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화
다음으로도 추첨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벌써 세 명째였다.
하지만 그 모두가 한 번도 상품을 타 가지 못했다. 조금은 이어 나가더라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박자를 놓치고 건반을 누르지 못해 손가락으로 허공을 헤맸다.
너무 쉬운 조건. 그냥 건반을 규칙적으로 하나씩 아무렇게나 누르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레베제프는 박자 감각에 딱히 자신이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짜고 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리스티나는 분명 랜덤하게 추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리 협조를 구해 놓은 사람들만 무대에 올라올 수 있도록 수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A와 11이군요. 나와 주실 수 있나요?”
하지만 그런 의심을 품자마자 레베제프는 크리스티나의 추첨에 뽑히고 말았다.
“…….”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잘된 일이다.
무대 앞으로 나가면서 주변을 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매서웠다. 그냥 건반을 하나씩 누르는 게 뭐 그리 어렵냐는 시선이다. 모두 비슷한 이유로 답답해하고 있었다.
레베제프는 그 시선에 굉장히 공감하고 있었으므로, 직접 답답함을 해소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만족해했다.
“자, 원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레베제프는 고민했다.
이젠 저기 앉아 있는 세 사람이 열여섯 살 학생 연주자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 정말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닌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그중 한 명을 꼽으라니, 쉽지 않은 일이다.
레베제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제 연주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이미 실력을 보여 준 바 있었다. 두 사람 다 무시무시했다.
타티아나도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이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가까이에서 이렇게 보니 어쩐지 다른 두 사람보단 상냥하게 할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곧장 피아노 앞에 가서 앉지 않고 레베조프에게 다가왔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레베조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타티아나가 말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
진짜 뭐 잘못했나? 갑자기 이름은 왜 물어보는 거야? 무섭게.
평범한 질문이었으니 평범하게 답하면 될 일이지만, 타티아나의 뒤에 있는 베르체노바라는 성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레베조프는 순간적으로 가명을 댈까 고민하다가, 그래 봐야 소용없을 거란 걸 깨닫곤 조용히 답변했다.
“레베제프라고 하는데요…….”
“레베제프. 정말 고마워요.”
“……예?”
왜 자기를 골랐냐고 따져 물어볼지도 모른다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상상외의 이야기를 했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녀가 싱긋 웃었다.
“연주를 도와 달라 하셨잖아요?”
그냥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타티아나는 거기에 감격한 사람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레베조프는 당혹스러워져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후후,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즐거운 목소리로 웃더니, 고개를 흔들고는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겼다.
“최선을 다할게요.”
레베제프는 그 최선이 내기 상대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가 아닌 것 같다는 걸 느꼈다.
크리스티나가 레베제프를 안내했다. 그는 생전 처음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멀리서 봐도 거대했던 피아노는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어떻게 만져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컸다.
이만한 걸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거야?
시작하기도 전부터 조금 부담감을 느꼈지만, 레베제프는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해야 할 일은 전혀 어렵지 않다. 박자에 맞춰 건반 누르기. 네 살짜리 어린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성인인 레베제프가 실수할 순 없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메트로놈이 흔들리는 것에 맞추어 건반을 눌렀다. 계이름 같은 건 모른다. 그냥 눌렀다.
“……!”
그리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누른 음을 듣자마자 타티아나가 바로 이어서 청량한 음악을 선사했다.
거의 마법 같았다. 마치 레베제프가 무슨 음을 누를지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타티아나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음에 어울리는 음들을 잇고 쌓아서 음악을 이루고, 유려하게 펼쳐 냈다.
아나스타샤나 에르네스트가 했던 것 같은 강렬함은 옅었다. 레베제프는 타티아나가 많이 봐주고 있는 것 같단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화성학에 대해 배웠다면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음악에 잘 어울리는 다음 음을 누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레베제프는 그런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타티아나가 이어 연주하기 쉽도록 근처의 음을 눌렀다.
타티아나는 레베제프의 첫 음에 따라서 다채롭게 음악을 변화시켰다. 그의 음을 꾸밈음으로 삼아 휙 감아올리고는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따뜻한 음악으로 이어 나가기도 하고, 어떨 땐 경쾌하게 뛰노는 리듬으로 잇다가, 분위기를 확 바꾸어 엄숙한 발걸음을 내딛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몇 번 주고받으면서 레베제프는 막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고 누르는 건반이지만, 이것이 음악이 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레베제프는 타티아나가 자신의 이 단순한 행동이 연주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
다른 사람들보단 확실히 많이 이어 나간 것 같다. 레베제프는 익숙하게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추었고, 타티아나는 기가 막힐 정도의 실력으로 이 두서없는 음악에 완성도까지 기하려 하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고 유쾌한 경험이었지만, 언제까지고 이어 나갈 순 없었다. 레베제프는 조금 더 멀리 있는 건반을 쳤다.
