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2화
하루하루가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다.
낮 시간엔 연습을 하고 그 내용을 밤에 다 함께 리허설하고 피드백하는 건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깨달은 무언가를 음악에 곧장 접목시키는 일은 잘 집중하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음악 전체로 확대시켜서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조화롭게 만드는 건 혼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연구하고 완성시켜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굉장히 짧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다음 레슨을 받기까지도 보통 이틀에서 사흘 정도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딱 한나절 동안 바로 전날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바로 뒤쳐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엄청난 강행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쳐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음악의 선율 위로 올라섰다.
음악의 신은 노력하는 자들을 총애한다. 주어진 재능에 충분한 노력이 충족된다면 그에 마땅한 음악을 허락한다.
그렇게 모두가 준비한 곡들이 상당한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을 때,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 다음 회의가 있었다.
무대 확인도 해야 하고 드레스도 맞춰야 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끝마치고는 스튜디오에서 간단히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발레리는 길게 평하지 않았다. 짧게 기대된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연주회에 대한 기대로 굉장히 들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발레리에겐 티켓을 몇 장 받았다. 난 이 티켓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일단 선생님들을 떠올렸다.
지금 준비한 곡들을 보여 드리고 레슨도 받고 싶고 이 티켓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하일 선생님은 방학이 되자마자 잡힌 일 때문에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계신 상황이었다.
다행히 구세프 선생님은 방학인데도 학교에 계속 나온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티켓을 가지고 학교에 왔다.
“…….”
학생들이 없는 학교 복도는 고요했다. 방학 막바지쯤 되면 몇몇 학생들은 나와서 학교 연습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학교에 나올 학생은 없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입는 것같이 느껴지는 교복을 입고 복도를 걸으니 구두 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듣지 않고 듣는다 한들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난 이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싫어서 최대한 살며시 발소리를 내려 애썼다.
그렇게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자마자 들어오란 목소리가 있었다. 그 반가운 목소리에 난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왔냐.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퉁명스런 인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로 받자 구세프 선생님은 아예 말도 않고 의자 쪽을 가리켰다.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니 선생님이 차를 끓여 주셨다. 익숙한 향과 맛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게 물었다.
“이번엔 너희들끼리 잘 준비하는 것 같더만. 갑자기 레슨은 왜 해 달라는 게냐?”
오늘 찾아오기 전에 전화로 레슨을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이미 내가 연주회를 잡아서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까지 끌어들였다는 걸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먼저 레슨을 해 준다거나 연주회에 대한 것들을 도와주겠다 하시진 않았다. 알아서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처음부터 우리끼리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고 나면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을 생각이었다.
“저희 나름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긴 하지만, 조금 더 멀리 보시는 선생님의 시야로 봐 주셨으면 해서요.”
“……준비는 열심히 해 온 모양이군.”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픽 웃기만 했다.
다시 차를 마시다가, 레슨과 함께 여기에 온 두 번째 목적을 떠올렸다.
“아, 선생님. 여기 티켓…….”
“이미 받았다. 에르네스트가 주더군.”
이렇게 빨리……?
멍하니 보고 있자니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내민 티켓을 휙 가져가시더니 슥 보셨다. 낮은 웃음소리가 목소리에 섞인다.
“중앙음악학교 자선 연주회라 해도 무방하겠던데.”
“그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어요.”
티켓엔 3인의 피아노 연주자로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학교에서 하는 학생들의 자선 연주회로 보일 정도였다.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티켓을 내게 돌려주며 물었다.
“에르네스트에게 듣자하니 원래 렌스키와 협연하기로 했었다던데.”
난 그동안 다른 음악가들과 협연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트러블이 생겨서 잘못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문제가 생겼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 점에 흥미가 있으신 듯 보인다.
“음악적 견해로 다투기라도 한 게냐?”
트러블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하지 않으신다. 개성 강한 연주자들이 모이면 문제가 생기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다만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음악회를 저울에 두고 경중을 따져 보았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 난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난 렌스키가 의욕 없이 리허설에 임했던 일 등을 이야기하고 결국 참지 못한 아나스타샤가 대결을 하자 했는데 그것마저 회피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주관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팍 쓰시더니 차를 한 입에 들이켜고는 말씀하셨다.
“예전에 봤을 땐 그렇게까지 건방을 떠는 놈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못 본 사이 잘못 배운 모양이군.”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자신이 아는 연주자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에 분개해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셨다.
“너무 신경 쓰진 마라. 세상엔 별 놈이 다 있기 마련이니까. 제 발로 나간 걸 보니 최소한의 정신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신경 쓰이진 않아요.”
다시 한 번 나는 내 말로 생각을 옭아매었다.
프로 연주자라 생각한 렌스키가 보인 행동에 충격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리했던 간에 상관없었다.
다만, 그가 이번 연주회를 가볍게 생각하고 나가 버린 것에 대해서 음악으로 우리 대답을 돌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내 표정을 본 구세프 선생님은 잡담을 더 나눌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셨다.
