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5화
타티아나가 나가고 잠시 후 발레리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
스튜디오엔 아나스타샤와 렌스키만이 남았다.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엔 지금 타티아나를 따라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반절쯤, 그리고 나머지는 렌스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반절 차지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따질 순 없다. 렌스키는 실력 있는 연주자였고, 방금 전 베토벤 소나타 역시 테크닉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연주는 깊은 연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컴퓨터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악적인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프로 연주자에게 기대하고 있던 수준엔 턱없이 모자랐다.
그가 타티아나를 실망시키고 우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피아노 앞의 남자를 불렀다.
“렌스키.”
렌스키가 고개를 돌렸다. 22살의 젊은 프로는 지금 자신이 뭘 하는지 스스로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일단 무턱대고 물어봤다.
“왜 그러는 거예요?”
“뭐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투가 무척 짜증 난다.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말투가 점점 따져 묻는 투가 되어 가는 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당신은 대충 하잔 말을 하긴 했어도 연주회에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청중들의 관심을 쉽고 간편하게 확 끌 수 있는 곡들을 이야기하기도 했었고.”
렌스키 역시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발레리가 나간 틈에 노하우랍시고 이런저런 헛소리들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라흐마니노프 등의 화려한 곡으로 연주회에 온 청중들을 만족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연주회 자체에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이네요.”
지금은 달랐다.
렌스키는 무언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주도하려던 것을 내려놓고 나니 그냥 무대에서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태도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이 정말 이기적이고 글러 먹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렌스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들러리는 들러리의 역할에 충실해야죠.”
“예?”
생각도 못 한 단어에 아나스타샤는 할 말을 잃었다.
연주회에 참가하는 연주자들의 비중은 모두 같지 않다. 연주하는 곡이나 팬덤의 차이로 인해 분명히 관심과 집중도에 차이가 있고, 스포트라이트 역시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나라하게 들러리라는 단어를 쓰는 건 처음 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렌스키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이 연주회가 왜 취소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냥 한 후원 연주자가 맡아서 해 보겠다고 해서? 그 때문에 여기 이사진이 유럽에 있는 날 불러들였을까?”
일전에 듣기로 렌스키는 쉽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했다. 발레리와 협회의 다른 사람들이 부탁을 했다던가.
렌스키는 그 이유를 찾아낸 듯하다.
그는 피아노 의자를 짚었다.
“안 그래도 보통 일은 아닐 거라 예상은 했는데……. 내막을 알고 보니 더 엄청난 일이긴 하네요. 베르체노프의 후원 연주자……. 아니, 그 그룹이 음악계에 어떤 방식을 취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아나스타샤도 자세한 건 타티아나에게 듣지 못했지만, 아마 렌스키의 말이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렌스키는 처음으로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나 같이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 뭘 어떻게 하겠어요? 타티아나가 주도하게 둬야지. 그게 모두의 바람일 텐데.”
아나스타샤 또한 그렇지 않냐고 묻고 있다.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아나스타샤는 염두에 두고 있던 우려가 터져 나왔음을 느꼈다. 렌스키가 내린 결정은 그로선 합리적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막상 타티아나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결정이었다.
여러 이유로 짜증이 났다. 정말 타티아나의 배경에 관심이 크다면 이런 식으론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당사자들이 원하는 건 제대로 보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멋대로 구는지 모르겠다.
“렌스키.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꼭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주도한다거나 들러리라든가 그런 말 없이, 연주회에 중점을 두고 세 명이서 하면 되지 않아요? 저도 타티아나도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인데.”
아나스타샤는 굳이 렌스키와 메인 디쉬를 놓고 티격태격할 생각은 없었다. 연주회를 잘 치르고 타티아나가 기뻐해 주기만 한다면 그녀로선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렌스키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두 분은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니라서.”
“왜요?”
“글쎄요…….”
후원 연주자니 뭐니 신경 쓰지 말고 연주회에 집중할 수 없냔 말은 그에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렌스키는 침음을 삼키며 건반을 내려다보다가, 타티아나가 나가 버린 문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방금 타티아나를 보니 굉장히 나쁜 짓을 한 기분이 들긴 하네요.”
“……알면 왜 그래요? 어른이.”
“나쁜 어른이라서요.”
그는 농담처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 한마디는 아나스타샤의 짜증에 불꽃을 튕겼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화르륵 타오른다.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고개를 비틀며 물었다.
“저도 나쁜 애라서 그런데, 한마디 해도 되나요?”
“허락을 구하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것 같진 않은…….”
“렌스키는 스스로가 눈치가 빠르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 반대예요. 눈치도 없고 말귀도 어둡죠.”
“…….”
신랄한 말에 렌스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미리 경고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표정이었다.
그 변화에 음울한 기쁨을 느낀다. 상황이 어쨌건 남을 비난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데에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하면서도, 이 상황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타티아나가 계속 그를 상대해야 한다.
아나스타샤가 공격성을 드러내자 렌스키는 조금 놀라워하다가, 짧게 말했다.
“계속 해 봐요.”
“이러저런 핑계를 대고 있긴 한데……. 그럼 아예 더 열심히 하시든가.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뭔데요? 자존심의 발로예요?”
“와우.”
태연을 가장하지만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말의 창끝을 거두지 않았다.
“나쁜 어른을 자처하면서 무언가 안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듣기에 창피할 지경이에요. 나쁘게 굴지 않으면 프로로 살 수 없단 말이라도 하고 싶어요?”
