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6화
여러 연주자가 모이게 되면 다툼도 생기기 마련이고 가끔은 참지 못한 연주자가 그만두고 나가 버리기도 한다. 여러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통용되는 일도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간신히 구해 놓은 연주자를 마음에 안 든다고 대결을 걸어 그만두게 하는 건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둘 중 하나가 나가야 하는 조건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연주회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럴 땐 이유가 어찌 되든 간에 연주회를 등한시한 두 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연주회를 앞두고 내가 왜 이런 대결을 제안했지?
해선 안 될 내기였다. 연주회 성사에 최선을 다하는 타티아나를 봐서라도.
“…….”
하지만 그런 생각도 뒷전으로 미뤄야 했을 정도로 렌스키의 태도는 비협조적이었다.
이해가 잘 안 간다. 무료 연주회는 실리에 도움이 안 되니 대충 하겠다고 하며 연주자끼리 친목이나 다지자고 했던 그였다.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이 앞으로 음악계에서 얼마나 자주 들리게 될지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적어도 실리가 될 일엔 적극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렌스키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대결을 하자고 하면서도 그가 이렇게 그냥 나가겠다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적어도 그가 진지하게 그녀와 마주하고, 제대로 상대를 해 주리라 생각했다.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여러모로 허점을 찔린 기분에다가 렌스키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어서 아나스타샤는 그저 당혹스러웠다.
피아노 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와 발레리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타티아나는 잠시 스튜디오 안의 상황을 확인하는 듯 아나스타샤와 렌스키를 바라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나스타샤, 리허설을 한 건가요?”
이미 리허설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어투였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회에서 연주하기로 한 곡에 알캉은 없었다. 계획에 없었던 곡을 이렇게 격렬하게 보란 듯이 연주할 이유는 몇 가지 없다. 타티아나는 벽 너머에서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렌스키가 대답했다.
“아뇨. 저와 대결을 했죠.”
타티아나가 돌아보자 렌스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져 버렸네요.”
“내기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그런 게 걸려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보면 알 수 있지요.”
자꾸 허튼 소리로 빙빙 돌릴 생각 말고 제대로 말하라는 듯 타티아나가 렌스키를 바라보았다. 렌스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진 사람이 그만두기로 했죠. 제가 졌으니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
타티아나의 눈가가 얇게 떨렸다. 아나스타샤는 움찔했다.
렌스키에게 명분을 이렇게 주게 된 건 아나스타샤의 실수였다.
타티아나라면 만약 대결을 하더라도 절대 이런 조건을 걸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같이 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텐데, 그걸 아나스타샤가 충동적으로 끼어들어 망쳐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도 수습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렌스키 로마노비치. 그건…….”
“다른 이유가 필요해요?”
하지만 렌스키는 그냥 농담으로 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한참이나 어린 연주자에게 실력으로 졌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없다.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소문이라도 뿌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는 지금 그냥 나가는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발레리에게도 확실하게 말했다.
“발레리. 미안하게 되었네요.”
“……곤란합니다. 렌스키.”
당연히 발레리는 곤혹스러워했다. 처음부터 삐걱거린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렌스키가 이렇게 빠져 버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당황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렌스키를 바라보았다. 그저 시선뿐인데도 무서운 중압감이 느껴진다. 아나스타샤는 렌스키에게 빌미를 준 실수를 다시금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타티아나가 조용히 물었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저희와 함께하는 게 그렇게 싫었나요?”
며칠간 그녀가 굉장히 노력했다는 건 모두가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배신감 등이 담겨 있진 않았다. 약간 공허한 물음이었다.
렌스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요. 대신 아나스타샤가 이겼다는 것에 기뻐해 주시죠. 전 그냥 괴팍하고 이상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하시고.”
“실리를 강조하시지 않았나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죠.”
렌스키가 말하는 실리가 어디에 있는진 알 수가 없었다.
연주회에 진지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주도를 할 생각을 말아야 했고, 타티아나와 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녀의 심기를 있는 대로 건드려 놓는 짓은 하지 않아야 했다.
그만두고 나가고 싶었다면 아나스타샤와의 대결에서 졌다는 명분을 굳이 쌓을 필요 없이 그냥 나갈 수도 있었다.
