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8화
셰드린 음악학교의 학생 마리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앙음악학교의 세 사람이 청중들을 무대 위로 불러서 보인 연주는 단순한 연주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그냥 즉흥연주를 하는 것은 많은 연습과 약간의 센스가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을 아무나 불러서는 대충 찍는 음을 따라 즉흥연주를 하는 건 기술이나 예술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직접 보고도 뭘 어떻게 해낸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보고도 잘 모르겠다는 기분은 마리나를 깜깜한 경악으로 몰고 갔다.
그간 학교에선 저런 걸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마리나는 지금까지의 상식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에 정통한 신 같은 존재나 할 수 있는 일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세 사람은 신이 아니라 학생일 뿐이었다.
‘말도 안 돼…….’
티켓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 그냥 방학 동안 할 일도 없고, 가까운 곳에서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 무료 연주회를 한다기에 좋은 기회라 여겼을 뿐이다.
음악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는 모스크바에만 300곳이 넘는다. 모두 굉장히 수준 높은 학교라 어느 곳이라도 우열을 딱히 가릴 수 없고, 마리나가 다니는 셰드린 음악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앙음악학교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학교였다. 그 누구라도 중앙음악학교가 모스크바의 탑이자 러시아 최고 수준의 학교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그건 마리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그곳의 학생들이 하는 연주회라면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의 이름은 이미 상당히 유명하기도 했고.
그러나 세 사람이 보여 준 실력은 마리나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저 정도는 해야 러시아 최고라 할 수 있는 걸까.
“…….”
음악가로선 전율이 인다. 정말 멋진 걸 봤다. 음악의 길은 정말 넓다.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이 어울려 무대를 즐기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진다.
그러나 연주자로선 암담해졌다.
음악의 길은 너무 멀다. 대체 얼마나 뛰어난 천재성을 지니고 있어야 저런 걸 가볍게 할 수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마리나는 잠시 스스로의 실력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비슷한 흉내도 잘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전율과 혼란 속에서 마리나는 힘없이 좌석에 푹 파묻혔다. 어두운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무대를 바라본다.
이제 본무대가 시작된다.
이미 저 앞의 중앙음악학교 세 사람은 압도적으로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다음으로 무엇이 나와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무대 위로 올라온 것은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에 비하면 그리 유명한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나는 아나스타샤가 방금 보여 주었던 신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 예쁜 자줏빛 연주자의 음악이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즉흥 연주가 아닌 다른 음악성은 별로일지도 모른다는 상반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리나는 울적해졌다.
그러한 마음을 아나스타샤는 모른다. 그녀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묵례를 보내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큰 키와 긴 팔은 커다란 피아노를 언제든 가지고 놀 준비가 되어 있어 보인다.
팔이 들어 올려졌다가, 톡 떨어졌다.
“……!”
마리나는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화려한 외견이나 즉흥 연주만을 듣고 막연하게 추측하고만 있었다.
자신만만한 터치, 매력적인 화법. 당당해 보이는 아나스타샤는 어떠한 굴레에 얽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어 나가는 연주를 할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아나스타샤가 선보인 첫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알레그로 데 콘시에르토allegro de concierto. op.46
역동적으로 몰아치는 아르페지오 연주가 정말 화사하고 낭만적이다. 자신 있게 연주자의 역량을 증명하려 드는 음악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알레그로 데 콘시에르토는 최고의 테크닉을 자랑하기 위해 막 솟구치려는 순간, 깔끔하게 절제된 통제를 받고 완벽하게 갈무리되었다.
그녀는 제멋대로 놀면서 무대를 휘두르기만 하는 연주자가 아니었다.
훨씬 더 경의와 정도가 있는 음악을 구사할 줄 아는 연주자였다.
그 부분은 마리나를 아주 깊게 자극했다.
‘이건 학교에서 배웠어…….’
철저한 자기 기준과 구조성. 그러면서도 드러나는 개성과 비르투오시티.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높은 수준의 연습으로 깔끔하게 잡아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최선의 연주자들이 할 법한 음악을 선보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가고 공부가 된다. 또한 이 음악에 얼마나 많은 연구가 들어갔는지 피부로 느껴진다.
마리나는 가슴 속 어딘가 어두워졌던 부분이 이 음악에 떠밀려 사라져 버림을 느끼면서 연주에 집중했다.
“…….”
조표가 일곱 개나 붙은 올림다장조로 시작했던 음악은 조표 두 개가 줄어 단조로 내려왔다.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나긋나긋해진 노래로 변한다.
아침에 막 일어나자마자 느낄 수 있는 건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다. 유혹과 타성의 감촉에 휩쓸려 다시 힘이 쭉 빠져나간다.
그렇게 아침을 다시 잊으려는 찰나, 사장조의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귓가에 울린다.
머리 주위를 한 번 휙 맴돈 음악은 이전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청중들의 집중을 무대 위로 끌어왔다.
홀린 듯이 음악을 감상하면서 마리나는 아나스타샤라는 연주자에 대해 생각했다.
이따금 보이는 강렬함이 야생성을 드러낸다. 마리나가 느끼기에 아나스타샤는 본래 굉장히 자유롭고 야성적인 연주를 하는 연주자였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음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완성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 격식 있는 구조적인 절제미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마리나는 알 것 같았다. 그녀와 같은 학교에 있는 두 천재와 비등하게 서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굉장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나온, 잘 만들어진 음악이다. 마리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 음악에서 배울 점들을 흡수해 나갔다.
