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30화 (530/1,277)

##  530화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슥 쓸어 올리고는 소파 등받이를 퉁퉁 쳤다.

“픽업해 오는 길이에요? 늦으셨네.”

세 명이 동시에 들어오니 발레리가 우릴 데리고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발레리가 고개를 저었다.

“늦은 게 아니라 한참 전에 차도 마셨고, 지금은 피아노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렌스키.”

“피아노? 아, 실력 테스트 하셨나 보네. 두 친구 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답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라 부르니 조금 어색하다. 아무래도 친화력이 좋아 보이는 그가 분위기를 앞서서 리드하려는 것 같지만…… 나도 아나스타샤도 사실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이 아닌지라 이런 접근이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러쿵저러쿵할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리 생각하는지 손을 슬쩍 들며 나섰다.

“테스트는 저만요.”

남자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무슨 곡 쳤는데요?”

“체르니 연…….”

“체르니?”

그런데 대답을 미처 다 듣기도 전에 말을 자르더니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거 굉장히 무례한 거 아닌가?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나서도 아나스타샤가 체르니 연습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 보였다.

“와.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뭐가요?”

“그렇잖아요? 못해도 쇼팽…… 무리 좀 한다면 라흐마니노프 정도를 칠 생각 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재미있으시네. 체르니라니.”

재미는 있었지. 나 역시 아나스타샤의 센스에 감탄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재미있다는 의미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아나스타샤가 아무것도 모르고 상황판단을 그르친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비웃는 것조차 아니다. 그냥 열여섯 살이라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투였다.

“그런 것도 잘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하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생각이 없다는 건가?

선곡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연주자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가만히 듣고 있는 아나스타샤보다 내가 더 화가 나서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괜히 처음 만나자마자 삐걱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 발레리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렌스키. 체르니 연습곡도 충분히…….”

“아,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요. 이건 연습실 구석에서 하는 실기시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장의 이야기예요. 현장의 이야기.”

“…….”

심지어 렌스키는 직접 심사를 본 발레리의 이야기도 잔소리로 치부했다. 발레리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지만 렌스키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체르니라는 작곡가의 이름을 들은 것 하나만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는 표정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쨌든 대충 알겠네요.”

대체 뭘요?

가슴이 답답했다. 아나스타샤가 무시당하고 있다. 내가 무시당하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신경이 쓰이고 짜증이 났다.

그냥 당장 저 사람을 끌고 연습실로 가야 하나? 하지만 체르니 선곡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가 끝까지 주장한다면 결국 그걸 뒤엎을 순 없었다.

그의 말대로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는 현장의 상황이란 그 한순간에만 주어지기 마련이고, 아나스타샤가 알캉이나 리스트의 연습곡 같은 인지도가 높은 곡이 아닌 체르니를 선택한 그 순간의 이유들은, 나중에 설명해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

난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일종의 현장의 한 부분이다.

언제 어디서든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동안 좋은 분들만 많이 만나서 잊고 있었을 뿐, 유별난 성격의 연주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로 사사건건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면 이 세계에 오래 있지 못한다.

푸른 하늘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변하거나 하진 않는다. 분명 언젠가 지금 한 발언들을 후회하고 사과할 때가 오겠지……. 물론 사과 같은 걸 절대 안 하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난 이미 세 번째 연주자에 대한 기대 등을 조금 내려놓았다.

성격이 이상해도 좋다. 연주만 잘 해 준다면. 그럼 괜찮아.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갑자기 자기소개를 했다.

“아, 전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입니다. 둘 다 처음 뵙고,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리고 연주회는 걱정할 것 없어요. 저만 따라오면 되니까.”

여러 연주자가 모이면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난 거기에 질 생각이 없고.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 어디까지 갈 셈인지 손 놓고 좀 보고 싶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살짝 아나스타샤를 보니 그녀는 무시당한 것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그녀가 지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체르니 친구는 이름이?”

“아나스타샤예요.”

“그 옆엔?”

아나스타샤도 풀네임을 말하지 않고 짧게 답했으니 나도 길게 말할 것 없었다.

“타티아나라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두 사람 다. 앞으로 몇 주 잘해 보죠 우리.”

일단 렌스키는 주도를 하고 싶을 뿐, 연주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진 않았다. 난 그 한 가지만 믿고 자리에 앉았다.

발레리가 차를 준비해 주었고, 우리 네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았다. 렌스키는 스마트폰을 잠시 보더니 지갑과 차 키 등과 함께 테이블 구석에 밀어놓았다.

그리고 서로를 알기 위한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사사로운 질답 등이 오간다.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해야 할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가끔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렌스키는 자신이 어떻게 섭외되었고, 협회와는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했다.

“한 15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 나네. 어쨌든 그 정도 카즈호프 인터내셔널의 후원 연주자로 있죠. 계속 유럽 쪽만 돌고 있네요.”

“전 며칠 전에 이 협회를 알게 되었어요.”