갑자기 음악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재빠르게 수습했다. 레베제프가 만든 파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멀리 떨어져 있는 음을 갑자기 집어넣었다.
이번에도 타티아나는 동요하지 않고 음을 쭉 끌어 내리더니 음악 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음악의 느낌이 갑자기 달라졌다.
‘잠깐만…….’
이전까진 첫 음을 레베제프가 제시하고 타티아나가 그 뒤를 따르는 형식이었다. 그런 규칙으로 시작된 내기였으니까.
하지만 어느샌가 모든 것이 뒤집혀 있었다.
타티아나가 길을 열었다.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레베제프가 보기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음악의 길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길을 느끼면서도 레베제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지만 어떤 건반을 짚어야 저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점점 숨이 답답해져 온다. 레베제프는 메트로놈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몇 번이고 길에서 벗어났다. 타티아나는 싫증내지 않고 계속 뒤돌아보며 레베제프의 발자국을 확인하고, 다시 길을 제시한다.
정답을 알고 싶다. 어떤 건반을 쳐야 하는 건지 알고 싶다. 레베제프의 머릿속엔 어느새 그런 생각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십 개나 되는 건반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레베제프의 눈엔 피아노 건반이 마치 미로처럼 보였다. 그는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안타깝네요.”
크리스티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레베제프는 고개를 들었다.
결국 건반을 못 눌렀다. 최선의 음을 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레베제프의 손가락이 아무 건반이나 누르는 것을 억눌러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생각하면서도 직접 겪은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레베제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티아나도 일어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레베제프는 타티아나가 지금 무슨 말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즐거운 연주였어요. 타티아나.”
스스로 연주라 하자니 창피해질 정도로 형편없는 무언가였지만, 적어도 타티아나는 레베제프에게 직접 만든 우연에서 창조된 음악을 선물해 주고,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었을 터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정확했다.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즐거웠어요. 레베제프.”
앞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음악들이라면 반드시 찾아 들어 보겠다고 레베제프는 생각했다.
***
이 기획은 에르네스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우연성에 기초한 작곡 방법은 18세기 무렵부터 굉장히 널리 퍼져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리아토릭aleatorik이라는 작곡법인데,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눈에 따라 계이름을 정하거나 정해진 리듬을 골라 작곡을 이어 나가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작곡 기법을 애용한 작곡가들도 많았는데,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막시밀리안 스태들러나 바흐의 제자인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건 바로 모차르트였다. 음악의 주사위 놀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의 작곡 시스템은 현대의 우연성 음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주사위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우연성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난이도는 아득해질 정도로 높아졌다. 조성이 마구잡이로 바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무조음악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마디마다 각기 다른 주제를 바로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게 음악을 다룰 수 있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화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즉흥 음악에 대한 실력이 없다면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기획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우리에게 해 보자고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
그리고 연주회 시작에 배정된 그의 기획은 아주 성공적으로 홀 안의 분위기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우리에게서 상품을 얻어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반적인 이벤트였다면 적당히 추첨된 사람들에게 상품을 나누어 주는 정도로 끝냈겠지만, 우리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대충 할 정도로 쉽게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청중들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든 없든 모든 것을 떠나서 음악 자체를 즐기고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이다.
렌스키는 그럴 필요 없다고 우습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에게 반론하고 싶었다. 바로 이렇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으로.
“…….”
발레리에게 부탁해서 가능하다면 렌스키가 연주회에 오게 해 달라고 했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동의한 일이었다.
우리가 부탁한 대로 발레리가 해 주었다면 저 중 어딘가에 렌스키가 있겠지.
우리가 한 것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피아노 연주자로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저 그뿐이다.
“여기까지, 이만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시간에 딱 맞추어 크리스티나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청중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진귀한 것을 보았다는 듯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결국 상품을 아무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황당해하는 사람들.
우리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상대할 줄은 몰랐나 보다.
하지만 우리도 청중들에게 상품을 주고 싶지 않아서 진지하게 한 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다시 경쾌한 목소리로 연주회가 끝난 후 여기 있는 청중 모두에게 작은 선물이 있을 것이라 전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조금 흩어져 있던 모두의 집중력은 다시 무대 위로 돌아왔다.
난 그 모두의 시선에서 열기를 느꼈다. 겨우 20분 정도였지만 청중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기대감은 족히 열 배는 커져 있는 것 같았다.
제일 먼저 그 기대를 받아 내야 하는 건 아나스타샤였다. 난 그녀를 돌아보았다.
“…….”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무대 위라서 응원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순 없지만, 그저 미소가 오가는 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