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44화 (544/1,277)

##  544화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했었던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또렷한 선율로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최고의 음악가 집단과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음악이었다. 그 집단의 지휘자인 스타니슬라프, 그리고 악장인 크리스티나. 두 사람은 내게 있어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내가 사회라는 건 알고 있었니?”

“예, 어제 들었어요.”

막연히 언젠가 다른 곳에서 만나 함께 음악을 연주할 것이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리허설을 마치고 난 뒤 발레리가 우리 연주회에 사회자가 한 분 지원하셔서 섭외되었다며 전해 주었다.

우리는 사회자 없이 그냥 우리들끼리 진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발레리의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지만, 크리스티나란 이름엔 안심할 수 있었다.

난 크리스티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이야기하기 쉽도록 스타일리스트는 아예 크리스티나의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크리스티나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놀라게 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이미 들었구나.”

“충분히 놀랐어요. 크리스티나.”

“아하하하, 미안.”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사과해 왔다.

난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온 크리스티나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미안한 감정이 있기도 했다. 약간 후회하는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리 연락을 해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럴 틈이 없었지. 내가 이 연주회를 알고 사회라도 맡아 하겠다고 지원한 게 바로 어제였거든.”

“어제요……?”

“응. 그리고 바로 저녁 열차로 내려왔지.”

정말 어제 하루 만에 모든 게 순식간에 결정된 모양이다. 난 크리스티나의 행동력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야기했다.

“예전부터 난 메세나 협회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종종 듣곤 했거든. 가끔은 도와줄 일도 있고 해서.”

크리스티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에 소속을 두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메세나 협회에도 연주자로 이름을 올려 두고 있었다. 정말 다방면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연주자였다.

“그런데 모스크바 쪽에 익숙한 이름이 보이지 뭐야? 지지난주에 독주회를 한 뒤에 바로 또 연주회를 할 줄은 몰랐어. 난 학생 때 방학이면 그냥 놀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내게 사과했다.

“음, 독주회 땐 못 가서 미안해? 나도 시간이 있었으면 무조건 갔을 텐데.”

저번 독주회 때 스타니슬라프를 초대하면서 크리스티나에게도 혹시나 싶어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 스타니슬라프가 휴가로 야쿠츠크에서 쉬고 있었던 것처럼, 크리스티나와 다른 단원들도 각자 휴가를 받아서 마스터클래스나 해외 연주회 등의 개인 스케줄 등을 잡은 상태라 모스크바에 올 순 없었다.

난 너무 신경 쓰진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괜찮아요. 스타니슬라프가 오시기도 했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티나는 더더욱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타니슬라프가 그렇게 격찬을 하더라고. 은근히 혼자 보고 온 것에 대해 자랑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나요?”

“응. 나 참, 우리 지휘자가 그렇게 주책인 건 처음 봤다니까?”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다. 나 역시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근엄한 스타니슬라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선 크리스티나가 기겁할 만큼 자랑을 하셨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냥 크리스티나의 과장인 걸까?

멍하니 바라보니 크리스티나는 사소한 건 생각하지 말자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번엔 마침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바이올린은 못 켜더라도 사회라도 하겠다고 했지. 흔쾌히 허락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저희야말로…… 크리스티나가 사회를 해 주시겠다고 해서 영광이에요.”

“영광이라니, 말도 참. 오늘 열심히 할게.”

크리스티나는 별것 아닌 일처럼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한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다. 지휘자만큼이나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그 정도 되시는 분이 사회를 맡아 주신다는 건 대단한 호의라 할 수 있었다.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다.

물론, 그녀가 사회자를 하겠다고 자청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 큐시트랑 대본을 조금 읽어 보니까…… 재미있는 걸 기획에 넣었더라?”

크리스티나는 우리 연주회의 기획안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게 분명했다. 때문에 사회자가 있으면 연주회가 더 자연스러워지고 완성도도 높아질 거라 생각해서 그 역할을 맡아 준 것이다.

난 우리 기획을 꼼꼼하게 체크했을 그녀의 의견도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르네스트가 처음 제안한 이 기획은 사실 평범한 연주회에 넣을 만한 기획은 아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말했다.

“방금 이야기했잖아?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처럼 크리스티나가 눈을 빛냈다.

“예전부터 나도 생각은 해 봤었어. 그런데 절대 쉬울 것 같진 않더라고. 너희는 어떻게 해결해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곰곰이 말을 고르더니, 결국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신뢰에 찬 눈빛을 보내며 말을 맺었다.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

이러한 기대들이 쌓인다.

비단 기대만이 아니었다. 이젠 크리스티나가 사회자로 서게 되었으니 만약 우리 무대에 문제가 생긴다면 청중들 앞에 나가 이야기를 하고 수습을 할 사람 역시 그녀가 될 확률이 높았다. 상상만 해도 아찔해진다.

