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29화 (529/1,277)

##  529화

스튜디오는 바로 아래층이었다.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선 음원녹음이나 영상녹화, 방송 또한 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자신들이 하는 다양한 사업들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요즘은 미술계에서도 음악가들을 원하는 일이 많습니다. 작품에 음악이 필요하단 것이죠.”

“저번에 프랑스에서 그런 현대예술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요즘은 흔하죠. 최근의 현대예술들은 종합예술에 가깝기도 하고…… 앞으로도 점점 그렇게 될 겁니다. 저희 협회는 그렇게 각각 다른 세계에 있는 예술가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 또한 맡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단순히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아서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발레리는 개인화되는 예술가들을 단체와 연결시키고 상승효과를 이끌어내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런 일이야말로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정말 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예술가들과 달리 이 사람들은 넓은 부분을 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이곳입니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우리는 방음처리가 된 방과 녹음장비들,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프로듀서나 엔지니어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미리 이야기는 해 두었으니 저 피아노를 사용하면 됩니다.”

발레리는 이곳을 그냥 연습실처럼 쓸 모양이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난 발레리와 함께 의자에 앉았고,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원하시는 곡이라도?”

“어떤 곡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낭만 시대의 곡이면 좋겠군요.”

발레리는 편하게 하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은근히 알캉을 바라는 것 같은 어투가 느껴졌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그대로였다.

아나스타샤는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하고는 상체를 흔들거렸다.

“낭만이라…… 그럼 기본적인 것을 보여 드리는 게 좋겠죠?”

“기본?”

“예.”

“쇼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보다 조금 더 이전이요.”

아나스타샤의 퀴즈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동안 배웠던 음악사가 스쳐 지나간다.

쇼팽보다 이전의 초기 낭만파 작곡가가 누가 있지? 멘델스존? 더 이전으로 가면 베토벤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베토벤은 엄연히 고전주의 작곡가이고, 약간 억지를 쓴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아나스타샤가 베토벤을 연주할 것 같진 않았다.

옆을 보니 발레리 역시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나올지 예상조차 못하는 것 같다.

잠시 기다려 준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를테면…… 이런 곡이요.”

그리고 누가 말할 새도 없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스튜디오를 울렸다. 오른손이 순식간에 3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사이 왼손은 통통 뛰논다.

연주를 들으면서 난 빠르게 곡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조성은 내림라장조. 아르페지오 연습곡이 분명하다. 쇼팽은 절대 아니고…….

그렇게 한참이나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기억이 아닌 더 이전의 기억에서 이 곡의 이름을 찾아냈다.

“……!”

카를 체르니의 연습곡집 op.299. 그중 39번째 연습곡.

흔히 체르니 40번 등의 약칭으로 부르는 연습곡집에 속한 곡이었다.

난 체르니의 연습곡으로 연습을 하지 않고 빠르게 바르톡이나 쇼팽으로 테크닉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이 곡은 쳐 본 적이 없었다. 기초적인 상식으로 알 뿐이다.

카를 체르니. 19세기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베토벤의 제자로 교육을 받았지만 연주자보다는 음악교사로 더 유명했었던 음악가이다.

때문에 수백 곡이 넘는 연습곡들을 썼고, 그 연습곡들을 난이도와 종류에 따라 카테고리화해서 각각 100, 30, 40, 50, 60곡으로 묶어 놓았다.

그중 40곡이 모여 있는 op.299 연습곡집은 피아노의 세계에 발끝이 아니라 무릎 정도까진 담글 수 있는 사람들이 연습하는 곡이다. 세상에서 체르니에게 향하는 평가엔 그런 인식이 지배적인 면이 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을 내보일 때 쓸 만한 곡은 아니다.

그런데 약간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는 체르니라는 작곡가에 대한 생각이, 이 연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 곡이 제대로 연주하면 이렇게 빠르고 어려운 곡이었던가?

“와우.”

발레리가 탄성을 토했다.

본래 알캉을 기대하던 그에게 체르니를 보여 주었으나, 그는 알캉 못지않게 이 곡에 심취해 있었다.

체르니 연습곡집 op.299의 제목은 속도의 학습the school of velocity. 그 제목에 걸맞게 끊이지 않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오른손이 움직였다. 마치 춤추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본 멜로디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나간다.

왼손으로 이루어지는 멜로디는 통통 튀는 박자와 길게 이어지는 레가토가 복합적으로 구성되면서 곡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페달의 사용은 오른손도 함께 늘어지게 만들어 버리니 오로지 손가락으로만 표현해야 하는 멜로디였다.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체르니의 연습곡은 결코 중급자를 위한 곡 같은 게 아니었다. 아르페지오에 능숙해야 하고 템포에 대한 감각도 확실하면서 낭만주의적 화법도 가능해야 한다.

이 굉장한 연습곡을 들으면서, 난 체르니가 베토벤의 제자이자 리스트의 스승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낭만주의의 화신 리스트가 체르니를 사사했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만도 하지만, 리스트는 체르니를 굉장히 존경하여 자신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전부 체르니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리스트가 그리한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나스타샤는 그 이유를 여실히 드러냈다.

“…….”

맑고 명랑하지만 동시에 화려하고 압도적이다.

