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7화
발레리 르포비치와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온 난 곧장 아버지를 찾아갔다.
메세나 협회에서 온 분과 만났다고 말씀을 드리고 관련된 서류들을 보여 드렸더니 아버지는 그 모든 서류들을 꼼꼼하게 보고, 내가 느낀 기분 등에 대해서도 물어보셨다. 난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언젠가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사업가의 입장에서 보신다면 내 말이 그리 탐탁지 않게 들리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윽고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씀하셨다.
“네가 원하는 일이었다면, 그 바람에 따르거라.”
그리곤 만년필을 꺼내 서류에 있는 보호자란에 서명을 해서 내게 돌려주셨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하지만 이 허락이 나오기까지 아버지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게 그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난 아버지의 서명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이에요.”
“……고맙구나.”
아버지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내가 의무가 아닌 진심으로 이런 일을 원한다는 걸 이젠 아시기 때문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서류를 확인하고는 내 서명도 끝마쳤다. 후원 연주자라는 특수성에 큰 구속력은 없지만, 난 메세나 협회에 이렇게 관계를 갖게 되었다. 잘 된다면 2주 후엔 연주회에도 나가게 될 테지.
“…….”
그런데 난 여기에 관계없는 친구의 도움도 필요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나서 말하긴 했지만,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진 나도 잘 모르겠다.
정 안 되면 다른 방법으로 보답해 주면 되겠지. 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
아침부터 아나스타샤와 난 거리로 놀러 나왔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는 영화도 보고, 책도 사기 위해서였다.
난 별관의 홈시어터를 이용해서 영화를 종종 보기도 하지만, 남겨진 기억에 관계없이 고루한 취향은 어디 가질 않는지 고전 영화들을 주로 보는 편이었다. 책 역시 고전이 대부분이었고. 미하일 선생님의 추천도 별다를 게 없어서 난 고전들을 주로 탐독했다.
그에 비해 아나스타샤의 취향은 상당히 세련된 편이다. 난 그녀의 추천을 받아 요즘 유행한다는 소설을 샀다. 기대해도 될 것 같다.
그 뒤엔 고양이 카페에 잠시 들러 차와 디저트를 즐겼다.
아나스타샤는 커다랗고 하얀 고양이를 끌어안더니 이게 고양이인지 돼지인지 모르겠다며 좋아했다. 토실토실한 게 좋은 걸까……? 나로선 잘 이해가 안 가는 취향인데 솔직히 귀엽긴 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해 달라는 대로 고양이와 노는 모습 등을 사진으로 찍어 주다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
“응?”
고양이를 내려놓고 찻잔을 든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난 일단 용건을 곧바로 꺼내기 전에 조심스레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앞으로 2주 정도 스케줄 어떤가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왜? 딱히 없는데.”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스케줄 없냐고 묻는 내 저의가 뭔지 한 번 파악해 보겠다는 눈빛이다.
분석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추리를 말했다.
“바람 쐬러 가고 싶어졌니?”
“바람은 지금도 쐬고 있잖아요?”
“모스크바 바람 말고 다른 곳 바람이 필요할 때도 있잖아.”
아나스타샤는 본래 혼자서도 이곳저곳 잘 놀러 다니는 성격이라서 바람의 종류도 구별하는 것 같다.
난 그녀의 말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행은 아니고…… 제가 2주 정도 후에 연주회를 하게 될 것 같아요.”
“……무슨 말이야? 없다고 했었잖아?”
아나스타샤가 쿠키를 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 황당하다는 눈초리였다.
난 독주회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그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설명을 시작했을 땐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메세나 협회의 요청에 따르기로 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행사가 있기에 맡아 보겠다고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눈가를 문질렀다. 왜 갑자기 그녀가 피곤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결정한 일이니 관계없다. 하지만 아버지나 오빠가 날 걱정스러워하는 것처럼, 아나스타샤의 이런 태도에 난 가슴이 뜨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으이구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도 곧바로 자신의 기분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말한 시점부터 그녀는 조금 더 신중하게 날 대하곤 했다. 예전엔 조금 애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은 되도록 그런 투로 대하지 않으려 신경 쓰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신중하게 신경 쓴다는 게 조심스럽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삐딱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너 독주회 끝난 지 얼마 안 지났어.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스케줄을 잡았니?”
“그새를 못 참다니요…….”
“이르잖아.”
아나스타샤는 날 무슨 연주회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사람처럼 말하면서 찻잔을 들이켰다.
솔직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프로 연주자들이 한 달에도 몇 번이나 스케줄을 잡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많이 쉰 편이다.
물론 앞으로 2주일 안에 독주회가 아닌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해야 할 연주회 프로그램을 제대로 소화해 내려면 굉장히 바빠질 건 분명하다. 그래도 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다음 학기엔 아무 스케줄 없이 콩쿠르 연습만 할 예정이고…… 무언가 활동을 하려면 지금뿐이었어요.”
아나스타샤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안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봐야 소용없겠지?”
“하고 싶었어요.”
“그래, 그래.”
