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0화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의 일과는 간단명료하기 그지없었다. 온종일 악기를 붙잡고 음악을 쫓아다니는 일뿐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따로 신경 써 주어야 하는 일들이 많다. 오로지 생각만으로 악기를 다룰 수 있다면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 없겠지만, 모든 음악은 몸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꼬박꼬박 식사도 하고, 음악에만 몰두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신경이 예민해지는 일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틈틈이 컨디션 조절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중요했다. 스트레칭을 하거나 짧은 명상을 하면서 몸 관리에 집중했다.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니고, 난 익숙하게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준비시켜 나갔다. 연주회 전까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
저녁에도 혼자서 연습하다가 차를 마시며 악보를 내려다본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서기로 한 듀엣 무대에 올릴 곡이었다.
듀엣 무대에 대해선 딱히 회의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와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의가 없었고 나 또한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듀엣 연주는 연습실에서 한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청중들이 있는 무대에서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꼭 해 보자 했었던 약속을 이번에 마침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난 듀엣곡에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곡의 퀄리티만큼은 최고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난 악보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소리 내어 음계를 노래해 보기도 하고, 피아노로 내 파트를 연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듀엣곡을 혼자 연습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이 부분을 아나스타샤라면 어떻게 연주할까?
내 머릿속의 아나스타샤의 음악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그에 따라 맞춰 연습을 할 수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내 관념일 뿐이다.
얼마 전 에르네스트의 집에서 아나스타샤가 연주했었던 선율은 내 것과 많이 다르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음악성을 띠고 있었다. 직접 들어 보지 않는다면 나로선 함부로 상상해 낼 수 없다.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 본 다음 거기에 맞추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악보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난 결국 스마트폰을 들었다.
[전화해도 되나요?]
메시지를 보내 놓고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8시였다. 슬슬 연습을 마쳐야 할 시간이니 이것만 물어보고 그만할 참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1분 내로 답장이 왔을 텐데, 난 건반을 톡톡 치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지나서야 아나스타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무슨 일이야? 타티아나.
난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뭘 물어보려 했던 것인지 까먹어 버렸다. 30분 동안 타건 연습을 하면서 머릿속을 비워 놓은 탓이었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면서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듀엣곡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 그게…… 같이 할 곡으로 정했던 것 있잖아요. 바로 묻고 싶은 부분이 조금 있어요.”
- 그래? 어느 부분?
“지금 봐 주실 수 있나요?”
- 응.
“그러면…….”
난 내가 고민하고 있던 악보 마디를 그녀에게 불러 주었고, 곧바로 전화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슨해져 있던 모든 신경이 전화 속 소리에 집중했다. 열화된 음질이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난 그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새기면서 다시 악보를 살폈다.
짧은 연주가 멎고, 피아노가 아닌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거 말하는 거지?
“예. 예상했던 대로 조금 늘어뜨리시네요.”
- 이게 맞는 것 같아서.
“좋은 해석이에요.”
딱히 다른 의견은 없었다. 우리 음악은 이미 오랫동안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그냥 맞춰 보아도 잘 맞는 편이었다. 이번에 다시 확인한 기분이다.
당장 그녀와 리허설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일이면 괜찮을 것 같다.
난 악보를 덮었다. 문득 전화 너머에서 들렸던 피아노 소리가 먹먹한 연습실의 음향과 닮아 있었음을 떠올린다.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예요? 아나스타샤.”
- 어?
“피아노 소리가 달라요. 집이 아니죠?”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 응. 늦게까지 연습할 생각인데 이 시간에 피아노 치자니 좀 그래서. 연습실 왔어.
“사일런스 피아노가 있으시잖아요?”
- 지금처럼 연구할 땐 잘 안 만지게 되더라.
“아, 그렇죠.”
그녀의 방엔 피아노가 두 대나 있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와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
그중 업라이트 피아노는 밤에도 연주할 수 있는 사일런스 피아노라서 연습실에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업라이트 피아노 자체가 그랜드 피아노와는 건반의 감각이 많이 다르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작은 차이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난 같은 연주자로서 그 심정을 이해했다.
다시 시계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그래서 어디신가요?”
- 어디게?
이 시간까지 하는 연습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나스타샤가 종종 가고, 또 늦은 시간에도 문을 여는 연습실의 교집합을 추려 보면 남는 건 한 곳뿐이다. 쉬운 퀴즈였다.
“바스만니 구에 있는 연습실인가요?”
- 아하핫, 바로 맞추네.
아나스타샤는 맞출 줄 알았다며 웃었다.
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밤이었다. 저 밤 어디선가 아나스타샤는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함께 있었겠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따로 있지 말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그녀가 보여 준 해석을 들으면서 당장 리허설을 하고 싶단 기분이 들었던 것 또한 한몫했다.
약간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도 갈까요?”
- 응? 왜?
“그냥요. 같이 연습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복잡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면 굳이 지금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낮에 해도 되지 않니?