그러나 난 그런 것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크리스티나의 기대와 모두의 바람에 부응해야겠다는 고양감이 차오름을 느꼈다. 이러한 감정들은 나로 하여금 더더욱 무대 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곧 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많이 기다리셨죠. 스타일링 도와 드릴게요.”

“잘 부탁드려요.”

난 짧게 말하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연주자로 설 시간이다.

***

에르네스트는 홀 곳곳을 돌아다니며 피아노와 무대 설비 등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전문적인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아노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그리 잘 알진 못하지만, 그동안 여러 연주회를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익힌 노하우들이 많았다.

정말 사소한 것들도 무대의 디테일에 큰 영향을 끼친다. 에르네스트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역시 신경 써서 무대를 다듬는 것에 일조했다.

그렇게 1시간 남짓 돌아다니다가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니 리허설도 한 번 못 해 봤는데 피곤해졌다.

“……후.”

에르네스트는 의자에 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려고 손을 가져다 대다가, 의식적으로 그만두었다.

이 넥타이는 작년 이맘때부터 그의 마법이자 루틴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순간 덥다고 풀어 버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서, 더우면 그냥 풀어 버리고 있으라 말하기도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기 싫었다.

굳이 알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 서기 전까진 조금 편해도 된다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루틴에 아무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에르네스트는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내려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대기실은 시원해서 금방 더위가 가셨다.

“무대 확인은 끝났습니까? 어떻습니까? 에르네스트.”

잠시 앉아 있자 발레리가 와서 물었다. 연주자의 컨디션 확인인지 무대에 대한 확인인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양쪽 다 콘서트 매니저의 관할임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요.”

“이젠 저희만 잘하면 될 일이죠.”

연주자들이 마음껏 할 준비는 갖추어졌다. 이젠 오늘 무대에 설 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점점 무대가 다가오는 걸 느끼며 손목을 살짝 스트레칭했다.

발레리는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번 리허설을 보면서 느꼈는데…… 그냥 걱정 자체가 안 들더군요. 하하, 조금 재밌었습니다.”

“재미요?”

“정말 베테랑 연주자들의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노심초사하는 일이 많은데, 이번엔 전혀 그런 기분이 안 든다는 게 제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

발레리가 말하는 베테랑 연주자란 기준에 자신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살짝 발끈할 뻔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 온 커리어가 아무리 많아도 열여섯 살은 베테랑이라는 말을 듣기엔 이르다.

그리고 발레리는 그를 무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굉장한 칭찬이자 믿음의 표시였다.

에르네스트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에르네스트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분명히 있으신 것 같군요.”

“아뇨, 저 말고.”

직접 무대에 설 때 느끼는 자신감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연주에 대해 긴장이 아닌 기대만을 느낀다는 말을 듣고 떠올린 건 딱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기실 문이 열리며 드레스 차림의 두 사람이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리며 정지했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둘 다 소매가 없고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색깔만이 달라서 타티아나는 연보라색, 아나스타샤는 자주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매 연주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리를 땋아 내린 타티아나는 일주일 내내 봤던 모습과 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그녀의 태도에 깃들어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러나 곧 다가온 그녀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자 금방 친숙한 미소가 돋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할 수 있었다.

“별로……. 그동안 무대 확인하고 있었어.”

“앗, 계속요?”

타티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작게 말했다.

“저도 같이 했어야 하는 일인데, 미안해요. 혼자 하시게 둬 버렸네요.”

“……괜찮아.”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이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타티아나가 바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런 것보다…….”

에르네스트는 연보라빛으로 휩싸인 타티아나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처음엔 할 말을 잃었지만, 지금은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미처 형언하지 못한 감정들이 음표로 화하여 머릿속을 휘젓는다.

하지만 지금 마음속에 있는 감상을 그대로 드러내면 그녀가 놀랄 것 같다. 그냥 한 번쯤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앞섰다.

“그 색이랑 잘 어울린다. 타티아나.”

결국 말할 수 있었던 건 구태의연한 칭찬이었다.

조금 더 나은 말을 해 줄 수는 없었나? 곧바로 후회가 들 정도로 흔해 빠진 말이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말에도 기뻐하며 웃어 주었다.

“에르네스트도 오늘 정말 멋지세요.”

흔한 칭찬이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질 수 있구나.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단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색하게 시선을 조금 피했다. 그런데 그런 에르네스트에게 따라붙듯,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그 넥타이도 저번부터 생각했던 건데, 에르네스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어?”

“왜 그러시나요?”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타티아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별로 관심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계속 같은 넥타이를 차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알고 있었냐고 묻는 눈으로 바라본들, 타티아나가 이해할 리 만무했다. 그녀는 작게 갸웃거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다 된 것 같은데…… 우리 이만 리허설 하러 갈까요?”

에르네스트는 지금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