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화
인터미션 사이 연주자들이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명료했다. 바로 다음 무대를 위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확인하고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가 1부를 너무 훌륭하게 맡아 준 덕분에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콘서트홀 전체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느껴져 왔다.
몇몇은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보고 기대를 걸고 왔고, 또 몇몇은 학생 연주자들이 여는 무료 연주회라기에 별 기대 없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시간 정도 지난 지금은 모두가 2부 무대에 굉장한 기대를 쏟고 있다.
난 그 전부를 느낄 수 있었고, 완벽하게 받아 내기 위해 준비했다.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다시 한 번 스트레칭했다.
대기실에 있던 관계자들은 우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모두 나가 있는 상태였다. 여긴 우리 세 명뿐이었다.
살짝 옆을 보니 친구들도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생수병을 하나 들고는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목뒤를 꾹꾹 누르고 있다. 두 사람 다 내가 특별히 긴장을 풀어 주거나 도와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이 연주회는 내게 맡겨진 연주회라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방학도 제쳐 놓고 내가 도움을 청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중 누군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두 손 걷고 도와주려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쉽게 받고 당연히 여길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을 보다가, 아직 연주회가 안 끝났다는 걸 돌이켜 깨닫곤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은 무대에만 집중하자. 친구들에게 집중하는 건 그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다시 웅성거림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2부 시작 3분 전이야. 준비됐니?”
잠시 나가 있던 크리스티나가 대기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말할 것도 없었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알았어. 그럼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 줘.”
사회자는 본 무대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나가서 안내를 하거나 자연스럽게 2부의 시작을 연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무대로 나섰다.
“안내 있겠습니다. 곧 2부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청중 분들은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마트폰 등의 소리가 날 수 있는 물건들은 잠시 꺼 주시고…….”
본격적으로 2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난 첫 시작을 열어 줄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아나스타샤와 말장난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에게 해 줄 만한 여러 말들을 떠올렸다. 잘 하고 오라고 하면 정말 잘 하고 오겠지. 그러나 지금 가장 그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기대할게요. 에르네스트.”
믿고 지켜보겠다는 말에 에르네스트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씩 웃어 보였다.
크리스티나가 무대 위로 연주자를 불러냈다.
에르네스트는 당찬 걸음으로 그 부름에 응한다. 무대 위를 비추는 모니터에 그의 모습이 잡히는 것과 동시에, 벽이 울릴 정도로 큰 환호가 그를 반겼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인기는 굉장히 높았다.
얼어붙어 있지도, 그렇다고 헐렁하지도 않은 여유로운 태도. 에르네스트는 품위 있는 태도로 청중들의 반김에 답했다. 절도 있는 인사가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그 열기는 에르네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920명의 사람들이 보내는 집중력은 분명한 에너지를 가지고 홀 안을 채웠다. 연주자에겐 충분한 에너지였다.
준비된 청중과 준비된 연주자. 에르네스트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무언가가 보이는지 고개를 들어 홀의 중앙 조명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피아노를 바라본다.
이제 여기에 필요한 단 하나가 무엇인진, 그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
포르테로 내리찍은 세 개의 음.
단지 그것뿐인데도 팔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강하고 단단하다. 마치 거대한 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압박감에 숨이 졸린다.
피아노의 현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강철 현을 해머로 때려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거대한 강철 망치와 조각용 정. 그것들이 단 세 번 무대를 두들기자 돌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괴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의 제목은 모음곡 가고일즈gargoyles. op.28
미국의 작곡가 로웰 리버만lowell liebermann의 역작이다.
“…….”
가고일은 중세로부터 전승된, 전신이 돌로 이루어진 날개 달린 괴물의 이름이었다. 여전히 유럽엔 가고일의 모습을 딴 석상이 많았고, 심지어 가톨릭교회에서도 악마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가고일을 사용하곤 했다.
가고일의 형태는 괴기스럽고 무서웠다. 전승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원숭이, 사자, 호랑이 등 동물들의 특징이 모여 있고 박쥐의 날개와 염소의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괴물.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이 상상했고, 그 후로도 수많은 상상력이 더해진 가고일은 인간의 역사와 그 존재를 함께한 괴물이라 할 수도 있었다.
로웰 리버만은 그 부분을 따내어 악보 안에 가고일을 묘사해 넣었고, 에르네스트는 다시 악보에서 가고일을 꺼내어 피아노 안으로 불어넣었다.
피아노에서 가고일이 꿈틀거렸다.
“……!”
아직 그 움직임이 완전히 자연스럽진 못하다.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하고 등도 굽어 있었다. 가고일은 자신을 자유롭게 해 달라는 듯 으르렁거리고, 두 발로 뛰고,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그 모습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기묘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쾌하기도 하다. 무서움을 무섭지 않게 그리는 중세 특유의 표현 양식이 느껴진다. 카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1989년 작곡된 곡이면서도 그 구조는 굉장히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바르톡의 음악에서 느낄 법한 파격적인 기교나 현대음악 특유의 불협화음이 있긴 하지만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현재 리버만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다 한들 돌로 이루어져서 생동감이 없어야 할 것 같은 괴물. 가고일을 표현하는데도 굉장히 가깝고 역동적으로 들린다.
