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46화 (546/1,277)

##  546화

자리에 착석한 레베제프는 스마트폰을 끄고 팸플릿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바우만 국립 공과대학의 학생이었다.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대해선 상식 정도의 지식밖에 없었고 평소에도 그리 큰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레베제프가 이 연주회에 온 것은 무료였던 데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티켓팅이 운 좋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주회가 열리는 오전에 강의가 없음도 한몫했다. 여러 행운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연주회를 와 본 게 얼마나 되었던가? 몇 년은 되었던 것 같다. 레베제프는 공대생으로서 그동안 학과 공부에 집중하느라 문화생활을 하나도 영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다는 마음도 약간 드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연주회를 하는 세 명 모두 커리어가 어마어마한 수재들이었지만 그 대단함이 직접 피부에 와닿진 않았다.

커리어로만 치자면 에르네스트라는 연주자가 제일 대단했지만, 레베제프가 가장 놀란 건 연주자 중 한 명이 베르체노바라는 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 정도였다.

사실 그가 지하철을 타는 수고를 감수하고 연주회에 온 데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를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시작하나?’

무대 위로 올라온 사회자 크리스티나가 이런저런 인사말을 이어 나갔다.

레베제프는 다른 데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지 대본도 보지 않고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회를 보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에 조금 감탄했을 뿐이었다.

대학교에서 여러 발표들을 해 본 레베제프는 저런 발표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자니, 크리스티나가 슬슬 서론을 끝마쳤다.

“오늘 여러분 모두 행복한 2시간이 될 수 있도록 세 명의 연주자가 열심히 준비했으니, 부디 잘 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대 옆쪽에서 세 명의 사람이 걸어 나왔다.

엄청난 박수 소리가 레베제프의 손도 거의 강제로 들어올렸다. 그는 멍하니 박수를 치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베제프는 팸플릿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왼쪽에 서 있는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분명 에르네스트라는 연주자겠지. 홀에 들어오기 전에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에르네스트는 러시아 클래식계에선 천재 중의 천재로 이름이 높은 연주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줏빛 드레스의 여자.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이었다. 키가 큰 그녀는 멀리서 봐도 그 에너지와 존재감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마지막으론 세 명 중 가장 작은 타티아나가 남아 있었다.

레베제프는 타티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베르체노프라는 어마어마한 이름값 때문이 아니었다. 연보라빛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작고 여리여리해 보이는데도, 쉽게 볼 수가 없다.

‘셋 다 열여섯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참 어린 중앙음악학교의 학생들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모르겠다. 포멀한 의상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기대할 거리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베제프는 이어질 연주를 기다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기묘했다.

“……?”

원래대로라면 저 중에 연주를 할 사람만 남고 나머진 들어가야 한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가 피아노와 연주자만을 밝히는 것으로 홀 안의 모든 집중도를 끌어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연주가 시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조명도 아직 환했고, 세 명은 인사만 묵례로 꾸벅하더니 옆에 준비된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자, 크리스티나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그러면 본 프로그램에 들어가기에 앞서, 첫 번째 특별한 기획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프로그램북 가장 상단에 특별 기획이라고 20분의 시간이 배정되어 있긴 했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냥 적혀 있어서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부분이었다.

그리 특별할 게 있을까 싶다. 어차피 고지식할 클래식 연주회고, 그렇다면 이벤트라고 해 봐야 한계가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첫 마디는 태평하게 있던 레베제프의 평정을 산산이 깨뜨렸다.

“굉장히 간단하고 재미있는 이벤트입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추첨을 통해 뽑히신 한 분이 저희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연주를 하게 될 텐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수선스럽게 변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지만, 당혹스러움이 얽히고 뭉치기 시작했다.

레베제프 역시 그 분위기에 한몫 거들었다.

특별 기획이라고 하길래 그냥 특별한 연주 같은 걸 하나 했더니, 갑자기 추첨은 뭐고 같이 연주는 뭔지 모르겠다.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적어도 레베제프는 아니었다. 그는 살아생전 건반을 만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는 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 역시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한 번도 쳐 보지 않은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분들도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고려해서 만들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대체 어떻게 걱정하지 말란 거야?

관객 참여형 공연 같은 것들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관객을 피아노 앞에 앉히려고 하는 공연은 처음 들어본다.

무료 연주회이니 뭘 한들 넘어가 줄 생각이긴 하지만,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러나 920명 모두가 혼돈에 빠진 것을 보고도 크리스티나는 당황해하지 않았다. 딱 부러지는 태도로 그녀는 사회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잘 들어 주세요.”

일단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사람은 크리스티나뿐이었다. 레베제프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크리스티나는 단상 아래에서 두 개의 투명한 아크릴 상자를 꺼내어 올렸다. 그 상자 안엔 종이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여기 미리 숫자와 알파벳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각각 하나씩 뽑아서 조합하면 랜덤한 추첨이 가능하죠.”

크리스티나는 양쪽에서 하나씩 뽑는 시늉을 하고는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추첨되신 분은 이번 내기에 참여할 수 있으시게 됩니다.”

