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9화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처음 프로코피예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약간 의아해했다.
사실 이 중에 프로코피예프를 정말 잘 이해하고 구사하는 사람은 타티아나였다.
타티아나는 평소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음악을 다룰 때만큼은 굉장히 냉철하고 시니컬한 면모도 잘 보여 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칼날 같은 날카로움.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연주했었던 프로코피예프의 사르카즘이나 악마적 암시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앙팡 테리블이라 불렸던 건 단순히 띄워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의도였다면 무서운 아이라는 뜻의 앙팡 테리블 말고 훨씬 기분 좋은 별명들도 많았을 테니까. 당시 심사위원들은 타티아나의 음악에서 섬뜩한 냉기를 느꼈던 것이다.
“…….”
때문에 이번에 연주회 기획을 하면서 프로코피예프도 올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 에르네스트는 당연히 타티아나가 맡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아나스타샤가 먼저 나서선 자신이 하겠다며 낚아챘고, 타티아나는 별말 없이 아나스타샤가 하잔 대로 따라갔다.
두 사람이 그리 결정했다면 에르네스트도 딱히 이견은 없었다. 그렇게 결정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바로 무대 위에 그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지금, 커튼 너머로 무대를 지켜보던 에르네스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도 리허설 때보다 훨씬 낫네.’
지난 일주일 내내 그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하루 몇 시간씩 같이 있으면서 연습을 함께하고 연구를 도와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연습하는 곡들 역시 몇 번이나 들어보고 피드백을 해 주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 수준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연주에 나선 아나스타샤는 그 어떤 때보다 완벽하고 철두철미한 연주를 보여 주었다.
피아니스트는 예술가이지만 동시에 기술자이기도 하다. 실력이란 어느 날 갑자기 무대 위에서 좋아지지 않고, 보통은 연습한 그대로 따라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가끔, 무대의 계단을 오름으로서 음악의 계단 역시 훌쩍 올라 버리는 연주자들이 있기도 했다.
에르네스트가 알기로 아나스타샤나 타티아나가 그런 부류에 속했다.
‘언제 여기까지 왔어?’
특히 근래 아나스타샤는 실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아졌다.
본래 감각적인 연주를 잘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타티아나의 차분하고 깊이 있는 연주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는 전체적으로 굉장히 아카데믹해지기도 했다.
기술도 뛰어난 데다가 음악성까지 일취월장해 버렸으니 더할 나위 없다.
에르네스트는 팔짱을 낀 채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지켜보다가, 문득 옆에 앉은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
감상자가 된 타티아나는 언제나 그렇듯 말이 없고 차분하다.
1부엔 연주자로 나갈 일이 이제 없으니 편하게 봐도 될 텐데, 흐트러짐 없이 무대를 지켜보는 것 또한 자신의 의무라 주장하는 것 같다. 연보라색 드레스는 마치 저녁의 고요한 호수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밑에선 분명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 눈엔 열기가 들어차 있다.
프로코피예프에 대한 조예가 깊은 타티아나가 지금 무대에서 연주 중인 친구를 보며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은 뭘 해도 방해가 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몽환적인 1악장을 막 마무리하고 2악장으로 들어섰다.
“…….”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 2악장 스케르초.
모든 음이 통통 튀며 부각된다.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쓰는 것도 아랑곳 않던 프로코피예프의 작곡 방식의 초기 형태가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끊임없이 2도 화음을 연타해야 하는 부분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아티큘레이션을 뭉개지 않고 살려 내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까다롭다.
급박한 첫 주제가 끝난 뒤에 나타난 것은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요정의 모습이다.
빠른 악상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명료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레가토와 정교한 싱커페이션. 어느 하나만 무너져도 엉망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구성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이 정도는 어렵게 상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굉장히 가볍고 자연스러운 터치로 빠르게 2악장을 연주해 나갔다.
2분 정도의 짧은 스케르초가 끝나고, 3악장이 시작된다.
악장 지시는 안단테andante. 피아노의 느릿한 템포가 홀 안의 공기를 끌어 내린다. 주변 모든 것들이 착 가라앉으며 몸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음악은 진창인 것 같다가도 하늘 위 구름 같기도 했다.
“…….”
기묘한 걸음걸이로 건반이 걷는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반가움은 거기에 없다. 정처 없는 방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하는 발걸음이다.
누군가는 이 음악에서 지친 귀갓길을, 누군가는 장송곡을 떠올렸을 것이다.
크게 소리쳐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일은 없지만, 어느샌가 목덜미를 기어올라 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싸늘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에르네스트는 여기에서 후기 스크리아빈 음악의 가능성을 읽어 내기도 했다. 불협화음과 무조성이 섞인 음악. 활자로 된 설명과 이해는 굉장히 어렵지만, 인간의 마음에 곧이곧대로 틀어박혀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음악이다.
앞선 두 악장과 대비되어 3악장은 더더욱 위험하게 들렸다. 하지만 공포영화에서도 만끽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느리고 조용한 스릴을 즐기며 에르네스트는 그다음을 기다렸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적막 속에서 그림자가 거대하게 크기를 키워 간다.
그 그림자에 집어삼켜지면서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빛나는 말 한 마리가 그림자를 꿰뚫어 버렸다.
4악장이 시작되었다.
“…….”