에르네스트의 테크닉은 가고일의 모습을 러프하게 툭툭 쳐 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쾅 하고 악센트를 주어서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었다.
같이 연구했을 때 내가 짚어 준 해석이었다. 약간 흐릿하고 환상적인 느낌이 나는 것에 대해 사람은 호기심을 가진다. 그렇게 가까이 갔을 때, 가고일이 놀라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에르네스트의 해석은 내가 처음 피드백했을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수준 높게 변모해 있었다. 정말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가다가 가고일의 이빨에 물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호하고 매력적인 음색이었다. 난 이미 이 음악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였음에도 에르네스트가 연주할 때마다 몇 번이나 놀랐다.
그렇게 기겁하길 몇 번, 가고일은 곧 다시 움직이지 않는 석상으로 돌아갔다.
“…….”
두 번째 곡은 새벽의 햇살이 비치는 교회의 회랑을 그린다.
회랑을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마음 속에 들리는 한 줄기 멜로디가 회랑의 기둥을 지나치며 흐른다. 난 멍하니 그 멜로디의 뒤를 따랐다.
교회의 종이 울린다. 난 고개를 들었다. 가고일 석상과 눈이 마주쳤다.
가고일의 석상에서 느껴지는 악마적인 요소와 교회라는 공간에서 오는 성스러운 분위기. 그것들이 혼재되어 그려내는 풍경은 정말 오묘했다.
기둥에 손을 대고 잠시 석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계속해서 가고일 석상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곡과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의 음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길한 무언가를 암시하면서 주제를 이어 나간다. 아주 영리하면서도 수준 높은 음악이었다.
다음으로 세 번째 곡은 교회의 복도 안으로 들어선다.
양손에서 번갈아 이어지는 아르페지오가 모든 소리가 울리는 넓고 긴 복도의 모습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불안하게 서성이는 발소리와 두리번거리는 모습. 교회에서 찾아선 안 될 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에 가고일이 대답했다.
“……!”
첫 번째 곡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동굴 벽에 달라붙은 박쥐처럼, 가고일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곳들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이번엔 주변에서 지켜보는 대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야 했다. 비명 소리를 들은 가고일은 더더욱 흉폭하게 사냥감을 뒤쫓는다.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흐른다.
이 공포스럽고 강렬한 음악은 연주자에게도 어마어마한 부담을 안겨 준다. 조표 하나 없는 가단조의 음형은 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도와 표현에서 굉장히 높은 실력을 요구한다.
옥타브 멜로디와 내성부를 빠르게 연주하면서도 따로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하고, 아티큘레이션을 더 선명하게 표현해야 했다.
쉴 새 없이 건반을 두들겨 화성을 쌓아 음악을 이루어야 하는 이 구조는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적 스타일과도 닮아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어렵단 의미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리스트의 음악을 굉장히 깊게 연구하며 파고들고 있기도 했다. 연속되는 옥타브는 메피스토 왈츠를 연상케 할 정도로 연주자를 극한으로 몰고 가지만, 에르네스트는 재빠르게 건반을 넘나들며 곡이 요구하는 모든 한계를 극복해 냈다.
“…….”
정신없이 달아나며 흔들거리는 시야,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것 같은 가고일의 뒤쫓음.
이 급박한 음악은 복도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풍경이 확 넓어진다. 가고일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며 주위를 몇 번 맴돌다가, 날개를 펼치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음악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저앉는다.
“브라보!”
짧고 매력적인 4개의 모음곡은 2부의 시작을 강렬하게 열었다. 1부를 듣고 기대하고 있던 청중들의 기대치를 만족시켰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연주회를 기획할 때 우리가 중점적으로 여겼던 건 청중이 누구라도 처음 듣는 곡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단순한 주제만을 그리는 곡들을 올려놓으면 평면적이고 지루한 연주회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강렬하고 복잡하고 해석의 여지도 많지만,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다채로운 음악들을 꺼내었다. 아나스타샤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에르네스트는 이 가고일즈를 택하면서 상당히 실험적이라고 말하긴 했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이 곡을 좋아해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열화와 같은 성원에 짧게 답하고는 다시 피아노를 바라본다.
그의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미동도 없이 내려앉은 어깨와 살짝 숙여진 목. 에르네스트는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집중했다. 모두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들어 올린다.
방금 전 연주했던 가고일즈의 네 번째 곡이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에서 받은 영향이 느껴지는 곡이라 에르네스트가 수월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면 이번엔 진짜 리스트의 곡을 꺼낼 차례였다.
그는 지난 일주일 사이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최고의 곡을 무대 위에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