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43화 (543/1,277)

##  543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 리무진에 올랐다.

“실례합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곧 소로킨이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난 오늘 같이 무대에 서게 될 친구들을 새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나처럼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건 홀의 의상실에서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미리 집에서 준비한 턱시도 차림이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특별히 튀지 않고 깔끔하다. 오로지 연주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에 충실한 모습이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만…… 앞으로 무대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다. 난 에르네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덥지 않나요?”

그는 손을 들어 목을 만져 보더니 마치 의사에게 문진을 받은 사람처럼 진지하게 대답했다.

“괜찮은 것 같아. 왜?”

“저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넥타이 정도는 풀고 계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풀으라고?”

에르네스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더니, 목 부근에 가 있던 손으로 넥타이를 잡았다. 그 자리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손짓이었다. 그러더니 넥타이를 풀기는커녕 보란 듯이 다시 똑바로 정돈하며 조였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싫은데.”

“……?”

조금은 시니컬하기도 하고, 장난스러움이 섞이기도 한 목소리였다.

난 그가 무대에 서기 전에 준비하는 무언가에 간섭한 게 아닌가 싶어 약간 조심스러워졌다. 내 딴엔 좋은 의도였지만, 그가 받아들이기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눈빛을 보더니 조금 더 풀어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난 이게 편해.”

“그런가요……. 그럼 에어컨이라도 조금 더 세게 틀까요?”

“그럼 너희가 춥잖아. 됐어. 감기 걸려.”

그는 손을 젓더니 이렇게 차에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듯 좌석에 편히 기대었다.

난 그가 이미 준비를 다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옆에서 신경 쓰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수십 번이나 무대를 거쳐 온 전문가였으니까. 에어컨 바람까지도 세심하게 신경 쓰는 걸 보면 나야말로 그의 걱정을 안 사도록 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상상도 못 한 엉뚱한 의견을 냈다.

“사실 넥타이 다시 맬 줄 모르는 거 아니니?”

그럴 리가요?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를 돌아볼 수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며 항변했다.

“……어이없는 소리 할래? 내가 혼자 넥타이 매기 시작한 게 10년은 넘었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짓말은 하지 말자 우리. 10년 전이면 여섯 살 때거든?”

“그래, 그때 했었다니까?”

“에이.”

아나스타샤가 놀리듯이 에르네스트를 더 도발했다. 괜한 장난을 더 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더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급격히 피곤해진 표정을 하고는 저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콘서트홀까지 향하는 동안 쭉 가벼운 농담 등이 오갔다. 연주회를 위해 홀로 가는 게 아니라 어딘가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진지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연주자라는 역할에 익숙하기에, 가슴 언저리에 있는 불필요한 긴장감을 떨쳐 버리고 한마음으로 제대로 무대에 임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거의 다 왔네요.”

그렇게 1시간 남짓 달려 우리는 모스크바 북동쪽의 이즈마일로브스키 구에 다다랐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재래시장이 보였다. 마치 놀이공원처럼 알록달록하고 높다란 건물들이 빼곡하다.

시장을 스쳐 지나고, 작은 연못을 하나 지나면 곧 목적지였다.

“…….”

이즈마일로보 콘서트홀izmailovo concert hall.

네모반듯한 건물에 양각으로 그림을 새긴 벽면은 시간을 뛰어넘은 그리스 시대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1980년 올림픽 개최지로 모스크바가 선정된 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여 짓게 된 세련되고 예술적인 건물이었다.

클래식 공연만을 위해 지어진 홀이 아니다 보니 다양한 음향적 효과를 위해 첨단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메인 홀의 규모는 920석이나 된다.

사실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 여름 무료 공연으로 처음 기획했을 때 잡아 놓았던 홀은 아니었다. 이후에 내가 참여하기로 하고, 또 렌스키를 초빙하면서 저절로 홀의 크기도 이 정도나 되는 크기로 키워 놓았던 것이다.

어제 마지막 리허설을 했을 땐 약간 긴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서는 무대가 아니다. 내 옆엔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도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빅토르가 우릴 죽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그가 조금 걱정하는 것 같다는 게 느껴진다.

“좋은 무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가씨.”

빅토르는 잠시 주저하더니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덧붙였다.

“유리 님이나 루슬란 님께서 오실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녜요. 괜찮아요.”

아버지에게도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확고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빅토르와 소로킨, 자하르와 짧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모두들.”