언제나 그렇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그리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을 내린다면 거기에 반대하지 않고 도와줄 생각을 먼저 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대충 상황은 알았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티스푼을 까딱까딱하며 물었다.
“그런데 내 스케줄은 왜 물어본 거야?”
“피아노 연주자가 더 필요하다고 하네요. 혹시 괜찮다면 함께하지 않으시겠어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참 염치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몇 명 안 되니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멈추더니, 내게 반대로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뭐래?”
“……?”
그의 의사는 잘 모르겠다. 난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지 않았어요.”
“왜?”
“그야…….”
어제 결정을 내렸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들 중 에르네스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요 며칠 제대로 연락도 되지 않았다. 또 곡을 쓰는 데에 집중하는가 싶어서 난 2주 후에 있을 연주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거절한다면 아마 다음으로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에게 이야기해 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 아나스타샤 앞에서 그녀가 거절한 다음의 이야기를 하는 건 실례였다. 차라리 혼자서 어떻게든 한다면 모를까.
난 이유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하고 싶어서요.”
“아하하하, 그게 이유야?”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가 너무 바보같이 들렸나? 하지만 그녀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 좋아.”
“정말인가요?”
“응. 나도 혼자서 계속 피아노 연습만 하고 있었는데…… 실전이라니 환영이지.”
아나스타샤는 마침 잘되었다는 투로 말하며 테이블을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근질거린다는 모습이었다.
실전이 필요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날 위해서 일부러 흔쾌히 승낙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고양이를 들고 쓰다듬는 그녀에게 난 감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워요.”
“나야말로 고맙지. 연주회 한 번 여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아나스타샤는 손을 설레설레 젓고는, 고양이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면서 말했다.
“보자, 메세나 협회라 했으니 자선 연주회일 테고…… 그래도 이 정도면 아무나 좋다고 해 주진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면접 같은 건 안 봐도 돼?”
“저기, 협회의 매니저가 아나스타샤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
허락을 미리 구하지 않고 발레리에게 말해 놓은 것에 대해 그녀는 별생각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놓고 날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면접에서 떨어지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네?”
“…….”
난 그녀에게 어떤 보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예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
아나스타샤가 함께해 주겠다고 말했다는 걸 발레리에게 전화로 전했고, 그는 그대로 다른 연주자를 또 한 명 구했다고 답했다. 나이는 스물두 살. 이름은 익히 들어 본 바 있었다. 이미 세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연주자였다.
- 내일 즈음 괜찮으시다면 미팅을 한 번 잡도록 하죠.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도 해야 하고. 어떻습니까?
다른 연주자와 미팅할 시간을 굳이 늘릴 필요는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메시지를 보내 보니 아나스타샤는 당장 오늘이라도 괜찮다며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발레리가 일처리가 빠른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미적거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루가 지나 약속 당일.
난 아침 연습을 조금 더 테크니컬한 쪽으로 집중시켰다. 평소 같았으면 기본기를 다루는 에튀드나 바흐를 연습했겠지만, 오늘은 혹시 아나스타샤에 이어 나도 다시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할지도 모르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짧고 화려한 곡들을 몇 가지 준비해서 정리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시간에 맞춰 나갈 채비를 했다.
옷은 어두운 린넨 투피스를 입었다. 처음 보는 연주자와 인사해야 하는 자리였다. 너무 편한 복장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적당히 격식을 갖추며 준비했다.
“같이 가 줄까?”
나갈 준비를 하는 날 보며 루슬란 오빠가 물었다.
예전에도 이런 자리에 오빠가 함께 했던 적은 몇 번 있었다. 이번에도 걱정이 되어서 이런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나스타샤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래? 그럼 괜찮겠지.”
아나스타샤라면 무조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루슬란 오빠는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잠깐만…… 그 애는 왜?”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연주회 미팅 자리에 같이 갈 이유는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없었다. 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제가 같이 해 달라 부탁했거든요.”
“저번 자선 연주회 때도 네가 부탁했었지?”
“……그랬었죠.”
오빠는 다른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보답은 내가 알아서 하리라는 걸 안 모습이다. 대신 짧은 인사가 있었다.
“잘 갔다 와.”
“예. 잘하고 올게요.”
그렇게 난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소로킨과 빅토르가 날 경호했다. 난 소로킨에게 부탁해서 아나스타샤의 집에 잠시 들렀다.
막 도착해서 전화로 그녀를 부르려 하는데, 이미 아나스타샤는 밖에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보단 약간 캐주얼한 차림을 한 그녀가 손을 살랑 흔들었다.
차가 앞에 섰다. 아나스타샤는 차에 타면서 인사했다.
“안녕. 날씨 정말 좋다.”
소로킨과 빅토르도 아나스타샤를 반겼다. 모두 자주 봐 온지라 살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옆에 가까이 앉았다. 그러더니 팔소매를 건드리며 물었다.
“이거 저번에 같이 샀던 그거니?”
“예. 슬슬 입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렇네, 정말 잘 어울린다.”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번엔 발레리와 약속을 해 놓은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본사를 향해서였다.
난 오늘 아나스타샤가 별문제 없이 심사를 통과하기를, 그리고 새로 만나게 될 연주자와 친해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