 정말 상상 이상이군요.”
“칭찬 감사해요.”
“이건…… 마이크를 조금 바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이미 백만 루블도 넘는 마이크를 몇 개나 쓴다는 걸 알고 있는데, 대체 뭘로 바꾸시겠다는 건지 듣기만 해도 무섭다.
그 후로도 몇 번 반복해서 프로듀서를 도와주다 보니 2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도움 받아야 할 부분은 다 되었다며 내게 차를 끓여 주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별 말씀을요. 제가 더 많이 배웠는걸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있다 보면 배우는 점들이 많다.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이나 프로듀싱에 대한 지식들, 그 외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음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 클래식 피아노에만 집중하는 내게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나 귀중한 것들이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기분 좋게 웃으며 찻잔을 저었다.
“이런 부탁 자체도 쉬운 부탁이 아니지만…… 사실 부탁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고 곧장 실현해 보이는 연주자는 더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각자 생각하는 음악이 달라서 그런지…… 그런데 타티아나는 신기할 정도로 제가 원하는 음향을 그대로 구현해 내더군요.”
소리에 대해 연구하면서 난 몇 가지에 능숙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무언가를 흉내 내는 데에 굉장히 익숙했다.
처음엔 머릿속에 있던 소리들을 현실에 옮겨 내기 위해, 그 후엔 내 목소리를 피아노로 연주하기 위해 했었던 연습들이었다. 그땐 참 미련한 방법이었단 생각도 들지만, 이렇게 도움이 되니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전 타티아나와 알게 된 게 정말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부끄럽기도 해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거푸 찻잔만 기울이자 프로듀서가 웃으며 물었다.
“다음 음반은 혹시 생각 없습니까?”
우리가 함께 음반을 만들었던 건 지난여름 이맘때였으니 이제 또 같이 일할 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저번처럼 꼭 해야겠단 필요성은 딱히 못 느끼고 있었다.
“글쎄요, 프로듀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하시더라도 1년 사이의 성장을 충분히 보여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슥 들어 녹음실 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굳이 베토벤과 슈만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타티아나.”
작년엔 영생하게 해 주겠다는 프로듀서의 말에, 영생한다면 해파리보단 바닷가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했었다. 이 음반을 만들고 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두운 생각이 날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만들곤 했다.
지금은 만약 음반을 만들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누구라도 들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음반을 만들고 싶다.
그런데 한정된 용량 안에 그 곡들을 꼽으려면 또 선곡에 한참이나 걸리겠지?
뭐든 간에 쉬운 일은 없다.
“생각을 조금 해 볼게요. 그런데 이번엔 무명으로 낼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 쉽게 결정하긴 어렵네요.”
“그렇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하, 누구라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했던 프로젝트는 이미 끝났으니 이제부턴 내 음반은 공식 디스코그래피로 올라갈 예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선곡에 힘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표정을 보더니 한참을 웃었다.
“꼭 매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시죠.”
“그리 생각은 하지만…….”
“제 생각엔 내년엔 국제 콩쿠르들도 많으니 올해 음반에 신경을 쏟는 것보단 콩쿠르 쪽에 힘을 싣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들과도 상의해 보시고요.”
“……그렇게 할게요. 프로듀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니까 상황이 정리된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게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30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을 주제로 한다면 할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러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적당히 이야기를 끊었다.
“오늘은 피곤하실 텐데 이만 돌아가시죠, 타티아나. 방학이니 다른 일정도 있으실 것 아닙니까?”
“저 일정 없어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사과하시니까 내가 글러먹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난 몇 번 더 프로듀서와 농담을 주고받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끝나셨습니까? 아가씨.”
“예. 고생했어요 빅토르. 이만 돌아가죠.”
올 여름에도 휴가를 주겠다고 했는데 결사반대한 빅토르는 오늘도 날 따라 경호하고 있었다. 대체 그럼 휴가는 어떻게 할 거냐 물어봤더니 3년에 한 번이면 된다고 하던데…… 그래선 자기 생활이 있기는 할까 걱정이다.
1분이라도 빨리 귀가해서 빅토르를 쉬게 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팔을 잡고 살짝 당겼는데, 그는 끌려오지 않았다. 올려다보니 그가 귓가를 톡톡 쳤다.
“그사이 아가씨에게 온 연락이 있었습니다.”
“아, 누구였나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입니다.”
알아 본 적 있는 곳이었다. 얼마 전에 루슬란 오빠가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곳을 찾아놓았다면서 이야기했던 협회다.
수백 개도 넘는 메세나 협회나 재단들 중에서도 규모도 크고 베르체노프 외에도 많은 회사들의 후원을 받는 곳이다. 이곳이라면 내가 큰 부담 없이 연주자로서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방학에 바로 무언가 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시작하기엔 좋았다. 난 싱긋 웃으며 빅토르에게 말했다.
“없던 일정이 생긴 것 같네요?”
“기다리던 일정이십니까?”
“맞아요. 혹시나 했는데 바로 연락이 온 걸 보니 절 필요로 하나 보네요. 전화를 걸어 주세요.”
빅토르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잠시 신호를 기다리면서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호쾌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 하하핫, 생각보다 금방 전화를 주셨군요? 아가씨의 의사는 어떻습니까?
살짝 놀랐다. 아무래도 전화 너머 상대는 방금 전 전화를 받았던 빅토르가 다시 걸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난 잠시 대답하지 않고 텀을 두었다가, 상대가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질 즈음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 아!!
상대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 빠르게 사과하며 인사를 받았다.
- 이런 실례를.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전 발레리 르포비치 타라소프라 합니다. 저번 연주회 때 뵈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발레리 르포비치……?”
난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인사를 한 적이 있었나?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데, 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살짝 머뭇거리자마자 빅토르가 자신의 또 다른 스마트폰에 어떤 화면을 띄워 보여 주었다. 거기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발레리 르포비치의 사진과 짧은 이력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난 멍하니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곤혹스러웠다. 이 정도로 유능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어쨌든, 이런 정보를 가지고 아는 척할 순 없었다. 난 평범하게 답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발레리 르포비치.”
- 그래요, 그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생각은 정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대답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미팅은 언제쯤 잡으면 좋겠습니까? 지금 방학이죠? 오늘 시간 됩니까?
“…….”
정말 말도 빠르고 성격도 빠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도 늑장을 부릴 생각은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