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6화
약속은 다닐로브스키의 지구에 있는 한 카페 쪽으로 잡았다.
난 차를 타고 가면서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하고 머릿속에 정리해야 할 정보들을 정리했다. 어차피 연주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곤 연주 말고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지나 약속한 카페에 도착했다.
난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셔츠 차림의 한 남자가 도착했다.
체격도 인상도 좋은 남자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이거, 저도 일찍 온다고 왔는데. 이렇게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에요.”
이렇게 직접 보니까 기억이 난다. 분명 연주회에 와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좋은 날이군요.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반가워요, 발레리 르포비치.”
“제 명함입니다.”
난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들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명함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매니저 발레리 르포비치 타라소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함을 가방에 집어넣고 발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제안했다.
“앉을까요?”
“예.”
“음료는 제가 사도록 하죠. 어떤 차 좋아하십니까?”
“오렌지 주스도 괜찮을까요?”
“예? 하하, 물론이죠.”
6월의 날씨는 따사롭다.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2인 테이블에 앉았다. 바로 온 종업원에게 발레리가 음료를 주문했다.
이렇게 마주앉으니 약간 어색하다. 난 괜히 옷깃을 매만졌다. 발레리는 그런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저번 주 있었던 연주회가 마치 꿈이었던 것 같군요. 그땐 학생 연주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지금은요?”
“믿을 수밖에 없군요.”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와 사복 차림의 지금 보여지는 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어리숙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괜히 목에 힘을 주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발레리는 이미 충분히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때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곧장 유리 알렉세예비치에게 부탁드렸죠. 어떻게든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없겠느냐고.”
“저도 들었어요.”
그건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이분들이 적극적으로 날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야말로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는 사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죠.”
“하하, 연주자 분들이 저희 후원을 받고자 하시면 상당히 엄격한 심사가 필요하긴 하죠, 하지만 타티아나의 입장은 저희를 후원하시는 쪽이지 않습니까?”
“…….”
“아! 그렇다고 심사가 없었다는 건 아닙니다. 이미 심사는 전원 만장일치 만점으로 통과했습니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발레리가 곧바로 덧붙였다.
조금 의아했다. 만장일치 심사?
이런 거대 협회와 교류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발레리가 말한 대로 심사가 필요하다. 그건 후원하는 입장이어도 마찬가지이다. 후원받는 입장보단 조금 덜하겠지만, 피아노로 동요 정도밖에 연주하지 못하는데 후원을 한다고 해서 무대에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심사를 발레리는 내가 이미 통과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메세나 협회에 대해 공부를 조금 하고 왔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결국 솔직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음…… 전 귀 협회의 콩쿠르에 나간 적이 없는데요?”
“콩쿠르는 없지만, 연주회는 하신 적 있지 않습니까?”
“……예?”
“타티아나의 연주를 본 사람이 절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이었습니다. 그중 네 분은 콩쿠르 심사를 위탁받은 적이 많은 분들이시고요.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사를 받았던 것이지요. 음, 혹시 불쾌하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겠습니다.”
난 작게 탄성을 냈다.
메세나 협회 관계자 분들이 많이 오셨다는 건 루슬란 오빠와 이야기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그냥 오셨을까? 당연히 내 연주를 듣고 평가도 하신 것이다.
일곱 명이면 거의 콩쿠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없던 부담감도 생긴다. 발레리는 아무 말 없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사실 난 거기에 대해선 별로 부담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 난 쿨하게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 400명에게 심사를 받는다는 기분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400명의 심사위원이라니, 저라면 손이 떨려서 연주를 못했을 것 같은 조건이군요.”
발레리는 살면서 이런 대답은 처음 들어 본다는 듯 허하게 웃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장담하죠. 400명 전원이 타티아나에게 최고점을 주었을 겁니다.”
“아하하, 설마요…….”
“제가 한번 설문을 받아 볼까요? 하하.”
그는 괜한 너스레도 떨며 대화를 풀어 나갔다. 처음에 약간 있었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주문했던 음료도 나왔다. 난 오렌지 주스, 발레리는 홍차였다.
우리는 대화를 하던 입을 살짝 축였다. 잠시 말이 끊기면서 대화 주제가 정리되었고, 그다음으로 발레리는 테이블 위에 본론을 올려놓았다.
“그런 연유로 타티아나가 공익적인 연주자 활동을 하시는 데에 승낙만 하시겠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협회 내부의 심사는 통과했으니 이젠 관계성을 규정하는 일이 남았다.
발레리는 준비해 온 서류를 몇 장 꺼내 놓았다. 거기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와 협회원들에 관련된 사항들, 그리고 후원 연주자에 대한 내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협회는 사단법인이지만 일종의 재단처럼 운용되면서 영리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에 대해 관계된 사람들은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발레리는 그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구두로 설명해 주기도 했다.