“지금 생각난 건 지금 바로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고, 그냥 각자 하자고 말한다면 알겠다고 수긍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 그래. 어차피 너무 늦게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두어 시간 정도면 괜찮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난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예. 바로 갈게요.”
- 천천히 와.
천천히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난 최대한 빠르게 연습실을 정돈한 후 문을 닫고, 곧장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아나스타샤를 만나서 같이 연습을 해도 되겠느냐 허락을 구했더니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냥 내일 하라는 식으로 반대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아무튼 허락도 구했겠다, 이젠 미안하지만 도움을 구할 차례였다.
“빅토르.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죠. 지금 시간 있나요?”
- 무슨 일이십니까?
난 늦은 시간엔 정말 어지간해선 빅토르를 찾지 않는다. 그 역시 쉬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연습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니 빅토르는 길게 묻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멋대로라 미안해요. 쉴 시간인데.”
- 별말씀을. 아가씨가 깨어 계시는 동안엔 저도 누워 있을 생각 없습니다.
피곤할 텐데 말이나마 저렇게 해 주는 게 너무 고맙다. 난 이 연주회도 끝나고 나면 이번에도 내 경호원들에게 휴가와 휴가비를 어떻게 산정해 줘야 할지 생각했다.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빅토르가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대로 바스만니 구까진 정말 순식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다녀올게요.”
난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오래된 5층짜리 건물이었다.
이곳에 있는 연습실은 정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운영하기 때문에 시간이 급한 여러 연주자들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난 개인 연습실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곳에 올 일이 별로 없었지만, 친구들을 따라서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 기억에 의지하여 건물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아!?”
놀라서 뒤돌아보니 에르네스트가 서 있었다. 순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멍하니 있자 그가 웃으며 다가왔다.
“와,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네. 놀랐어.”
“……저야말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
난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남색 셔츠에 재킷 차림이었다. 편하게 나온 느낌이었다.
가만 보니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같아 보여서, 빠르게 태연한 척 가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피아니스트가 연습실에 올 이유가 뭐 있겠어. 늦게까지 연습 좀 하려고.”
“아나스타샤가 불렀나요?”
“어? 그 애가 왜?”
“?”
분명히 아나스타샤가 불렀겠거니 싶어서 물어봤는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난 먼저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왔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전 아나스타샤가 밤 연습으로 나와 있다고 해서 같이 연습하려고 온 참이에요.”
“여기에 있대?”
“몰랐나요?”
“몰랐어.”
장난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정말 늦게 연습을 하기 위해 종종 오는 연습실을 찾았고, 우연히 날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문득 건물을 올려다보더니 큭큭 웃었다.
“모스크바 전체를 찾아도 이렇게 밤늦게까지 하는 연습실은 몇 안 되니까…… 결국은 이렇게 모이게 되네.”
“그러네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연주회를 해 왔고, 늦게까지 연습한 적도 많았지만 거의 별관의 연습실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외부의 연습실에 와서 친구를 만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기하다는 듯 말하니 에르네스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이야.”
“그래요?”
“난 밤중에 이렇게 연습하러 잘 안 나오거든.”
에르네스트의 평소 스타일을 생각해 본다면 연주회를 앞두고 시간을 끌어 쓰면서까지 연습량을 늘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꾸준히 연습을 하면서 컨디션에 변화가 없도록 관리하는, 정말 프로페셔널한 연주자였다.
그런 그가 이번엔 밤 연습을 위해 나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족하다 생각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최근엔 거의 모든 시간을 작곡에 투자했을 에르네스트를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난 옅게 웃으며 물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이 짧죠?”
“길진 않지. 그래도 어쩌겠어? 할 수 있는 연습은 다 해 봐야지.”
“…….”
주어진 일엔 반드시 최선을 다한다. 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렌스키가 이 반절만 진지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해 봐야 소용없었다. 난 지금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 뭐가?”
“연습하러 나와 줘서요.”
“살면서 들어 본 고맙단 말 중에 가장 이상한 이유 같은데.”
“아하하.”
나도 이런 이유로 고맙다 말해 본 건 처음이다. 재미있는 기분이었다.
건물 쪽으로 눈짓하며 그에게 말했다.
“들어갈까요.”
“그래.”
카운터에다가 이용료를 지불하고 들어갔다. 방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피아노 소리는 한 곳에서만 들렸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방 앞에 가서 서로 마주 보았다.
“…….”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문 앞에 서서 피아노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3초도 지나지 않아 피아노 소리가 뚝 그치고는 아나스타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일찍 왔…… 어?”
그녀는 날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하다 말고 바로 옆의 에르네스트와 눈이 마주치고는 당황해했다.
놀란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나도 연습하러 온 거야. 방금.”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렇게 모이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한 자리에 모였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손짓했다.
“잘 됐네. 서로 피드백 봐 주자.”
오늘 연습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