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39화 (539/1,277)

##  539화

연주회까지 일주일.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까지 세 사람은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로 찾아갔다. 난 이걸로 네 번째 방문이었다. 이젠 경비원이 날 알아보고 인사까지 해 주었다.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발레리의 사무실로 향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앞선 시간이었는데, 발레리는 이미 느긋하게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죠. 여러분.”

발레리는 안경을 내려놓고는 일어서 인사했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발레리.”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조금 서먹서먹할 뻔했으나 발레리가 밝게 대해 줘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에르네스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발레리는 에르네스트를 발견하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분을 모시고 올지 궁금했었는데…… 정말이었군요.”

상상 이상으로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어딜 가든 에르네스트 정도면 사실 급히 연주회에 끼워 넣어도 모자라는 게 아니라 넘칠 정도이긴 하다.

발레리가 넉살 좋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매니저 발레리 르포비치 타라소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르네스트는 깔끔한 태도로 악수를 받았다. 평소 우리와 있을 땐 빈틈도 자주 보여 주는 편인데,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그는 정말 몰라볼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발레리가 열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부터 활동하는 모습 잘 보고 있었습니다. 근래는 피아니스트로서 활동보단 작곡 공부를 하신다 들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공부할 시간이 지금 정도뿐이라서요. 내년엔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집중해야죠.”

“내년? 아…… 콩쿠르 말씀이시죠?”

내년엔 4-5년마다 열리는 국제 콩쿠르들이 많이 겹치는 해였다. 딱 열일곱 살이 되는 우리는 첫 참가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그럼 올해는 정말 바쁜 한 해가 되겠군요. 얼마 전 작곡하신 곡도 잘 들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께서 초연해 주신 겨울의 표리. 아주 멋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훌륭한 무대의 클라이맥스에 걸맞은 곡이더군요.”

이전 내 독주회에 와서 들었던 것들이 생각나는지 발레리는 손짓까지 해 가면서 겨울의 표리에 대해 칭찬했다. 이 정도면 좀 기뻐해도 될 텐데, 에르네스트는 당연한 말을 듣는 사람처럼 담백하게 감사인사만 했다.

그리고 발레리는 은근히 그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 곡도 준비하고 계신 게 있는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을 짚어 본다면 이번 연주회에도 혹시 신곡을 올릴 생각은 없냐 떠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초연했던 겨울의 표리는 꽤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한테 온 관계자들도 정말 많았지만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한 관심도 상당했다. 방송사고 신문사고 가릴 것 없이 에르네스트에게 인터뷰를 청한 매체만 열 곳이 넘었다고 들었다. 굉장한 특종이란 뜻이었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해서 금방 가라앉긴 했지만.

그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져온 곡을 작곡한 작곡가다. 다음 곡을 연주회에 올릴 수 있게 된다면 발레리로선 그보다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했다.

“전 콘서트 매니저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까지 사무적이긴 해도 적당히 품위 있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상대가 마흔 살도 넘는 음악계 선배라는 건 상관없이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에르네스트가 물어보았다.

“렌스키가 그렇게 제어가 안 될 정도였습니까?”

“…….”

발레리는 지금 에르네스트가 연주자로 참가해 준다는 것에 대해 기뻐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의 말을 듣고서야 발레리도 아차 싶었는지 이야기했다.

“원래부터 조금 제멋대로인지라…….”

“그 사람이 그런 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잘 안다면 무리해서 부르진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아니면 문제가 생기기 전에 콘서트 매니저 선에서 일찍 조치를 취하든가.”

“…….”

“왜 이렇게 늦었죠?”

사실 첫날부터 발레리는 렌스키가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느냐고 물었었다. 회의를 할 때도 렌스키를 어떻게든 자중시키려는 모습이 보였었다. 하지만 그건 노력이었을 뿐, 결과는 별로였다.

발레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렌스키는 힘들게 데리고 온 연주자였으니.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발레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발레리는 에르네스트의 말에 이 이상으로 이런저런 입장 설명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념하도록 하죠.”

“제가 렌스키를 대신하게 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전 제 친구들이 필요로 한다면 어떤 자리든 맡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에르네스트는 이쪽으로 눈짓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이어서 조금 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에겐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싶군요.”

어제도 에르네스트는 렌스키에게 꽤 감정이 안 좋아 보였다. 연주자로서의 신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적의마저 느껴지는 에르네스트의 말에 발레리는 약간 당황해했다. 그 당황은 아주 잠깐 동안 발레리의 눈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발레리는 무언가 결정한 듯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저희도 공적 재단과 비슷한지라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지만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이사님도 문제가 있다고 하셨고…….”

“아뇨, 아닙니다.”

어제 언급했던 제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에르네스트가 오해 말라는 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후회할 만큼 잘해 보고 싶단 의미였습니다. 발레리 르포비치.”

“……?”

“그게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잖습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들은 사적인 분노 같은 게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어디까지나 연주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 본심은 누구에게나 전해진다. 발레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한바탕 웃은 발레리는 고개를 휙휙 젓더니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제가 자꾸 못난 모습만 보이는군요. 미안합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그리고 그는 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사과했다.

“두 분께도.”

“괜찮아요.”

발레리가 콘서트 매니저로서 자기 역할을 완벽히 못 했을진 모른다. 하지만 난 그걸 문제로 삼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할지 확고해졌거든요.”

“그렇습니까.”

