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41화 (541/1,277)

##  541화

그렇게 한밤중에 계획에도 없던 단체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방식은 평소 우리가 늘 연습실에서 하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연주를 하고, 각자 거기에 대한 짧은 평을 하는 식이었다. 대신 그 평은 평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주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어야 했다.

우린 이런 방식에 굉장히 익숙했고, 자연스럽게 음악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맨 처음 연주한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맡은 곡을 전부 연주하지 않고 피드백이 필요하다 생각한 부분만 꺼냈다.

팔짱을 낀 에르네스트가 거기에 대해 평했다.

“앞뒤 주제가 너무 계단식이야. 조금은 스무스해도 괜찮을 거라 봐.”

“이렇게?”

“훨씬 낫네. 네가 연주하면서 느끼기엔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단 한 번 이야기가 오갔을 뿐인데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질감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음악적인 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연주자였다. 테크닉적인 장점은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조언을 살짝 해 주었다.

“페달을 조금 더 붙이면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있는 느낌으로.”

페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좋다는 구체적인 의견을 아나스타샤는 즉각 자신의 연주에 반영해 냈다. 두어 번 반복하니 이전보다 더 부피감 있고 활기 있는 음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나스타샤도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이게 맞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나스타샤는 다시 몇 번 정도 연습을 짧게 반복했다. 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방금 느낀 감각을 손에 새겨 넣는 중이었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피아노에서 나온 후 다음 차례는 에르네스트였다.

그는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테크닉으로 음악을 쏟아 냈다. 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머릿속 노트에 그의 연주를 적어 놓았다.

테크닉적으론 완벽한 연주였지만, 그래도 조언할 부분 정도는 분명히 존재했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했다.

“너무 차가워.”

“이게 낫지 않아?”

“별로, 잘 알면서 왜 그래?”

“6월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6월이니 차갑게 들려도 괜찮을 거란 말에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팍 썼다.

난 그녀의 평에 공감했다.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소리는 그가 작곡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변해 있었다. 그건 스스로의 색채를 더더욱 밝게 내는 방향이었다.

“개성이 강해진 건 잘된 일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들려?”

“예.”

어떤 곡을 연주해도 그 곡을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연습도 많이 하지 않고 곧바로 필요한 요소들을 뽑아내어 전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음악은 미술 등과는 조금 달라서, 늘 모든 것을 다 보일 필요는 없었다.

난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구간은 조금은 색이 옅어도 괜찮아요.”

“옅은 색으로 말이지…….”

“예. 사람들은 종종 너무 또렷한 것보단 어렴풋하고 희미한 것을 찾아 손을 내밀고 발을 내딛곤 하니까요.”

멀리에서도 모든 게 잘 보이고 확연하면 시선을 확 끌 수는 있어도 굳이 가까이 다가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미스테리한 무언가 때문에 희미하게 느껴진다면 조금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된다.

음악에는 쓸 수 있는 기법들이 많다.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순 없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단지 곡의 해석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질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내 말을 듣곤 조용히 다시 악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음…….”

“그런 식의 장점을 살리기에 좋은 부분이라 생각해요.”

에르네스트는 다시 붓을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이전에 깔끔하게 칠해 두었던 음악에 색을 덧씌워 지워 나갔다.

얼핏 듣기엔 형태를 잃고 완성도가 낮아지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음악은 에르네스트라는 연주자의 개성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 대해 더더욱 궁금해지게 되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조언이었어. 고마워.”

한 번에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낸 두 사람이 훨씬 더 대단했다. 난 두 사람이 길을 찾아내는 방식을 보면서도 배울 수 있는 점들이 많았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난 부담 없이 지금까지 준비한 음악을 선보였다. 오래 연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꽤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

연주를 마치고, 난 두 사람의 평을 기다렸다.

막상 연주를 할 때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장되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해 줄까? 무엇이든 좋았다. 난 두 사람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이고 음악에 녹여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젓더니 옆으로 손짓했다.

“난 패스할게.”

“예?”

긴장하고 있던 게 바보 같다. 난 순간 맥이 빠져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나요? 피드백하는 시간인데.”

“없는 걸 만들어 낼 순 없잖아.”

“…….”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과 비슷한 말을 했다. 선생님은 보통 이렇게 조언할 게 없다고 딱 잘라 말한 뒤엔 무슨 일이 있어도 별말씀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솔직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잘 들었어.”

이건 좋은 일인 걸까. 하지만 난 이것저것 잔뜩 조언해 주었는데 되돌아오는 게 없다는 건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좋았는데.

“왜 저만 손해 보는 것 같죠.”

“원래 이런 연습 할 땐 잘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거야.”

“……뭐예요 그게?”

“칭찬이지 칭찬.”

에르네스트는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별수 없었다. 궤도에 오른 음악의 구조에 대해선 문제가 없다는 것 같으니, 방금 연주한 곡들은 혼자서 조금씩 디테일을 올려 나가기로 생각했다.

내 표정을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독주회 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뭐 벌써 거기까지 갔어? 타티아나.”

그러더니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일주일이면 충분하니까, 기다리고 있어.”