이미 마리나의 머릿속엔 불과 몇 분 전에 느꼈던 감정 따윈 온데간데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노력으로 쟁취한 것들이 있다면, 자신 또한 가능할 것이란 생각으로 손가락을 팔걸이 위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
이번엔 다장조로 변화한 음악이 선명한 풍경을 보여 준다.
자연을 묘사하는 것 같은 음악은 극히 표현하기 어려울 텐데,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노련하게 나무와 바람을 그린다. 훌륭한 솜씨였다.
저 멀리 언덕 위로 비치는 햇살. 그 따사로움에 마리나는 눈을 가늘게 뜬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은 순간, 음악이 휙 변화하며 이 꿈같은 음악을 얼굴 앞까지 확 가지고 온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옥타브를 연타하고, 첫 번째 주제로 되돌아갔다.
모든 것은 막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채 창밖으로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직접 피부로 느꼈던 것처럼 섬세한 감각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책을 다녀온 기분이야.’
앉아서 즐기는 여정. 음악만으로 행한 산책은 이 연주회 전체의 주제를 알리는 전주곡이기도 했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지 않게.
그 누구라도 쉽게 즐기고 안도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된 연주회였다.
난데없이 청중들을 무대 위로 불러내어 연주한 것에 대해 당혹스러움 등을 느끼기도 했으나, 이 한 곡에선 모두가 음악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길 바라는 기원이 명료하게 느껴져 온다.
그 바람은 조금 더 느긋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부풀다가 영롱한 클라이맥스로 마무리되었다.
“브라바!”
아나스타샤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엔 8분이면 충분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청중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마리나 역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돌려 청중석을 보더니, 앉아서 이 환호를 받는 건 실례라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920명의 열정을 받으며 가볍게 답인사를 보내는 아나스타샤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법한 셀럽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순간을 길게 즐길 생각이 없었다.
깔끔하게 인사만 마친 아나스타샤는 다시 피아노로 되돌아갔다. 셀럽처럼 보이던 이미지는 다시 순식간에 피아노에 집중하는 연주자로 변했다.
방금 전 있었던 그라나도스의 알레그로 데 콘시에르토는 성공적인 음악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이번엔 다음 음악을 그 옆에 새길 차례였다.
아나스타샤가 다음으로 꺼내든 곡은 장소를 스페인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시간을 10년 정도 뛰어넘었다.
“…….”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 op.14
4분의 2박자이지만 틀어진 템포. 폴리리듬으로 엉켜 있는 양손의 밸런스. 복잡하게 끊어져있는 레가토의 흐름과 그로 인해 생기는 프레이징. 기묘하게 들리는 불협화음.
심지어 악장의 템포 지시마저도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로,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는 애매한 지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함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음악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매력으로 청중들을 끌어들인다.
“…….”
1912년. 당시 프로코피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고 스물한 살의 나이로 러시아 음악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피아노 협주곡 등에서 보여 준 폭발적인 에너지와 독창적인 피아노 사용법은 수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그 논란 가운데에서도 프로코피예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왕성하게 작곡 활동에 집중했는데, 그때 작곡된 곡 중 지금도 높게 평가되는 것이 바로 이 피아노 소나타 2번이었다.
낭만주의를 넘어와 인상주의마저 깨뜨리기 시작한 음악엔 일관된 주제가 희미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선명하다.
불규칙을 규칙적으로, 이질성을 조화롭게 만드는 그야말로 모순의 덩어리 같은 어려움. 하지만 숙련된 연주자가 구사해 낸 음악의 집합은 귀로 파고들어 뇌리를 잠식했다.
마치 연관 없는 물건들을 구도에 따라 배열하여 구조성을 확립하고, 그림자의 방향까지 고려하여 정교하게 그린 정물화와 같다.
깨진 거울, 마른 깃펜.
반으로 접힌 책갈피.
사과.
그리고 축음기와 하모니카.
마리나는 그런 것들을 눈앞에 떠올렸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프로코피예프의 음형은 자유자재로 그 모습이 변화하면서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연주자의 대답이 해석으로 드러나는 음악과 다르다. 이 곡은 대답이 아니라 920명에게 향하는 질문과 같았다. 모두의 마음속에 맺힌 정물화는 각자의 대답일 것이다.
“…….”
들리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음악이었다. 음악에 주제가 없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는 즐기기 어려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나스타샤는 딱딱한 편견들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듯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구사했다.
연주 방식에 따라 난해하게 들릴 수 있는 패시지들을 너무나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들어가는 테크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이가 깊다.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연주였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음색에 부피감을 주며 현장감을 일으켰다. 이 음악 안에 떨어진 자들은 정렬된 무관계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즐길 수 있었다.
10대 연주자를 통틀어 봐도 프로코피예프를 이 정도로 표현하기는커녕 제대로 연주하는 연주자도 드물다는 걸 생각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실력이었다.
‘……대단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일렁이며 요사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맴돈다.
그 웃음소리에 취해 넋을 놓고 있자니 곧 음악은 다시 처음의 형태로 되돌아가며 짧고 단호하게 끝을 맺었다.
마리나는 이제야 1악장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감과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크게 긴장되진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는 한 배에 탄 승객들이다. 연주자들은 승객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기분 좋게 목적지로 데리고 갈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세 연주자는 그 의무에 굉장히 충실한 사람들이다.
마리나는 앞으로도 여러 음악의 길 중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