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31화 (531/1,277)

##  531화

솔직히 말하자면 웃겼다.

하지만 그 웃음은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조소가 입가에서 새어 나온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렌스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체르니의 이름을 듣자마자 모든 걸 다 알았다는 듯 굴기 시작했다. 연주자들의 세계에선 연주하는 곡 자체에 기본 점수가 매겨져 있기도 하다. 체르니의 연습곡들은 정말 좋은 곡들이지만 굉장히 저평가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느꼈다.

세 번째 연주자가 올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난곡으로 악명이 높은 알캉을 연주해서 발레리에게 인정을 얻어 냈다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렌스키도 이렇게 함부로 무례하게 굴거나 하진 못했을 테지. 그 점에선 실수가 있었다.

“…….”

때문에 얕잡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나서서 알캉 등으로 렌스키에게 실력을 입증받고 싶진 않았다.

만나자마자 자랑하듯 BMW 차 키를 테이블에 꺼내 놓는 별 볼일 없는 남자에게 대체 뭘 인정받아야 한단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그런 인정은 해 준다고 해도 싫었다.

마음대로 해 봐.

삐딱한 기분이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지금 무언가에 도취된 것 같은 렌스키가 나중에 뭐라고 할지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상황은 마치 계획된 것처럼 흘러갔다.

어떻게 하다 보니 타티아나는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후원하는 연주자로 소개되었고 렌스키는 전혀 의심 않고 그대로 믿었다. 아나스타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맞장구만 쳤다.

그런데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가만히 보고만 있기로 했다 하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었다.

렌스키가 선을 넘었다.

“대충 해요.”

순간 옆에 있던 타티아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꽤 다양한 감정을 보여 주던 타티아나의 인기척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옆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차가운 무언가가 천천히 고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돌아보니 타티아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만 표정이 한없이 싸늘해져 있었다.

‘말실수 자주 하네, 렌스키…….’

오늘 적당히 놀아 주고 다음 미팅 땐 반격을 할 참이었는데, 아나스타샤보다 훨씬 참을성이 강한 타티아나가 벌써부터 폭발해 버릴 줄은 몰랐다.

이전에 렌스키가 적당히 쇼팽을 준비하라 했을 때부터 꿈틀거리긴 했는데, 이번엔 제대로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다.

타티아나는 어지간한 일로는 화는커녕 짜증도 한 번 잘 내지 않는 유한 성격이지만, 정말 화가 났을 땐 아나스타샤도 쉽게 말을 걸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다. 시퍼렇게 날이 선 무언가가 테이블 위에 올라온다.

타티아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어…… 예?”

단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렌스키는 움찔했다.

지금까진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아 주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차갑게 태도를 바꾸자 무언가 잘못했다는 걸 느끼긴 하는 모양이다.

렌스키의 모습을 본 타티아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 와중에도 그녀는 무분별하게 신경질을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는다. 한 번 더 차분히 말할 뿐이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정중한 그녀의 말에 렌스키는 조금 당황해했다. 어디에서 타티아나의 신경을 거슬렀는지 빠르게 분석하는 듯하다.

변명하는 투로 렌스키가 말했다.

“대충이란 건 말이 그렇단 거고 물론 잘 해야죠. 하지만 곡을 고르면서부터 진을 뺄 필요는 없…….”

“선곡이 정말 중요하다는 건 방금 전 본인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 아니었나요?”

“…….”

아나스타샤의 체르니 선곡을 두고 혹평했던 렌스키로선 할 말이 없었다. 이래서 말을 할 땐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아나스타샤는 속이 조금 시원해졌지만, 얼마 못 가 금방 다시 무거워졌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프로그램 회의를 대충 하려 하면서 어떻게 연주회에 최선을 다하겠단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에게 혼나는 상황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풍경이었다. 렌스키는 물론이고 아나스타샤도 침묵하며 타티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티아나를 살피던 렌스키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는 듯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뭘 모르네…….”

가만히 있는 사람도 발끈하게 만들 정도로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계속해서 차가운 눈으로 렌스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젓던 렌스키는 다시 한 번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이제 여기서 그냥 벗어나긴 틀렸다는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리턴이 없는 연주회에 필요 이상으로 애쓸 필요 없어요. 타티아나. 기업과 협회에서 하는 무료 연주회잖아요?”

리턴이 없다. 그 말은 경제적인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연주자들은 이동할 때 드는 비용이나 식비 정도나 충당할,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무대에 선다.

그러나 타티아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 학교에서 하는 자선 연주회에서도 목숨을 걸었어요.”

렌스키는 일견 어이없어했다. 철없는 학생을 보는 눈빛. 아나스타샤는 그 표정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조금 더 짜증이 올라온다. 하지만 렌스키에게도 자신의 논리가 확고하게 있었다.

“그런 것도 좋죠. 저 그런 연주자들 좋아해요. 하지만 실리도 따져야 한다는 거죠.”