대체 실리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엔 진한 실망이 묻어났다.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나섰다. 어떻게든 렌스키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말이 심했던 것에 대해 제가 사과할게요. 대결에 대한 것도 충동적이었던…….”
“아나스타샤.”
그러나 타티아나가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나갔다 온 사이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타티아나?”
멍하니 부르자 타티아나는 다시 한 번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렌스키에게 다가갔다.
타티아나의 구두 소리만이 들렸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잠깐이 몇 시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렌스키의 앞에 서더니 딱 잘라 이야기했다.
“유감이지만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렌스키 로마노비치.”
말을 유감이라 하지만 전혀 유감스러워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대결 같은 것이 없었어도 어차피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처럼, 타티아나는 그렇게 자신의 입으로 이 상황에 직접 매듭을 지었다.
“이렇게 가볍게 그만두겠다 하시는 분이라면 저도 붙잡고 싶지 않아요. 연주회 당일이 아닌 걸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요.”
“…….”
이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말려야 할 발레리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렌스키는 걸어 나가더니 문가에 서서 말했다.
“좋은 연주회가 되길.”
“연주회에 대해선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냉정해진 타티아나의 목소리에선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었는데, 그럴 순 없을 것 같네요.”
“…….”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타티아나의 입에서 나오니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
렌스키가 나가고, 한동안 차가운 정적이 맴돌았다. 아나스타샤는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 있었다.
대결 같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렌스키는 무대에 섰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열의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발레리를 거쳐 의견을 전달했다면 이런 상황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다른 가능성이 다 없어졌다. 타티아나는 직접 렌스키를 끊어 냈고, 거기에 이후에도 잘 지낼 생각은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간 타티아나와 지내면서도 그녀가 이렇게나 냉정하게 말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후련한 마음으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타티아나는 그리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침묵 끝에 말소리를 낸 건 발레리였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이번 일은 확실하게 하고, 렌스키도 제재하겠습니다. 원래도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이번엔 도를 지나쳤어요.”
메세나 협회에서 할 수 있는 제재라 해 봐야 그리 강력한 건 되지 못하겠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발레리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차갑게 굳어 있던 태도를 풀었다. 그녀는 천성이 모질지 못하다. 이번엔 실망도 많이 하고 화도 났지만 그럼에도 렌스키에게 악감정을 품고 대할 생각까진 없는 것 같았다.
“그러실 것 없어요. 이런 일도 있는 법이죠.”
“…….”
그 달관한 듯한 태도에 발레리가 침묵했다. 뭔가 타티아나가 화를 내고 발레리가 달래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입장이 정 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연주회를 일주일 남기고 연주자가 나가 버렸을 때, 타티아나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저희 앞에 놓인 일에만 집중하죠.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요?”
애초에 연주회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다. 나간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발레리도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타티아나.”
사무실로 올라가지 않고 바로 이 자리에서 회의가 열렸다. 발레리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지금 연주자를 구하긴 쉽지 않을 것 같으니 기획을 축소해서 두 분의 특별 연주회로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보다 부담은 더하겠지만 시간을 더 줄인다면…….”
“이미 안내 등은 트리플 연주회로 나가지 않았나요?”
“수정하면 됩니다.”
“…….”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연주회 당일에도 예상치 못한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인데, 일주일이나 시간을 두고 생긴 문제라면 수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발레리와 타티아나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그냥 이대로 진행시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감도 약간 있었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더 렌스키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대화 중간에 의견을 냈다.
“연주자를 구할 수 있다면 어떤가요? 제 친구이지만 실력은 확실해요.”
“기한이 너무 짧…….”
발레리는 일을 어렵게 하지 말자는 듯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가 맴도는 표정이었다. 그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제가 책임지고 부탁해 볼게요.”
아나스타샤의 교우관계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발렌티나는 모스크바에 없고 준비시킬 시간도 없다. 한승우나 리처드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타티아나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아나스타샤.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말할게. 렌스키가 나간 건 내 잘못도 크니까.”
“아나스타샤가 잘못한 건 없어요.”
“더 잘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뭘 어떻게 했어야 렌스키와 잘 할 수 있었는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타티아나였다면 아나스타샤처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점에서 분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고 싶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혼자 두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같이 가요.”
“…….”
아나스타샤는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