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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28화 (528/1,277)

##  528화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비즈니스 건물 앞에 섰다. 수십 층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이 전체가 메세나 협회의 본사라 한다. 상당한 규모였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들어서니 바로 신분 확인이 필요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건물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와 일행 한 분…… 아, 여기 있군요.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경비원으로부터 확인을 받고 안내데스크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보았다. 데스크 직원도 내 이름을 찾아보더니 약속이 되어 있는 층수와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난 아나스타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층수가 표시되는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은 크게 긴장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취직 등을 위해 면접을 보러 온 건 아니니 마음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 역시 그녀를 소개하는 입장에서 편할 수만은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그녀가 돌아본다.

아나스타샤가 옅은 미소를 지었고, 나 역시 따라 웃었다. 맴도는 긴장을 내쫓기 위한 말을 억지로 자아낼 필요는 없었다. 잠시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널찍한 복도. 그리고 회의실로 추정되는 방들이 보였다. 그중 몇 개는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복도를 따라 사무실을 찾아갔다. 복도 끝에 위치해 있었다.

이제야 느끼는 건데 발레리는 이 협회에서 생각보다 높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살며시 노크하니 답변이 돌아왔다.

“들어오십시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은 슈트 차림의 커다란 남자가 내 얼굴을 보더니 안경을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발레리.”

우리는 가볍게 인사하며 서로를 마주했다.

발레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는 얼굴로 날 대했다. 그는 밖이든 자신의 사무실이든 태도에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까?”

“괜찮았어요.”

“하하, 다행입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구분…… 아니, 타티아나가 소개해 주실 두 번째 연주자분이십니까?”

“예. 처음 뵙겠습니다.”

조용히 있던 아나스타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너무 긴장하지도, 들뜨지도 않은 진중하고 담백한 어조였다.

발레리의 눈 끝이 꿈틀거렸다. 아나스타샤에 대해 파악하는 눈빛은 정말 한순간이었지만 그는 어떤 태도를 해야 할지 바로 정한 모습이다. 그가 정중히 답했다.

“반갑습니다. 발레리 르포비치 타라소프입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라고 해요. 타티아나의 권유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짧게 자신을 소개한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연주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난 약간 놀랐다.

평소 아나스타샤 같았으면 가볍게 분위기를 풀어내고 흐름을 가지고 오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천성적인 카리스마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대화에 굉장히 능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리하지 않고 말을 아낀다. 의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목적에서 엇나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연주회만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듯 진지한 모습으로 임했다.

발레리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첫인상 파악은 다 끝났다는 듯 옆으로 손짓했다.

“우선 편하게 앉으시죠. 차 드시겠습니까?”

차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자 발레리가 곧 찻잔을 세 잔 내왔다. 우리는 동시에 찻잔을 들었다. 찻물이 넘어가고, 첫 숨에 차의 향기가 섞여 나온다. 아나스타샤가 손끝으로 목을 만지며 말했다.

“베질루르인가요? 향이 좋네요.”

“정확합니다. 이걸 맞추실 줄이야. 대단하시군요.”

“몇몇 종류만 알아볼 뿐이에요.”

베질루르는 스리랑카의 홍차 브랜드 중 하나로 실론티, 즉 스리랑카산 차를 주력으로 한다. 아나스타샤가 종종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신기했다. 자주 마신다곤 하지만 저렇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나? 난 향들의 특색이 확실한 허브티들도 간신히 구별할 뿐, 브랜드 같은 건 전혀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미각에 있어선 나보다 훨씬 나은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차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로네펠트, 리스톤 등등 브랜드명들이 오간다. 난 홍차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세 번 정도 찻잔이 기울어졌을 무렵, 발레리가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전 타티아나의 실력을 굉장히 신뢰합니다. 때문에 타티아나가 신뢰하는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죠.”

아나스타샤에 대한 이야기였다.

차에 대해 잘 안다는 건 연주자로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발레리는 오늘 처음 본 아나스타샤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내겐 그녀에 대한 보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실력은 믿어 주셔도 좋아요. 아나스타샤는 지난 3월 말에 미국에서 열린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했었어요. 대상을 받았죠.”

“오.”

콩쿠르 수상이력 같은 건 스스로 말하기보단 옆에서 말해 주는 게 낫다.

그런데 발레리의 반응은 생각보다 그리 뜨겁지 않았다. 그는 짧게 감탄사를 냈을 뿐이었다.

난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친구 자랑이 너무 약했나? 조금 더 강하게 해야 하는 거야? 물론, 아나스타샤의 자랑을 하자면 오늘 밤을 새도 모자랐다.