그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확고해진 표정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미룰 필요가 없었다.

차를 준비할 새도 없이, 곧바로 난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에르네스트와 회의를 조금 해 봤어요. 기획을 조정하고 싶어요. 발레리.”

“빠르시군요. 좋습니다. 어떻게 조정하실 예정입니까?”

어제 세 명이 러프하게 준비한 기획안에 대해 정리해 놓은 노트를 펼치고, 발레리에게 설명했다.

그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을 구하고, 가능성이 의심되는 부분에 대해선 재차 확인을 했다.

그리고 종국적으론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이거……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난이도가 쉽진 않을 겁니다. 미리 사전에 준비를 해야…….”

“사전 준비는 저희만 하면 될 거예요.”

난 다시 한 번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할 수 있어요.”

“…….”

발레리는 잠시 날 들여다본다. 우리가 내놓은 안들을 모두 수용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잠시, 발레리가 말했다.

“리허설은 나중에 들어 보기로 하고. 그럼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난 이미 그의 마음속으로 결정은 거의 끝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회의가 끝나고, 실제 베르체노프의 후원 연주자로서 협조 중인 타티아나가 발레리와 잠시 다른 일로 나갔다. 조금 더 높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데, 베르체노프의 일이라서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가 따라갈 이유는 없었다.

남겨진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타티아나를 기다렸다.

고요한 침묵. 하지만 오랜 친구인 두 사람에겐 무척이나 편안한 침묵이었다.

한참이나 지난 후, 먼저 침묵을 깬 건 아나스타샤였다.

“에르네스트.”

“어.”

짧게 대답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신중한 어투로 물었다.

“마지막에 듀엣 계획되어 있는 거, 어떻게 할까?”

그런 게 있긴 했지.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앞부분의 새로운 기획안들에만 관심이 있었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 같던 듀엣엔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희 둘이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아냐?”

렌스키의 이름은 없고,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나스타샤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맞아. 아마 그렇게 되었을 거야. 원래 렌스키가 있었으니까.”

“그럼 둘이서 정해. 어차피 둘이 하는 거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나머지가 나든 렌스키든 상관없잖아.”

두 사람 다 서로를 잘 알고 실력도 출중하니 에르네스트가 괜히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듀엣에 있어서만큼은 에르네스트가 들어와서 바뀔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아니, 상관있는데.”

“뭐? 왜?”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조금 전 편안했던 침묵과 달리 이 침묵은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오래 사귄 이 친구가 작년엔 유난히 까칠하다가 올해는 조금 유해졌나 싶더니 또 까다로워진 것 같아 걱정이었다. 변덕이 이리 심한 애가 아니었는데.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자신 쪽에 있는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그게 뭔진 전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문득 픽 웃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웃기네. 나도 참.”

“무슨 소린데.”

“그냥 이번엔 나랑 타티아나랑 알아서 할게. 불만 없는 거지?”

“불만이 왜 있어야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콕 집어 말했다.

“너 작년엔 불만 많았었잖니.”

“……자선 연주회 때?”

“응.”

“너 바보냐?”

“응?”

에르네스트는 그때 상황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

“그때 피아노과가 세 명이나 참가하는데 트리오만 메인으로 두자고 하니 불만일 수밖에 없었던 거고.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 차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아나스타샤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을 할까?

갑자기 스쳐 지나간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에르네스트는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내가 그 애랑 듀엣을 바란다고 생각해?”

“……아니니?”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문가를 바라봤다. 타티아나는 아직 오지 않는다.

반년 전, 듀엣 연주로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를 연주했던 때가 기억난다.

어느 누구라도 타티아나만 한 실력자와 듀엣을 바라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이유를 제쳐 놓더라도, 에르네스트는 누구보다 자신이 그녀의 옆자리를 바란다고 자신했다.

“맞아.”

“…….”

“하지만 딱히 너희 둘이 한다면 불만 같은 건 없어.”

타티아나의 바로 옆에 설 수 있다고 한들, 아나스타샤를 밀쳐내야 하는 자리라면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친구인지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 친구 관계에 방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듀엣 연주라면 해보기도 했고.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눈엔 실망이 서렸다. 그녀는 굉장히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길 바랐어.”

“뭐?”

“승부해 준다고 했었잖아.”

에르네스트는 할 수 있는 신경을 모두 집중해서 아나스타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승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해 승부해 주겠다 했었던가.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에르네스트가 되물었다.

“갑자기 지금 하자고?”

“……아니, 그건 아니야. 또 실수할 순 없거든.”

고개를 가로젓는 아나스타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하는 말을 똑바로 정돈하고 있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참을성을 되새기며 천천히 물었다.

“아나스타샤. 평소 내가 메시지 짧게 보낸다고 뭐라 하지 않았었어? 부탁이니까 설명 좀 길게 해.”

“…….”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결국 사과했다.

“미안해.”

“대체 뭐가…….”

에르네스트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 싫어서 다시 캐물어 보려는데, 아나스타샤는 여기까지 하자는 듯 말했다.

“연주회에 집중하기로 했었잖아. 그렇지? 우리 세 사람이 오랜만에 같은 무대에 서는 거야.”

“…….”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말하는 아나스타샤에게선 정말 주어진 것에 집중하며 다른 걸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여서, 에르네스트는 하고 싶은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이번 연주회가 끝난다면, 아나스타샤도 이야기를 해 줄지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주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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