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2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설마하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이 사람 대단하다.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는 무표정이지만 속으로는 질색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늘 정말 많이 참아 주고 있었다.
아무튼, 렌스키의 발언은 분위기를 정말 싸늘하게 만들었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아무 말 않고 바라보고만 있자 렌스키도 어색하긴 한지 괜히 고개를 돌렸다.
“이건 연주회의 보너스 같은 거니까 나중에 정하도록 할까…….”
“그래요.”
대충 무마하게 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지만, 기껏 연주회 관련된 회의를 하던 도중에 분위기를 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발레리가 준 종이에 내가 무대에 올려도 괜찮겠다 생각한 곡들을 몇 곡 올렸다. 그 기준은 적당한 길이에 괜찮은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 곡들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레퍼토리와 완전히 겹치진 않지만 교집합을 가지도록 추려 냈다. 연주회의 전체 흐름에 통일성이나 주제를 만들기 위해선 이러한 복합적인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렌스키도 맞춰야 한다. 연주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이제부터 보고 맞춰 나가면 되겠지. 난 다 적은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렌스키가 종이를 받아 가선 읽어 내리더니 시시각각 표정이 심각해져 갔다. 뭔가 이상한가?
“타티아나…… 이렇게 보니 레퍼토리가 정말 상당하네요. 이걸 다 연주할 수 있다고요? 무대에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냥 날 못 믿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지 않은 게 많긴 하지만, 연주자로서의 실력을 의심받는 건 당할 때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연주회에 올릴 곡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참에 보여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것 또한 협조하는 길이기도 하고.
“그냥 보여 드릴까요?”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고. 어차피 연습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지금 괜찮아요.”
“다음에 미팅할 때 보여 주시죠.”
“…….”
그런데 렌스키는 내가 몇 번이나 제안해도 지금 피아노로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가 적어 낸 레퍼토리를 가만 보니, 연습이 필요한 곡들로 보인다.
렌스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내려가서 내가 바로 연주하고 나면 그에게도 연주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연주자이니만큼 뭘 하든 잘 하겠지만, 만에 하나 준비가 미흡해서 망친다면 오늘 내게 완패하는 일이니 그런 건 싫겠지.
그런 그를 비웃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로 신중한 건 차라리 좋았다. 적어도 연주자로서 날 경계하고 있긴 한 것 같으니까.
난 더 렌스키를 자극하지 않았다.
오늘 결국 참지 못하고 설전을 벌이긴 했지만, 어쨌든간에 첫 만남이지 않나. 좋아야 할 자리라면 적어도 마무리라도 좋게 끝내고 싶었다.
잠자코 있자 렌스키도 빠르게 레퍼토리들을 대조해 가면서 프로그램 기획을 짜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이 자신 있어 하는 시대와 작곡가 등을 추리고 연관점들을 이어 나가는 일을 반복하자 어느 정도 얼개가 잡히기 시작했다.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렌스키와 아나스타샤의 표정 역시 진지했다. 각자 무대에 올릴 곡들의 윤곽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중에서 무엇을 붙잡고 자신의 무기로 삼아야 할지 잘 정해야 한다.
그건 모여 앉아서 할 일은 아니었다. 렌스키는 종이들을 툭툭 쳐서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이쯤하고…… 발레리. 달리 해 주실 말은 없어요?”
“…….”
이 연주회를 총괄하는 발레리는 잠시 우리 세 사람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습니다.”
“됐네요 그럼. 다음 미팅 날짜나 잡고 여기까지 하죠.”
기간이 2주일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날짜는 여유롭게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나와 아나스타샤는 방학이라 시간이 많고, 렌스키도 해외 활동을 하다가 모스크바에 돌아와 잠시 스케줄이 없는 상태라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 같다.
우리는 협의 끝에 3일 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때까진 오늘 이야기한 곡들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면서 각자 준비하고, 다시 만나서 제대로 틀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약속까지 하고 나자 렌스키는 피식 웃으며 모두에게 제안했다.
“다 같이 식사라도 하는 건 어때요? 근처에 괜찮은 곳을 봐 뒀는데.”
친목의 일환인가?
렌스키는 분명히 이런 자선 연주회에 참가하는 목적엔 함께하는 연주자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함도 있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음악가들이 아무리 독자적인 활동을 많이 한다지만 교류를 해서 나쁠 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난 오늘 그와 느긋하게 식사 같은 걸 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른 날이라면 또 모를까, 오늘은 싫다. 아나스타샤도 있었고.
