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리허설룸으로 들어선 후부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가는 것은 그저 음악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제일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손을 풀었다. 온갖 연습곡들의 가장 어려운 부분들만을 추려서 섞어 놓은 복합 연습곡이었다.
발레리가 듣기에만 체르니와 쇼팽, 고도프스키, 바르톡 등이 들렸다. 본 템포만 맞춰도 기겁할 정도로 빠른 곡들인데, 아나스타샤는 그 모든 곡들을 더 빠르게 연주했다. 그녀가 손을 푼 시간은 겨우 3분 남짓. 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이 나가게 하는 3분이었다.
그다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맡은 곡을 연주했다.
모든 악장을 연주하진 않았다. 자신의 현 컨디션과 기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짤막한 한 마디만 정확하게 연주했다. 그녀는 스스로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이렇게 짧고 강렬한 리허설은 오랜만이었다. 스스로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나 오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간 해 온 음악에 대한 담담하고 건조한 확인일 뿐. 거기에 불필요한 불안이 없을 뿐이다.
그다음으로 타티아나 역시 아나스타샤와 비슷하게 스스로를 확인했다. 조금은 느긋하게 바흐와 쇼팽으로 손을 풀고, 한 곡을 짧게 연주했다.
발레리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타티아나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생각을 했다.
정말 실례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타티아나는 존재감이 없기는커녕 베르체노프의 영애로서 평소에도 경호원을 몇 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주요 인사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연보라 빛으로 음악에 따라 흐르는,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보였다.
“…….”
다음 순서는 에르네스트였다.
그는 저 세 사람 중 가장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값을 증명하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실력을 곧바로 드러냈다.
라흐마니노프 연습곡 한 곡, 그리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한 곡 한 곡. 그렇게 단 두 곡만으로 에르네스트는 이 리허설룸의 분위기 자체를 훨씬 위쪽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 그 위쪽이 어디인지 알 순 없지만, 음악의 신이 있다면 아마 그곳에 기거하고 있으리라.
발레리는 세 천재의 리허설을 모두 지켜보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아도 열여섯 살 학생 연주자들의 리허설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의 실력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믿음. 그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발레리는 지난 며칠 동안 몇 번 봐 왔던 광경을 다시 보면서도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고 지켜보았다. 콘서트 매니저로서 할 일이 있었지만, 한 순간도 이 리허설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할까요.”
“좋아.”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마티네 연주회의 마지막 리허설은 1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멍하니 있던 발레리는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타티아나가 의자에 앉아 있던 발레리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발레리?”
“아, 예. 타티아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타티아나는 곧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허설은 문제없어요. 대기실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죠.”
세 사람의 리허설이 너무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어서 넋을 놓고 있었다고 말하면 되었을 텐데, 발레리는 뒤돌아 나가는 타티아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흘러서야 발레리는 일어섰다. 일단 잠깐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도 쐬고, 마지막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운 다음에 마저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연주회 시작 40분 전. 이미 로비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인터넷으로 티켓을 구한 사람들은 벽 쪽에 서 있거나 돌아다니고, 현장에서 티켓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있다.
아무리 무료 연주회라도 청중들의 시간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평일 낮에 열리는 학생 후원 연주자들의 연주회는 920석이나 되는 좌석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로비의 상황을 한 번 살핀 발레리는 테라스로 나갔다.
버릇처럼 주머니 안의 담배를 꺼내며 난간으로 향하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 체형이나 옆모습이 굉장히 낯익었다.
“…….”
혹시나 싶어 발레리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셔츠와 면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에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발레리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왔습니까? 렌스키.”
마스크를 쓴 렌스키가 고개를 돌려 발레리를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눈빛으로 인사도 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 좋아서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니라는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담배를 한 대 꺼내며 다시 렌스키에게 물었다.
“마스크는 왜 썼습니까?”
“…….”
렌스키는 힐끗 주변을 살피더니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갈 생각이에요. 상관없죠?”
“상관없습니다.”
“…….”
발레리가 눈길도 주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자 렌스키의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왜 초대한 겁니까? 얌전히 있으라 할 땐 언제고.”
렌스키는 지금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실 연주회를 위해 후원 연주자들을 모으다 보면 미팅을 하다가 어느 한쪽이 그만두고 무산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리고 연주자 개개인들은 메세나 협회에서 강하게 구속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타티아나는 협회장은 물론이고 수많은 관계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연주자였고, 때문에 딱히 특별대우를 받진 않더라도 그녀를 함부로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타티아나는 굉장히 협조적이고 성실한 연주자였다. 그러한 성격에 뛰어난 실력까지 더해지니 흠잡을 곳이 아예 없었다. 겨우 몇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발레리는 협회의 거의 전부가 타티아나의 편이나 다름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렌스키는 자신만의 독선적인 어떠한 이유 때문에 타티아나와 협조하지 않고 빠져나와 버렸다.