난 후원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최소한의 비용 외엔 이득을 취하지 못한다. 모든 수익이나 기부금 등은 후원이 필요한 연주자들을 위해 쓰이거나 기부활동에 사용된다.
기초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난 꼼꼼하게 발레리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바로 사인하거나 하지 않고 서류를 챙겨 집에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내가 선택할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오빠나 아버지에게 한 번 보여 드리는 게 올바른 순서였다.
발레리는 내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시군요. 알겠습니다. 늦어도 괜찮으니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내가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발레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흡족하게 웃더니 이번엔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그러면…… 만약 활동해 주신다고 하면 무엇을 할 수 있으신지 설명을 드려 볼까요.”
그냥 간단한 이야기만 하고 갈 줄 알았는데, 발레리는 본격적으로 메세나 협회에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알아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건넨 서류엔 각 월별로 표시된 표가 그려져 있었고, 날짜별로 장소와 행사 컨셉, 그리고 참가 연주자들의 이름 등이 적혀 있었다.
“하반기에 기획 중인 저희 행사들입니다. 백화점에서 열리는 이 행사나 10월 달의 콘서트 같은 경우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아실 법한 피아니스트 분들도 참가해 주실 겁니다.”
난 발레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보았다. 척 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행사였다. 참가 연주자들의 이름 역시 저명한 연주자들이 많았다. 저분들에 비하면 난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발레리는 특별한 제안을 해 왔다.
“만약 저런 행사들에 참가하길 원하신다면 우선적으로 참가하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저희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정도인데요.”
그의 목소리는 활활 불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희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연주하는 음악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매기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만 누리기엔 아깝더군요. 만약 공익사업에 관심이 없다 하셨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가치를 사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자 했을 겁니다. 저희 협회의 임원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
“그런데 공익적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고 하시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훌륭했다는 칭찬보다 훨씬 더 와닿는 말이었다. 그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발레리를 바라보자 그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하지만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나설 순 없었다.
난 이번에 학기말 시험과 연주회 준비를 동시에 했고, 둘 다 잘 해냈지만 심신 모두 굉장히 힘들기도 했다.
다음 학기는 더 힘들 예정이다. 무턱대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런데 다음 학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해요.”
“아, 학생이시니 그 부분은 이해합니다. 스케줄도 바쁘실 테고.”
“다음 학기 스케줄은 되도록 비우고 있어요. 내년 국제 콩쿠르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내년 말입니까?”
난 국제 콩쿠르에 바로 참가할 생각이다.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마지막으로 선생님들과 약속했던 2년이 내년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난 그 또한 중요한 약속이라 생각한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내년에 열일곱 살이 되죠?”
“예. 맞아요.”
“하하, 나이제한을 넘어서자마자 바로 열리는 콩쿠르라면 쉽지 않을 텐데, 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합니다. 진심입니다.”
“고맙습니다. 발레리 르포비치.”
발레리는 내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국제 콩쿠르는 보통 4년이나 5년 주기로 열린다. 나이 하한선이 있는 것처럼 상한선 역시 존재해서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기회이다.
그런 이유로 하반기 행사들을 바로 참가하긴 어렵게 되었다.
난 후원 연주자로 연주회에 서 달란 요청을 수락해 놓고는 바로 곤란하다는 말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조금 난감해졌다. 발레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있었지만 미안함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추천한 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싶어 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까운 행사는 어떨까요? 여기 있네요.”
“이건…….”
2주일 정도 뒤에 있는 콘서트를 지목했더니 발레리가 그걸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살짝 고민하며 말했다.
“출연을 약속했던 연주자 분들이 계셨는데 사정이 생겨 그만두시는 바람에 취소 직전인 행사입니다. 아마 이대로 취소하게 될 것 같은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조금 더 큰 무대에 올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흠…….”
그가 어떤 욕심을 가지고 있는진 알겠다. 아마 상당히 큰 무대를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난 발레리만 괜찮다면 가까운 시기에 하게 될 이 연주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연주자가 없어 취소될 위기라면, 내가 돕고 싶었다. 굳이 없어지는 것보단 그게 나을 테니까.
발레리는 내 입장과 상황을 다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진 확실하지 않습니다. 총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필요하니 말입니다.”
“……세 명이요?”
“예. 제가 어떻게든 더 연락을 해 보겠지만…….”
그냥 저 혼자 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메세나 협회에서도 한 번에 그렇게 내 독주회로 바꿔 버릴 순 없는 모양이다.
두 명을 더 어떻게 구하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은데. 난 고민하는 발레리를 보며 함께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제 친구에게 부탁을 해도 괜찮을까요?”
“친구분이라면……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입니까?”
“예. 아, 실력은 제가 보장 드릴게요. 물론 심사가 필요하다면 하셔도 괜찮아요.”
발레리는 내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께서 보장한다면 굳이 연주회가 아니라도 꼭 한 번 듣고 싶네요.”
난 말없이 주스를 홀짝였다. 그녀가 발레리를 실망시킬 일은 절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