“죄송하지만, 전 실례할게요. 집에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하염없이 기다리는 빅토르를 위해서라도 돌아가야겠다.
정중히 사과하자 렌스키가 자동차 키를 손가락에 끼워 빙빙 돌리며 말했다.
“아, 차편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두 분 다 제가 데려다 드릴 테니.”
집이 어디인 줄 알고 데려다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꽤 선심 쓴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물론 난 그런 도움이 필요 없었다.
“괜찮아요. 차 있어요.”
“……면허가 있습니까?”
“아니요.”
“??”
난 아직 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차는 있고, 집에 돌아갈 수도 있다. 렌스키는 어떤 상황인지 쉽게 상상이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어떻게 경호원이 딸린 차에 타고 다니는지, 어차피 얼마 안가 다 알게 되겠지만 난 그때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기로 했다. 이제 와서 내 성을 제대로 밝히고 이야기하는 건 웃기기도 하고, 음악가가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먼저 소개한다는 건 조금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난 렌스키와 발레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나스타샤도 당연히 날 따라온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뵈어요.”
“잘 가요.”
렌스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했다.
그런데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막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발레리가 날 불렀다.
“잠시만, 타티아나.”
돌아섰다. 발레리는 미안함이 서린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렌스키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발레리는 중간에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 등을 보고는 대충 유추를 해낸 것 같다.
그런데 그냥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게 아니라 예리하게 콕 집어 렌스키를 문제 요인으로 특정하는 걸 보니…… 그 사람 이미 이런 비슷한 전과가 몇 번 있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할 말이라면 있었지만, 길게 말하기 싫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죄송합니다. 지금 연주자가 많이 부족하다 보니 여러 루트로 부탁해서 데려온지라 렌스키는 혼자 이 연주회를 리드해야시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다시 제대로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음……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발레리.”
길게 말하기도 싫고, 렌스키에게 딱히 사과 같은 걸 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그는 앞으로도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연주자 활동을 계속해 나갈 테고, 난 그를 제지하거나 힐난할 수 없다.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의 방식일 테고 실제로 지금까진 성공적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의 삶을 전면 부정할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무대에 설 땐 진지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라면 최선을 다하게 만들고 싶다. 다음에 보이지 않는 곳에선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난 일단 내가 보는 앞에서 연주자가 무대에 소홀히 하고 대충 하는 건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다.
어쨌든 발레리가 아니라 직접 무대에 설 연주자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은 렌스키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한 번쯤 이야기를 다시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난 몇 번 다시 사과하는 발레리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갈까요.”
“응.”
엘리베이터 안.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난 그녀가 분명 렌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도 좋다. 아나스타샤는 오늘 정말 많이 참았으니까. 사실 조금은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이 시간 자체가 유쾌한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를 데리고 온 건 나이기도 하고, 조금 미안한 책임의식을 느끼는지라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할지 집중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예상과는 다른 걸 물어보았다.
“있잖아, 렌스키가 헛소리하는 바람에 네가 이런저런 이야기 했었잖아.”
“…….”
설전을 벌일 땐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그 광경을 아나스타샤가 고스란히 다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난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괜한 말들이었나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도중에 네가 현실주의자란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나서.”
난 실제로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기억나? 그때 넌 운명론자라 했었어.”
또렷이 기억한다.
자선 연주회가 끝나고 그날 밤. 난 아나스타샤에게 기억이 비어 있음을 말하면서 내 스스로를 운명론자라 설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쪽인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이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운명론자이자 현실주의자. 둘만 딱 붙여 놓고 보면 확실히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짧게 말했다.
“글쎄요, 양쪽 다이지 않을까요? 조금 이상한가요?”
“조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모순되는 말 아니야?”
어려워하는 아나스타샤에게 굳이 쇠렌 키르케고르 같은 사람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철학에 관련된 숙제 등을 하며 토의를 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지만, 밖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그러는 건 지나치다.
그리고 난 그렇게까지 스스로 어떤 한쪽으로 정립되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이지 않으니 일반적인 잣대를 가져다 댈 수 없다.
지금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난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운명론자면서 이상주의자인 쪽이 더 이상한걸요.”
“이상한가? 글쎄, 운명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아닐까?”
아나스타샤는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결국은 다 모르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있어.”
“무엇인가요?”
“네 실존과 본질은 모두 음악을 향하고 있을 거야.”
“…….”
특정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그녀의 명석함과 통찰력은 내 상상을 늘 한참이나 뛰어넘곤 한다.
멍하니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었다.
나 역시 그녀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같잖아요.”
“그런가?”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보들처럼 한참을 웃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