곡 자체가 난해하다고 할 순 없었다. 짧은 연습곡엔 그리 무거운 주제가 실리지 않는다. 그저 가볍고 경쾌한 흐름을 기본 테크닉에 따라 연주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가벼움은 정확한 구조를 가지고 모여야만 비로소 곡의 형태를 갖출 수 있다. 가벼운 까닭에 약간의 실수에도 쉽게 흩어져 버린다.

때문에 정말 정교한 실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기초적인 테크닉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요구한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 내는 건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연주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템포의 흔들림 없이 옥타브 5개를 오르는 아르페지오는 쇼팽의 연습곡 op.10의 1번에서 보이는 드넓은 아르페지오와 그 너비가 거의 같았다.

곡은 서서히 형태를 변화시켜 가면서 환상적으로 휘몰아치고, 왼손은 질세라 오른손을 넘나들며 도약하기 시작했다. 두 손이 교차하면서도 끊임없이 건반을 연주한다.

아나스타샤는 쇼팽도 굉장히 잘 연주하지만, 이 곡은 거의 날개가 달린 것처럼 연주했다.

“…….”

재미있는 걸 보여 주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상상도 못한 체르니라는 선곡은 물론이고 연주 자체에서도 난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알캉이라면 압도감을 느꼈겠지만 이러한 재미를 느끼진 못했을 것 같다.

난 그녀가 보내는 음표들을 머릿속으로 모두 받아 적으면서 기쁘게 감상했다.

경쾌하게 연주하던 아나스타샤는 화법을 조금 바꾸어 사랑스럽게 피날레를 연주한다. 짧은 트레몰로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며 귀엽게 발을 동동거리다가, 마지막으로 두 번 아르페지오를 선보이고는 늠름하게 끝맺어졌다.

아나스타샤는 끝까지 건반을 꾹 찍어 누르며 잔향을 정리한다. 마무리까지 훌륭했다.

“브라바, 완벽하군요.”

발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짧게 박수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사뿐히 일어나 인사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무슨 곡인지 떠올리지 못하다가 중간에 이르러서야 기억해 냈습니다. 설마 체르니입니까?”

우리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클래식 음악계에 몸을 담고 있던 발레리도 설마 갑자기 체르니가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에요.”

“하하하, 맙소사. 체르니를 이 정도로 강렬하게 연주할 줄이야.”

유쾌한 당황이 그의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보일 수 있는 곡은 정말 많았다. 발레리가 아무 곡이나 괜찮다고 했으니 강렬하고 과시적인 곡들로 마음껏 실력을 보여도 좋았을 테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괜한 과시 등을 보이지 않고 깔끔한 실력을 펼쳐서 발레리의 시험을 통과해 냈다.

알캉이나 리스트 혹은 브람스보다 이 체르니 연습곡은 훨씬 더 또렷하게 발레리에게 각인되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크게 배워 가는군요.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기본이었을 뿐인데요.”

“하하하. 야구 선수가 배트로 공을 치고, 농구 선수가 공을 넣는 게 기본이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요?”

“그야 그렇죠.”

기본이라는 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 하더라도 완벽한 기본기를 보일 수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완벽에 가까워질 순 있다. 아나스타샤가 보여 준 기본은 그녀의 다른 연주를 보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상 깊고 화려했다.

그녀는 만족감이 어린 얼굴로 피아노 건반 덮개를 덮었다. 체르니에 이어 다른 곡을 더 연주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땠어?”

칭찬을 바라는 표정.

난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탄을 전했다.

“재미도 있고 실력도 최고였어요. 아나스타샤.”

“아하하, 정말?”

“정말이고말고요. 체르니는 언제 그렇게 연습하신 건가요?”

“어릴 때 잠깐 했던 건데 요즘 기초부터 다시 해 보잔 생각으로 하다 보니 생각보다 꽤 어렵더라고. 그래서 연습 좀 해 봤지.”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으며 요 근래 연습하는 곡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체르니와 바흐, 베토벤 등 클래식 음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작곡가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캉도 연주하는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이렇게 초심으로 되돌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베버나 바르톡의 곡들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음…… 바르톡은 연주해 본 적이 없어. 어떤 곡이 좋을까?”

난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작곡가와 곡들을 추천해 주었고, 그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발레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두 분을 보니 연주회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아나스타샤에게 만족한 발레리가 연주회 구성을 상상하는 게 눈에 선했다. 기대가 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는 씨익 웃더니 문 쪽으로 손을 펼쳤다.

“실력은 확실히 보았고…… 그럼 이만 다시 사무실로 올라갈까요. 연주회 세부 프로그램 등에 대해 의논을 시작하도록 하죠.”

“오늘 안에 끝낼 건가요?”

“늦을 이유는 없겠죠. 빨리 결정이 날수록 준비할 여유가 생길 테니, 되도록 빠르게 하는 쪽으로 하려 합니다.”

“그거 좋네요.”

아나스타샤도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연주자들이 연주회 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오랜 시간과 토의가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이 잘 맞는다면 빠르게 끝낼 수도 있다.

난 아나스타샤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음악적 리소스들이 많기 때문에 말로 길게 토론할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세 번째 연주자에게 달려 있었다. 아마 오늘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결정을 내리게 될 것 같다.

“가 볼까요.”

우리는 다시 발레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발레리가 문을 열자마자, 이전엔 없었던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두 사람이에요?”

나이는 20대 초반. 갈색 머리칼이 곱슬거리는 남자는 우릴 보고는 발레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그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음을, 바로 세 번째 연주자임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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