“…….”
“웃겨요 그냥. 당신보단 타티아나가 훨씬 더 프로라고 생각해요.”
차가운 비난을 끝까지 쏟아낸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렌스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분노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렌스키는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보였지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란 걸 느꼈는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타티아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짜 프로라면 저렇게 실망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뇨, 미안하죠.”
“그 애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렌스키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하.”
갑자기 삐져나온 조소에 아나스타샤가 당황하기도 잠시, 렌스키가 곧바로 이어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왜 친구까지 나쁜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하죠?”
“……뭐라고요?”
가슴 한편이 뜨끔해짐을 느끼며 되묻자 렌스키가 이어 말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요? 베르체노프라는 영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건 아나스타샤의 생각 아닌가요? 타티아나는 그럴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렇게 확신하시는…….”
“확신은 아니에요. 그냥 추측이죠.”
렌스키는 타티아나의 배경에도 관심이 많은 만큼, 타티아나의 성격에도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상황을 만들지 이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기분에 거슬린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불이익을 주거나 보복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따져 묻거나, 그럴 수 없을 땐 홀로 우울해할지언정 그 이상은 없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을 바라는 듯한 말을 했다. 해선 안 될 말이었고, 타티아나에게 무척이나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실수한 거죠? 아나스타샤.”
“…….”
렌스키는 바보가 아니었다. 멍청해서 상황을 이렇게 꼬아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쭙잖게 압력을 주려고 하거나 했다간 거꾸로 당하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래요, 그 애랑은 관계없는 내 나쁜 생각이에요. 됐어요?”
“궁금하네요, 그 나쁜 생각 좀 구체적으로 들어 보고 싶은데.”
“끝을 보잔 건가요?”
“끝까지 가나 보네.”
차라리 비아냥거렸으면 좋겠는데, 렌스키는 그렇게 하지도 않고 되레 조금 감탄하는 투였다.
“그런 성격은 좋네요. 주관을 지키려면 화를 내는 것에 주저하지 마세요. 우습게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니까.”
“잘난 척 안 하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어요?”
“그냥 내 말이 싫은 거죠? 친구가 싫어하니까.”
“…….”
아나스타샤는 그 말에 바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타티아나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기분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타티아나가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한다면 아나스타샤도 싫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렇게 따라갔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렌스키를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렌스키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런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왜 그러는데요?”
렌스키는 타티아나의 배경이 협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납득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면 종종 그런 비합리적인 감정들이 생기기도 한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그런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치다. 타티아나는 그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잘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렌스키도 느꼈을 것이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연주회에 집중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렌스키는 그조차도 안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렌스키가 대답했다.
“방금 전 말했던 게 다 맞아요.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고 있는 거죠.”
“?”
“제가 이렇게 미련한 짓 하지 않도록 도와줄래요?”
“……무슨 말이에요?”
렌스키는 아나스타샤가 퍼부었던 비난들을 모두 인정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가 싶어 바라보자, 렌스키는 고개를 기울이며 이어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음, 지금 타티아나는 뭘 하고 있을까요. 물만 마시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이봐요.”
심경의 변화가 아니라,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면서 더더욱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위기감을 느꼈다. 렌스키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그가 아직까진 후환을 생각하며 선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선 안에서도 더더욱 멋대로 굴 여지는 너무나 많았다. 타티아나만 더욱 힘들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저랑…… 내기 하나 해요.”
“무슨 내기?”
“둘 중 하나는 여길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누가 나갈지 피아노로 정하죠. 어때요?”
극단적인 제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충동적인 내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렌스키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는 쪽이 그만두기?”
“하기 싫어요?”
“아뇨, 음. 후회할 텐데.”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지는 일에 대해선 생각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렌스키를 내보내야겠단 생각만이 가득했다.
곧 렌스키의 승낙이 떨어졌다.
“좋아요. 하죠.”
“그렇다면 발레리와 타티아나가 돌아오면…….”
“그럴 필요 있어요? 먼저 하세요.”
렌스키는 어서 하라는 듯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차피 둘 사이의 대결이라면 다른 사람은 필요치 않다. 아나스타샤는 어떤 의심도 없이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
그녀가 말없이 연주한 곡은 알캉의 12개의 단조 연습곡 op.39의 6번째 곡이었다.
곡의 제목은 피아노 솔로를 위한 교향곡 3악장.
교향곡이란 제목으로 쓰인 곡답게 시작부터 빠르고 정교한 도약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화음들이 잔뜩 쏟아져 내렸다.
거의 폭력적으로 폭발하던 주제는 곧 춤곡을 바뀌어서 감미롭게 속삭이다가, 다시 첫 주제로 돌아간다.
이 미묘한 교차와 조화는 굉장히 까다롭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건반을 때리고, 페달을 누른다.
프로 연주자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곡이었다. 서투른 모습이나 빈틈이 있어선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창칼을 감추지 않고 휘둘렀다.
“…….”
그렇게 4분 정도의 연주가 끝나고 아나스타샤가 일어섰을 때, 그녀의 귀에 들려선 안 될 것이 들렸다.
렌스키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결 상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렌스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말의 주저 없이 말했다.
“내가 졌어요. 이길 방도가 없네.”
대결을 제안한 것도 이긴 것도 아나스타샤였지만, 전혀 이긴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렌스키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곤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