“좋다…… 그럼 한번 보여 봐라.”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바로 피아노로 가서 건반 덮개를 열고, 손끝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이미 익숙한 피아노였다. 무게를 느껴 볼 필요는 없었다.
난 지체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
그동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피드백과 혼자 연구하여 쌓아올린 음악. 그 모든 결과물이 피아노를 통해 나온다.
지금까지 수많은 곡들을 연주했었지만, 선생님에게 레슨을 한 번도 받지 않고 준비해 온 첫 연주 중에선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곡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이 곡은 정밀하면서도 낭만적인 모양새를 잘 갖추고 있었다.
연주를 마치고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음형을 정리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드문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데.”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는 표정이다. 선생님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시더니 곧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해석의 짜임과 논리성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그냥 조금 더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나 봐 주도록 하마.”
그렇게 이어진 레슨은 정말 디테일한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혼자 연구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포인트들을 구세프 선생님은 정확하게 짚어 주셨다. 단지 짚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눈과 귀에 그 음표들이 들어온 순간, 이 곡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 결정되었다.
레슨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가볍게 칭찬해 주셨다.
“짧은 기간에 준비하는 것이지만, 잘하고 있구나.”
잘하고 있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한 마디는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선생님은 조금 더 편안하게 의자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네 친구들과 모여서 연습한다는 것 말인데…… 사실 그렇게 해서 나쁜 버릇이 들거나 잘못 방향을 잡는 경우도 많다. 알고 있느냐?”
좋은 의도에서 모여 함께 연습을 하더라도 늘 결과가 좋으리란 법은 없었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의견이 무분별하게 섞이면서 결과가 엉망진창이 되기도 하고, 학생의 식견으로 본 음악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다가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나 버리기도 한다. 난 그런 문제들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더더욱 할 말이 없군. 하긴, 곡도 써서 연주하는데 별 걱정이었나.”
에르네스트와 나는 음악가로서 협력한 적이 이미 많았다. 협연도 하고, 곡을 헌정받아 초연하기도 했다. 신예들이 협력한 일이었으니 잘못되려면 한참이나 잘못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함께 한 일들은 그때마다 결과가 좋았다.
그리고 이번엔 아나스타샤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더더욱 괜찮을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낮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희처럼 알아서 하는 녀석들만 있으면 편하련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덕분이지요.”
“그래, 그래.”
선생님은 시큰둥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기분 좋아 보이시는 게 눈에 보인다.
레슨은 끝났다. 구세프 선생님은 시계를 잠깐 보시고는 의자에서 일어나셨다.
“이번엔 더 가르칠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이만 가 봐라. 타티아나. 나도 약속이 있어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예. 감사합니다.”
“연주회는 가 보마. 미하일이 아쉬워하겠군.”
아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연주회에 오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연주회 당일인 오늘까지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평일 오전 11시에 하는 공연. 즉 마티네 공연에 아버지가 참가해 주길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을 미루고 자리를 비우신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일정에 모든 걸 다 맞추실 순 없었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몇 번이나 안심시켜 드린 후에야 아버지는 차에 올랐다. 정말 이러다가 갑자기 점심에 찾아오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혼자 남은 나는 잠시 연습실에 가서 스트레칭을 하며 상태를 살폈다. 아프거나 문제가 있는 곳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다음은 피아노에 앉아서 가볍게 손을 푼다. 연습은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만 조성을 바꿔 가면서 빠르게 반복하는 것으로 아주 단순하고도 확실하게 끝마쳤다.
의상은 홀에 가서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더 이상 준비할 건 없었다.
차에 오르고 나니 양손이 조금 허전했다. 어디 가볍게 소풍을 가는 사람도 나보단 더 많이 준비했을 것 같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몸만 움직이면 된다. 자기 악기가 없는 피아노 연주자들에겐 이런 게 장점이면서, 한편으론 조금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바이올린 연주자처럼 자기 악기를 가지고 다닌다면 양손이 비는 일 없이 바이올린을 안고 있으면 될 텐데.
하지만 언제나 악기가 바뀌는 연주자의 길을 택한 이상 별수 없는 일이다. 난 지난번에 홀 리허설을 하면서 만져 보았던 피아노의 감촉을 떠올렸다. 꽤 괜찮았었는데, 오늘 그 피아노로 연주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아, 그래요.”
얼마 지나지 않아 빅토르가 날 불렀다. 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를 태우고 갈 생각이었는데, 두 사람은 내가 너무 돌아가는 것 같다면서 중간에 가는 길에 미리 만나 있겠다고 했다. 그 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오는지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난 내려서 직접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빅토르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전한 뒤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날 먼저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반겼다.
“왔어?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에르네스트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차피 그는 컨디션 관리를 언제나 최고로 잘 하니까 걱정은 안 된다. 그래도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도요. 오늘 어떠시나요?”
에르네스트는 짧게 웃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가서 보여 줄게.”
그의 자신감에 넘치는 말은 듣는 사람을 하여금 안도하게 하는 영향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