벼락처럼 날아든 말은 갑자기 모든 풍경을 한 번에 반전시켰다. 안개가 거두어지고, 주변이 환해졌다.
말은 거칠게 투레질을 하더니 잠시 그대로 멈추어 섰다. 에르네스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그 위에 올라탔다.
내달리는 소리와 바람의 스쳐 지나감. 말 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경쾌하고 흥미진진했다. 다른 도시로 이야기를 전하는 음유시인이 되기도 하고, 창을 든 기사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어 내면서 에르네스트는 감탄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 아나스타샤?
4악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을 나눈 바 있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는 달리는 말과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전개될 것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해도 몰입도가 다르다. 에르네스트는 이 모험 같은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연못에서 느긋하게 물을 마시기도 하고, 들판에서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한다. 높은 담장을 한 번에 뛰어넘어 버리며 마을에서 마을로 향한다.
장대하지만 무겁지 않고 흥겹고 유쾌했다.
모험은 말이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와 등 뒤의 사람을 내려 주는 것으로 끝났다. 홀가분해진 말을 두어 번 땅을 박차곤 날아가 버린다.
“훌륭해!”
“브라바! 브라바!”
그라나도스의 곡을 연주했을 때보다 더 큰 찬사가 무대로 향했다. 에르네스트는 앉아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곁에 있는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연주 중이었을 때처럼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환한 미소가 그녀의 입에 매달렸다.
“어떤가요? 잘하죠?”
잔뜩 들뜬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성공적으로 한 것에 대해 자신이 일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정말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뭐라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은 충분히 그러한 기쁨을 함께할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일 잘한 것 같은데?”
“그렇죠? 제가 듣기에도 그랬어요.”
타티아나는 미소를 가득 띤 채 일어났다. 청중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런 타티아나의 마음은 아나스타샤와 마주했을 때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아나스타샤!”
“와, 오늘 좀 되는 날인가 봐.”
인사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타티아나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긴 아나스타샤는 약간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요행이었어? 어쩐지.”
갑자기 왜 시비냐는 눈빛으로 아나스타샤가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잘하더라고. 프로코피예프는 타티아나가 전공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데?”
바로 이어 말하자 아나스타샤도 가벼운 말장난에 놀아난 것에 대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타티아나를 몇 번 토닥이고는 놓아주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만족스러웠니?”
“만족? 뭐 그렇지.”
“그렇다면 됐어.”
묘한 물음이었다. 물론 친구이자 동료 음악가로서 그녀의 연주에 만족한 건 사실이지만, 아나스타샤의 물음은 어딘가 다른 역할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라이벌로서의 관계.
에르네스트는 꽤 오래 전부터 아나스타샤가 은근히 그와 대결을 바라는 눈치를 보인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런 경쟁심은 반갑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대결 요청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음악학교 학생들이 피아노로 겨루는 데에 어떠한 조건 같은 게 필요할 리 만무하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고 암시적으로만 드러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음악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조금씩 느꼈다.
“너 프로코피예프 말고도 뭔가 있지.”
“……응?”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조금 분명하게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중에 보여 줘. 궁금하니까.”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대답했다.
“그럴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홀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해졌다.
연주회 1부가 끝나면서 인터미션에 들어갔고, 청중들이 홀을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 보더라도 연주회가 큰 문제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기실 안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홀 관계자들이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혹시라도 1부 무대에 문제가 있었다면 고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수고 많았습니다! 피아노나 무대에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몇 가지 확인하는 질답이 오가고, 한 직원이 와선 음료와 다과 등을 주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물만 받아 마셨다. 무언가 속에 더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발레리와 크리스티나가 들어섰다. 발레리는 오자마자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아나스타샤.”
그와 악수를 나누며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었다. 크리스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상상하고 있었던 그 어떤 프로코피예프보다도 더 좋았어. 아나스타샤.”
“고마워요, 크리스티나.”
이어서 발레리는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도 번갈아 돌아보았다. 모두에게 흡족한 모습이었다.
“여러분께서 기획했던 즉흥 연주도 반응이 정말 좋습니다. 지금 밖에선 모두 1부에 무대에 대한 호평뿐이더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입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제안했던 기획이 이렇게 잘 풀렸다는 것에 대해 기쁘긴 했지만, 너무 들뜨지 않고 말했다.
“결과는 아직이긴 하죠.”
“하하, 그렇죠. 아 그리고…… 일전에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선…… 잘된 것 같습니다. 어찌 될진 지켜봐야 하겠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은 옆의 타티아나가 대신했다.
“렌스키가 왔나요?”
“예. 1부를 관람했다는 것까진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타티아나는 회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렌스키의 일방적인 비협조적인 태도로 피곤함을 느꼈을 텐데도, 타티아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며 선을 그으려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려 한다. 아나스타샤가 종종 타티아나를 보고 선생님 같다고 하는 말에 에르네스트는 동조했다.
그런데 머리로 동조하는 건 동조하는 것이고,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것이다.
발레리가 에르네스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에르네스트. 그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준비하셨는데.”
“아뇨, 괜찮아요. 저도 동의했던 일이었고.”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그녀가 하겠다면 뭐든 상관없다. 그러나 신랄한 조소가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전 렌스키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이유에 대해선 이해해 줄 생각도 별로 없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