그 행동은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렌스키는 협회의 강력한 항의로 후원기업인 카즈호프 인터내셔널로부터 경고를 받아 현재 근신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연주자 개인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혼자선 무언가 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렌스키는 당분간은 연주회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상태였다.
하지만 보는 건 가능했다. 발레리가 말했다.
“연주회는 봤으면 해서 말입니다.”
“……이 연주회 박차고 나간 게 누군지 잊었습니까? 제 얼굴 봐서 좋아할 사람 지금 아무도 없을 텐데.”
렌스키도 스스로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지 않았다. 딱히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이 상황 자체가 그리 현명하지 못하다는 걸 설명하는 것처럼, 렌스키는 시니컬하게 발레리를 설득하려 했다.
“발레리. 무슨 이유로 결정했는진 모르겠지만 제가 예의상 온 걸로 만족해 주시죠. 그냥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차라리…….”
“제 독단이 아닙니다. 렌스키.”
“아, 물론 아니겠죠. 절 못마땅하게 여길 분들은 많…….”
“타티아나가 요청했습니다. 당신이 연주회를 보게 해 달라고.”
“……뭐라고요?”
발레리의 말에 렌스키가 처음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당함과 놀라움이 뒤섞여 그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에 의지하여 침묵하고 있지만, 눈빛만 보더라도 당황해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전해져 온다. 그런 렌스키를 보며 발레리는 담배를 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렌스키의 속내를 정확히 알진 못한다. 주연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만한 성격이나 자만심도 분명히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쟁취해 낸 그가 어째서 타티아나와 이렇게 극단적으로 거리를 두려 하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와닿는 부분도 있었다.
분명히 사람에 따라선 이 모든 것이 일종의 기회라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렌스키는 그렇지 않았다. 저울에 달아 놓은 현실적인 실리보다 한순간 발작처럼 찾아든 충동을 우선시했다.
그 부분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너무 심한 일이었으므로 발레리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차라리 미안함을 아예 느끼지 못하고 뻔뻔하게 굴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렌스키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렌스키는 간신히 이전처럼 시니컬한 태도를 되찾곤 입을 열었다.
“분명 저한테 끔찍하게 실망해서 앞으론 마주하려 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요.”
“마주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발레리는 렌스키도 타티아나도 딱하게 생각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느 사람이 잘못했는지는 분명히 하고 있었다.
미처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거칠게 꺾어 버리고, 발레리는 차갑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당신과 마주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려 했죠. 하지만 전혀 듣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마주할 생각을 없을 겁니다.”
“그럼 뭡니까 이건?”
“대신 연주회라면 어쩔 수 없이 듣게 될 테니까.”
타티아나는 섬세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약하거나 상냥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전에도 분명히 보여 준 바 있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가 말하더군요. 당신이 깔본 연주회와 무시한 청중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주겠다고.”
“…….”
“이번엔 도망치지 마십시오. 렌스키.”
그는 아나스타샤를 빌미로 삼아 멋대로 그녀들이 준비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면, 오늘 이대로 사라져 버릴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렌스키는 조용히 발레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발레리는 그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했다.
***
연주회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다.
컨트롤 룸에 있는 홀 관계자들은 모두 자신의 맡은 일에 집중했다. 안내방송을 내보내 사람들을 입장시키고, 좌석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조명을 조정한다. 청중석 쪽에선 어셔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중들은 안내하고 있었다.
9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착석시키기 위해선 수십 명의 인원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공연 시작까지 2분. 다시 한 번 방송으로 확인시키고 연주자 분들에게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스테이지 매니저가 동시에 몇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발레리는 뒤편에서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 이젠 모든 건 현장의 손으로 넘어갔다. 잘 되길 지켜보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미묘한 긴장감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여느 때처럼 연주회의 흥망에 대한 걱정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이 아니었다. 앞으로 보게 될 것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
연주자 대기실을 비추는 카메라를 보니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팽팽한 무언가가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 무대에서 그들을 찾는다면 곧바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5초 전입니다. 사회자님, 무대 위로.”
그리고 그 도화선이 되어 줄 사회자, 크리스티나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올라섰다.
삭막한 무대 위에 푸른 드레스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곧 청중들은 조용해졌다. 곧 연주회가 시작된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자연스럽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단상에 서서는, 가볍게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신가요? 따뜻한 바람이 온 세상에 가득한 멋진 날입니다. 이런 좋은 날 저희 연주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라합니다.”
훈훈한 웃음과 박수가 와르르 터져 나왔다가 다시 거두어진다. 모두 준비되어 있는 청중들이었다.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마티네 연주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