그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설명했다.

“해 보면 알 거예요. 티켓값이 없으니 모이는 청중들도 상대적으로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고, 그런 무대에서 어려운 곡을 훌륭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해서 연주해 봐야 이해시키기 어려워요.”

“…….”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하죠. 서로 피곤하지 않게.”

연주자가 하는 말이다 보니 정말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관람하러 갔던 걸 떠올렸다. 총 4시간도 넘는 거대한 오페라는 그 구조나 음악성 등에서 아나스타샤를 자극하는 면도 많았지만, 체력적으로 굉장히 지치게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벼운 연주회가 점점 인기가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

타티아나 역시 별다른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렌스키는 그녀로부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후원 연주자들은 좋은 일 하러 모였으니 친목이나 다지고요. 지금은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것 같은데…… 이런 거 학교에서 하지 않나?”

그는 살살 달래는 투로 조금 험악해진 분위기를 다시 돌려보려 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잘 지내 보잔 투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근본적으로 착각하고 계신 게 있어요.”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근본적인 착각이란 말에 렌스키의 얼굴도 심각해진다.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고민은 이미 선대들께서 고민하고 해결하신 부분들이에요.”

“……?”

잠시 렌스키가 의아해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연주 시간이 수 시간이 넘어가서 집중하기 어려운 장대한 곡들도 존재하죠. 그런 곡들을 무대 위에 올리려면 더더욱 신중해야 할 테고요. 그러나 저희가 연주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곡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음악들이에요.”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사람들이 아는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들은 이미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팝 음악이다. 깊은 예술적 이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을 이루는 평균율이나 화성, 박자 등은 오랜 연구를 거쳐 만들어져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능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기법들을 활용했을 때부터, 이미 아무나 듣고 즐길 수 있도록 고려하여 작곡한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모든 고려를 거쳐 작곡된 곡을 연주했는데 청중들이 괴로워한다면 그건 연주자의 잘못이다. 타티아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렌스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타티아나의 정론에 부딪히면 그가 이전까지 했던 모든 말들은 전부 다 오만하고 불쾌한 말들에 불과했다.

타티아나는 렌스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청중들은 전부 알아요. 설령 어떠한 연주회에 대해 언어로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론 분명한 평가를 내리고 있어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공짜 연주회에 줄 수 있는 점수는 굉장히 후할 겁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점수를 얻으려 무리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요.”

“왜 없나요?”

다시 한 번 렌스키가 반론을 펼치려 했지만 타티아나는 가차 없이 그 반론을 짓밟아 버렸다.

“그분들이 앞으로도 저희 청중이 되어 주실 분들이실 텐데.”

타티아나의 말들은 정론이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음악은 그녀에게 있어 종교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감각 없이 맹종하며 숭배하진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마음속에서 매겨지는 점수는 엄격하고 단호해요. 어떤 무대에서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알아볼 겁니다. 그 점을 항상 두려워하셔야 해요.”

더 두려워하라.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대충 편하게 임하자는 렌스키의 주장에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었다.

“…….”

타티아나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찻잔으로 입술을 적셨다.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 애는 가끔 맹해 보여서 문제지 사실 본색을 드러내면 그 누구라도 흠칫할 만한 카리스마를 보이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분이 너무 좋았다.

렌스키는 한숨을 내쉬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데…… 그 뚜렷한 주관으로 좇는 게 조금 유별나네요. 타티아나.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논리에서 밀리니 다른 부분으로 끌고 가겠다는 건가?

아나스타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타티아나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전 지극히 현실주의자랍니다.”

“그래요?”

“그리고 제 합리는 주어진 연주회를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데에 있죠.”

빠져나갈 생각 말라는 투로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말하니 렌스키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합리적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연주자로서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타티아나 쪽이었다.

괜한 억지를 더 쓰면 이젠 아나스타샤도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렌스키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어 보인다.

“솔직히 전 쉬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딱딱한 정론엔 할 말이 없네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아요, 이번엔 타티아나가 하자는 대로 해 보죠.”

끝까지 사과를 하거나 제대로 수긍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타티아나 역시 연주회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처음엔 조금 삐걱거리긴 했지만 렌스키가 제대로 협조해 준다면 타티아나도 더 이상 차갑게 굴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약간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딱 맞게 발레리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다시 회의를 시작할까요.”

“그래요…… 뭐, 가장 자신 있는 곡들 목록부터 써 보죠. 너무 길면 안 됩니다. 한 사람당 30분에서 40분 정도가 적당할 거예요. 아마 뒤쪽엔…… 발레리, 듀엣 기획도 있다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듀엣도 해야 하니까…….”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렌스키는 빠르게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듀엣? 아나스타샤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고, 아니나 다를까 렌스키는 느닷없이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정말 느닷없었다.

“그래서, 둘 중에 누가 저랑 듀엣하고 싶어요?”

“…….”

“…….”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욕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쓴맛을 한번 보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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