하지만 어쩌면 옆에 있는 내가 입을 여는 건 괜한 역효과를 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레리가 보기엔 그녀나 나나 학생 연주자니까. 청소년 콩쿠르 우승 이력을 가지고 잘난 척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갑자기 온갖 의심과 걱정이 다 들어서 입을 다물고 발레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일이었죠. 지구 반대편에서 거둔 쾌거가 이곳까지 들려왔으니 말입니다.”

“……?”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잠시 후에야 난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발레리는 아나스타샤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조사가 끝난 뒤였다.

전화로 이름을 말해 줬을 때부터 그가 조사에 들어갔을 거란 걸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는 건 나뿐이었던 것 같다.

난 창피해져서 찻잔을 입술에 붙이다시피 했고, 발레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치며 말했다.

“처음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의 이름을 듣고는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아서 조금 찾아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콩쿠르에서 우승한 뉴스가 있더군요. 훌륭합니다.”

발레리가 뒤늦게나마 축하한다는 듯 말했다.

국제 청소년 콩쿠르 우승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또래에선 최상위권의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서류심사 정도는 통과한 것이다.

물론 심사는 계속된다. 발레리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은근한 어투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 그 자리에서 직접 보지 못해서 말입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한 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화려한 과거의 이력도 연주자의 현 실력을 완벽하게 증명하진 못한다.

공기에 풀어놓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휘발성을 아쉽게 여기지 않는다. 과거의 작품을 가지고 와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받은 그 자리에서 생생한 실력을 보일 수 있음은 늘 새로운 지평을 향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아나스타샤는 발레리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가능하죠.”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좋아요. 갑시다.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발레리는 찻잔을 한 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나와 아나스타샤의 앞에 놓인 찻잔이 여전히 반절 정도 차 있는 걸 보고는 머쓱해하며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키득거렸다.

“그냥 바로 갈까요?”

“아뇨, 천천히 드시죠.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바로 드셨잖아요?”

“덕분에 입천장이 데인 것 같습니다.”

실없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발레리는 잠시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 업무를 봤다.

난 차를 마시며 아나스타샤와 작게 소곤거렸다.

“저기, 아나스타샤.”

“응?”

“어떤 곡을 연주하실 건가요?”

차분하게 있던 아나스타샤는 돌연 능글맞은 표정을 띠며 대답했다.

“글쎄, 저분이 바라시는 곡이 있지 않을까?”

“가장 자신 있는 곡을 연주하라 하시지 않겠어요?”

“어떤 곡이 좋을까?”

“고민하실 것이 있나요? 알캉을 연주해 주세요.”

연주자의 실력이란 기교뿐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드러나는 법이지만, 짧은 시간 내에 강렬하게 실력을 증명하는 데엔 고도의 테크닉을 보여 주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다.

그 방법으로는 어려운 패시지를 몇 개 연주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곡들을 보다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방법 등이 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클래식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따져도 최상위 난이도에 속하는 알캉의 곡들을 몇 곡이나 레퍼토리에 넣고 있다. 일부러 어렵게 하거나 빠르게 할 필요도 없이 그걸 한 곡만 보여 줘도 발레리의 심사엔 통과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더니 거절했다.

“싫어.”

“알캉은 준비되지 않았나요?”

“아니, 지금도 할 수 있지. 그런데 당분간은 조금 아끼려고.”

“아끼신다고요?”

“응. 저 아저씨도 비슷한 생각 하고 있을 것 같거든.”

그 말을 듣고서야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발레리는 아나스타샤에 대한 조사를 어느 정도 마쳤다. 그렇다면 최근에 우승한 포트워스 콩쿠르에서 마지막으로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또한 이미 알 것이다.

발레리는 이미 알캉을 원하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순순히 보여 줄 생각이 없었고.

이미 두 음악가 간엔 은밀한 밀고 당기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만 그 가운데에서 순진하게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아나스타샤가 다른 곡을 연주한다면 어떤 곡이 좋을까. 그녀가 보여 줬었던 브람스 소나타는 정말 좋았다. 아니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도 괜찮을 것 같다. 4번 아니면 10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려. 타티아나.”

“……예?”

“리스트 아니면 브람스지?”

“!?”

난 기겁해서 찻잔을 덜그럭거렸다. 아나스타샤가 까르르 웃었다.

“어, 어떻게 아셨나요?”

“들린다니까?”

“저 그렇게 읽기 쉽나요?”

“조금?”

이미 우린 서로의 레퍼토리를 알 만큼 알고 성향 또한 잘 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어떤 곡을 꺼낼지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뭔가 억울하다.

괜히 시선을 돌리고 있자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상당히 기대해 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재미있는 거 보여 줄게. 타티아나.”

재미있는 것이란 말에 귀가 절로 반응했다.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부러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재미가 없어도 되니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 마.”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그렇듯 본분을 잊지 않는다. 난 그녀가 무엇을 보여 줄지 기대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발레리가 한 번에 뜨거운 차를 들이켰던 마음이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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