“오…… 그래요? 혹시 회사 이름 말해 줄 수 있어요?”

아나스타샤는 이번에만 특별히 섭외된 것이라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난 이미 관계자였다. 후원하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이렇게 궁금해할 일인가 싶다. 난 짤막하게 대답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이에요.”

“베르체노프?”

그는 살짝 놀라워했다. 그리고 난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일부러 감추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드러낼 것도 없잖은가?

렌스키는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잠깐만…… 그 베르체노프인가?”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언제부터지?”

나에게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혼자 생각하며 내뱉는 말이다. 그는 베르체노프가 후원하는 연주자가 있다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급히 고개를 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제가 주로 활동을 외국에서 하다 보니까 반대로 국내 사정엔 어두워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국내에도 날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난 기업에서 하는 행사 등에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이제 1년을 넘겼을 뿐이다. 내가 별명 등을 무거워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정말 내 경력이 너무 일천하기 때문이다.

내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렌스키는 빠르게 덧붙였다.

“대신 국외 사정엔 밝기도 하죠. 얼마 전엔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대부분 성격이 이상한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난 이미 렌스키도 이상한 쪽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듣는 입장이 묘했다.

“신기한 이야기가 많죠?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타티아나도 겪을 수 있는 일들이에요. 아니, 베르체노프의 후원을 받는다면 거의 국내에서만 활동하려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 대형 기업 집단이 지금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가 뭐겠…… 왜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이에요?”

아버지는 내게 국내에서만 활동하라는 등의 조건을 건 적이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셨을 뿐이다.

난 웃김 반 황당함 반의 기분으로 렌스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또 무언가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려서 이런 이야기는 이른가? 그래도 일찍부터 알아두는 게 중요한데.”

미치겠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넘겨짚는 건 정말 기가 막히지만 의도가 나쁜 것 같진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조금이라도 앞서 있는 연주자 선배로서 해 주고 싶은 조언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걸 들어 준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일은 없다.

그래도 카즈호프 인터내셔널이란 대형 그룹의 후원 연주자이고, 해외에서 연주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하니 실력은 확실하겠지.

마음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던 아나스타샤가 삐딱하게 이야기했다.

“저기요, 그래서 연주회는요? 이 연주회를 잘 해야 카즈호프 인터내셔널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뭐…… 이 정도 규모면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렌스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슬슬 주제를 본론으로 돌릴 때였다. 그는 차로 목을 축이고는 말했다.

“그럼 연주회 이야기나 시작해 볼까요. 일시는 결정되었다고 했고…… 기간이 짧네요. 2주면 테마를 맞추긴 어렵겠네.”

그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날짜를 계산하더니, 우리를 슥 바라보았다.

“일단 레퍼토리들이 어떻게 돼요? 9학년이면 어디까지 하지?”

경험이 많은 건 확실한지 척척 주도한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일단 따라 주기로 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레퍼토리를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체르니부터 시작해서 쇼팽, 슈만,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 그녀의 레퍼토리는 굉장히 넓은 편이다.

그런데 렌스키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알캉에 이르러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알캉? 하하하, 안 돼요. 안 돼. 아나스타샤는 정말 큰일 나겠네요.”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큰일이 나요?”

“알캉은 어설프게 연주하면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아나스타샤도 스스로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발레리 앞에선 그걸 못 꺼내고 체르니를 쳤을 테고. 안 그래요?”

실력도 안 되는데 기교만 내세워서 알캉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는 투였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리 확신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번엔 발레리가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끼어들었다.

“아예 지금 보여 주실…….”

“아뇨, 렌스키 로마노비치의 말이 옳아요.”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젠 슬슬 즐기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렌스키의 모든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고 생각한 렌스키는 진지하게 아나스타샤의 무대 프로그램을 생각해 주었다.

“그렇다고 체르니를 무대에 올리는 건 아니고, 적당히 쇼팽으로 가죠. 아까 몇 곡 치실 줄 안다고 하셨죠?”

“적당히 쇼팽요?”

“부담 가질 거 없어요.”

아나스타샤는 적당히라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 후로도 렌스키는 아나스타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대부분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란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발레리가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렌스키의 시선이 이번엔 내 쪽으로 돌아왔다.

“다음은 타티아나인가? 어때요? 생각나는 곡 있으신가.”

생각나는 곡이라면 수백 가지도 넘는다.

“있어요.”

“무슨 곡인데요?”

“생각 중이에요. 잠시만…….”

“어렵게 생각하시네.”

렌스키는 발레리가 나간 뒤로는 조금 더 늘어진 태도로 손을 휙휙 저었다.

“대충 골라요.”

“예?”

“복잡할 거 뭐 있어요?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자원봉사고…….”

어차피 우리 다 같은 연주자이니 충분히 이해한다는 투였다.

하지만 연주회만큼은 진지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며 렌스키의 모든 말들을 그냥 받아넘기고 있던 난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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