내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레베제프는 이제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기획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클래식 연주회에서 할 만한 이벤트는 아니었다.

“어떤 내기인지 궁금하신가요?”

크리스티나는 팔을 펼치며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오도카니 앉아 있는 세 명의 피아니스트와 검은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합니다. 저희 피아니스트와 번갈아 피아노를 치면서 즉흥곡을 이어 나가는 내기입니다. 먼저 박자를 놓치거나 포기하는 쪽이 당연히 내기에서 지게 되겠죠?”

“…….”

“참고로 피아니스트에게 이기신 분들에게 드리기 위해 소정의 상품도 준비해 두었답니다.”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레베제프는 어이가 없어졌다.

놀리는 건가? 어떻게 이기라고.

연주에 대해 잘 모르는 레베제프도 즉흥 연주가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와 즉흥 연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라고? 그건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추첨으로 뽑혀 나간 사람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연히, 이 흉흉한 반응을 크리스티나가 예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물론 이 규칙은 절대 공정하지 않죠. 그래서 양쪽의 조건은 똑같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피아노 위쪽에 메트로놈을 가져다 놓았다. 그녀가 무게 추를 설정하고 전원을 켜자 쇠막대가 좌우로 까딱까딱하면서 박자를 맞춘다.

“여기 박자를 맞추기 쉽게 느릿하게 움직이는 메트로놈을 세팅해 두었습니다. 그럼 추첨되신 분께선 이 메트로놈에 맞춰 건반을 하나만 누르시면 됩니다.”

“?”

하나?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피아노 건반을 꾹 누르면서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 있는 88개의 건반 중 그냥 아무 건반이나 하나만. 이렇게 말이죠.”

보이는 그대로였다. 그냥 건반 하나만을 누른다. 그게 전부였다.

크리스티나가 이어 말했다.

“메트로놈이 다음 박자로 움직이는 사이, 저희 피아니스트가 그 하나의 음에 이어 즉흥으로 음악을 만들어 넣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박자가 되돌아오면 추첨자께서 다시 건반 하나를 누르시면 되겠죠?”

크리스티나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메트로놈의 쇠막대가 느릿하게 까딱거릴 때마다 건반을 하나씩 누른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분명 즉흥적이었지만, 그건 어떠한 음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저 음에다가 음악을 이어 붙여야 한다고?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레베제프는 이 이벤트의 요지를 파악했다.

저기 있는 세 명이 아무리 천재라도 이런 방식이라면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음들을 즉흥적으로 이어 나가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건반 하나만 누르면 되는 청중이 누를 건반을 찾지 못해서 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청중에게 유리한 조건과 상품이 걸린 내기. 따라서 이건 그냥 추첨으로 뽑힌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벤트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 혼란스러웠던 게 조금 줄어들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조금 진정되었다. 크리스티나가 모두에게 물었다.

“공정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제야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지 곳곳에서 해 보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추첨만 되면 상품은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아크릴 상자에 손을 넣었다. 잠시 종이를 뒤적거리곤 한 장씩 뽑아낸다.

“알파벳은 F…… 숫자는 27이 나왔습니다. 중간쯤 좌석이군요.”

모두의 시선이 F27좌석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추첨에 걸린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냥 나가서 아무렇게나 하면 되는 이벤트라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크리스티나도 별말 없이 종이 조각들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고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 추첨으로 가 볼까요?”

다음으로 뽑힌 건 앞자리에 앉은 남자였다.

그는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한달음에 무대 위로 휙 뛰어 올라갔다.

“자, 어느 피아니스트와 즉흥 연주를 해 보고 싶으신가요?”

연주자도 자유로 고르는 거였어?

남자는 가만히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더니 조금 난감해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웃으며 무어라 말하자 고민 끝에 아나스타샤를 선택했다.

아나스타샤와 추첨으로 뽑힌 남자가 각각 피아노 앞에 앉았다.

크리스티나가 메트로놈을 세팅하면서 다시 어떤 방식으로 하면 되는지 상세히 남자에게 설명해 주었다. 심지어 연습도 조금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박자에 맞추어서 남자는 쉽게 건반을 눌렀다.

몇 번 해 보니 자신이 붙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고, 곧 메트로놈의 막대가 기울어졌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연주는 쉽게 끝나 버렸다.

‘뭐야……?’

남자가 건반을 하나 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음악을 휘둘러 버렸다.

처음엔 음악이라고 할 수 없었던 단순한 하나의 음이 그것을 이어받은 아나스타샤의 손에서 완벽한 음악으로 이어졌다.

그 광경은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무대에 올라 있는 남자에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음이 분명했다.

너무 당황한 그는 두 번째 박자가 왔을 때도 미처 건반 하나를 누르지 못했다.

그대로 첫 번째 내기는 끝나 버렸다.

“정말 아쉽게 되었네요. 당황하셨나요?”

“……아.”

거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남자가 고개를 돌렸고,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레베제프는 이 이벤트가 그냥 상품을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일 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갈아엎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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