빅토르는 그제야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지금부턴 내가 모르는 곳에서 경호 임무에 임하겠지. 난 언제나처럼 그들이 지켜봐 줄 것이라 생각하며 콘서트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커다란 로비를 지나, 관계자들만이 이용하는 복도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곧바로 우리를 알아보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대기실엔 이미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콘서트 매니저인 발레리가 서 있었다.

발레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바쁘게 지시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찍 오셨군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바쁘시네요. 발레리.”

“하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발레리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자신의 이야기는 가볍게 넘겨 버리곤 우리 쪽으로 화두를 돌렸다.

“컨디션은 모두 좋아 보이는군요.”

“덕분에요.”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저번에 여쭈었을 땐 특별히 말씀하신 바 없지만 지금이라도 무엇이든 좋습니다.”

연주자들 중엔 루틴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중엔 종종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연주자들도 있었다.

특별한 레시피로 차를 준비해 달라는 것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고, 대기실의 커튼 색부터 화병의 꽃까지 디테일하게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난 피아노만 멀쩡하다면 나머진 아무래도 상관없는 삭막한 사람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두 분은요? 필요하신 것 있으시나요?”

옆을 돌아보니 둘 모두 고개를 저었다.

“없어.”

“나도 별로.”

우리는 원래부터 무대에 앞서서 필요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발레리는 그래도 무엇이라도 하나 더 해 주려고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혹시 식사를 안 하셨다면 가볍게 드실 것이라도 준비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연주 전엔 잘 안 먹는 편이라.”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거절했다. 발레리는 턱시도 차림의 에르네스트의 태도에 조금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준비가 완벽하시군요. 바로 무대에 올라가셔도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는 제대로 준비되었는지 보고 싶네요.”

“예? 아, 알겠습니다.”

어제 리허설을 하면서 충분히 확인했지만, 그건 어제의 일이니 오늘은 어떨지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직접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어 했다. 스테이지 매니저에게 믿고 맡길 일이지만 본인이 직접 하나하나 확인하는 건 에르네스트를 믿음직스럽게 보이게 했다.

그렇게 발레리가 곧장 스테이지 매니저를 불러 주었고, 에르네스트는 그를 따라 피아노 준비실로 향했다.

남은 아나스타샤와 날 바라보며 발레리가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리허설을 하기 전에 의상을 입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미묘한 차이가 연주의 퀄리티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최종 리허설은 드레스를 입고 하는 편이 나았다. 난 이견 없이 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은 드레스룸으로 모시도록 하죠.”

드레스룸의 위치는 그리 멀지도 않았고,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기에 나와 아나스타샤만 가도 될 일이지만 발레리는 굳이 나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는 복도를 잠시 걷다가 문득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예?”

걷다 말고 무슨 말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발레리가 마침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 상황들에 대해 내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낮은 어조로 그가 말했다.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이렇게 연주회가 잘 준비된 건 모두 타티아나 덕분입니다.”

사실 이 연주회 자체가 원래는 취소되었어야 할 연주회였다. 그 후에도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었고.

그의 말처럼 내가 이 연주회를 붙잡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열릴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발레리가 말하는 것과 반대로 나 때문에 제대로 안 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똑같은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난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난 언제나 연주회를 위해 최선의 선택만을 골라 왔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를 증명할 시간이 머잖았다.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와 연습도 정말 많이 해 왔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준비에서 마무리를 짓기까지 빠짐없이 확실하게 매듭을 지을 생각이다.

난 발레리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전부 내 덕분이라 하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선택을 관철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연주회를 할 수 있었던 건 발레리가 날 믿고 지지해 준 덕분이기도 하다.

“감사한 말씀이에요. 발레리께서 절 믿어 주신 덕분이지요.”

“하하, 하하하.”

발레리는 말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와 나 사이엔 신뢰가 이어져 있었다.

드레스룸 앞에 도착했다. 발레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못 들어가겠군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시 후에 뵈어요. 발레리.”

“고마워요.”

나와 아나스타샤가 인사하자 발레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돌아섰다. 콘서트 매니저로서 연주자들을 케어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지금 굉장히 많겠지. 난 발레리가 잘 해 주리라 믿고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방 안엔 몇 개나 되는 거울과 직원으로 보이는 분들이 있었다.

이미 의자에 앉아서 헤어 스타일링을 받고 있는 분도 있었는데, 얼굴이 굉장히 익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반가움이 교차한다.

“타티아나! 오랜만이야!”

그녀가 스타일링을 받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스타일리스트가 깜짝 놀랐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그녀는 우리 음악회의 사회를 맡아 주겠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곳까지 달려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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