작곡에 열중하느라 치우쳐져 있던 집중력을 다시 연주자 쪽으로 되돌리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말은 그 무엇보다 반가우면서도 날 자극하는 말이었다. 딱 일주일 후에, 바로 무대에 섰을 때 에르네스트는 내 옆에 서 있을 것이다. 과연 그때 내가 에르네스트의 연주에서 빈틈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 하지만 나라고 가만히 놀고 있진 않는다. 난 장난스레 대꾸했다.

“못 기다릴 텐데요? 연습을 쉴 순 없잖아요.”

“아니, 내 말은 쉬라는 말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는 다시 무언가 설명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말을 이어 나가 봐야 내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게 되리란 걸 직감한 모양이다. 눈치도 빠르긴. 난 그런 그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 개개인 연습이 끝난 뒤엔 나와 아나스타샤의 특별 연습이 있었다.

“약속한 대로 간다? 네가 퍼스트고 템포는 변속 없이 일단 인템포로.”

“예. 아나스타샤.”

다른 연주자와 협연한다는 건 상당히 복합적이면서도 까다로운 일이다. 2인 3각 달리기처럼 발걸음만 맞춰도 되는 경기도 어려워서 넘어지곤 한다. 그런데 피아노 듀엣은 손가락 열 개를 맞춰야 했다.

하지만 나와 아나스타샤는 2인 3각 달리기의 선수나 다름없었다.

서로 무엇을 좋아하고 어떠한 취향인지 이제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이끄는 대로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가 내는 소리에서 원하는 방향을 읽어 내고, 그쪽을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회의에서 정해진 후로 겨우 며칠 연습해서 처음 맞춰 보는 곡인데도, 우리는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듀엣 연주를 할 수 있었다.

“…….”

연주가 끝난 뒤. 단 한 명 있던 청중은 우리에게 짧게 박수를 보냈다. 감탄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니 만족감이 든다.

에르네스트는 연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지 천천히 말을 고른다.

“처음인데도 나쁘지 않았어. 조금만 더 연습하면 손댈 곳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딱히 할 말은 없네.”

진지하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너…….”

아나스타샤가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이어 말했다.

“솔로 연주를 할 때보다 훨씬 나았어.”

“괜찮았니?”

“좋았어. 혼자 연주할 땐 실력을 다 내보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래?”

에르네스트의 담백한 칭찬을 듣고 아나스타샤는 너무 기뻐하거나 장난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손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 바퀴 연습을 끝낸 뒤엔 다 함께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사 와선 휴게실에서 나누어 먹었다. 봉지에 든 과자와 음료수 정도였지만, 한참 집중하며 연습을 한 다음이라 그런지 달달한 과자에 자꾸만 손이 갔다.

에르네스트는 과자 한 조각을 들고는 분석하기도 했다.

“망고인 것 같기도 하고 묘한 맛이네. 커피랑 같이 먹어도 나쁘지 않다는 게 신기해. 다른 거랑도 조합해 보고 싶은데.”

“에르네스트…… 무언가 평가하는 시간은 지났거든? 제발 그냥 먹으면 안 돼?”

“뭐가? 좋다 싫다 말도 못 하냐?”

“옆에서 먹는데 신경 쓰이잖아.”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괜히 말을 주고받으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을 땐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엔 가끔 유치하게 굴기도 하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그런 차이를 느끼는 것도 즐거웠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엔 다시 연습의 반복이었다. 우리는 각자 개인실로 흩어져서 혼자 30분간 연습을 하고, 다시 모여선 리허설을 했다.

주로 연주하는 부분은 굉장히 극과 극이었다. 스스로 듣기에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조언을 얻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보다 확신을 얻기 위해 리허설 자리에 올린다.

연습은 굉장히 효율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혼자 연습하는 것에 비해 몇 배는 빠르게 곡에 익숙해지고 완성도를 갖추어 나갔다.

“슬슬 여기까지 하자. 더 늦으면 수면 패턴에 문제가 생겨.”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1시경. 굉장히 늦은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밤을 새워 가며 이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트의 말처럼 컨디션 역시 곡과 함께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우리는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월의 밤하늘은 달빛과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갑지 않고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다시 고개를 내리니 두 친구가 보인다.

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음악가로서 이런 친구들을 만나는 건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이지 않을까.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오늘 오길 잘했어요.”

“그러게, 같이 하니까 훨씬 좋네.”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난 조심스레 제안했다.

“내일도 할까요?”

“그것도 좋지.”

“시간은 오늘과 비슷하게 하면 될까요? 밤 연습을 계속 하실 거라면.”

낮엔 각자 집에 있는 피아노를 사용하면 되니 개인 연습을 한다면 굳이 연습실에 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밤에도 연습하려면 날 제외한 두 사람은 연습실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 제안에 에르네스트가 다시 물었다.

“낮에는 개인 연습 하고 밤에는 모여서 리허설하고……. 일주일 내내?”

“가능하다면요.”

“장난 아닌데.”

쉽지 않은 일정이라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곧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오늘 해 보니까 안 할 순 없겠어.”

“그렇죠?”

그는 마치 이런 제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난 그 대답이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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