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1화
피아노의 황제 프란츠 리스트는 표제음악을 주로 작곡하면서 특별한 테마나 주제를 피아노로 옮겨 오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중엔 지역이나 나라의 민속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곡들도 많았고, 에르네스트는 그러한 다채로운 곡들을 연주하는 데에 익숙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정말 많았다. 헝가리의 풍취를 표현한 헝가리 광시곡, 스위스의 정경을 그린 여행자의 앨범, 이탈리아의 열정을 나타낸 베네치아와 나폴리.
그러나 오늘 에르네스트는 헝가리도 스위스도 이탈리아도 아닌 다른 나라를 택했다.
“…….”
스페인 광시곡spanish rhapsody. S254
올림다단조의 웅장한 화음이 무대 바닥을 울린다. 고풍스럽고 무게 있게, 그러면서도 화려하고 낭만적으로 스페인의 테마가 펼쳐진다.
에르네스트는 결코 지나치지 않게 정교한 터치로 건반을 어루만졌다. 바람에 실려 날려 온 낙엽 한 장이 주변을 떠돌며 시선을 빼앗다가,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사람들이 무대 위를 바라보면서도 먼 곳을 의식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부터 천천히 한 멜로디가 다가왔다.
놀라게 하진 않는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잡고, 허리를 휘감는다. 매력적인 리듬은 처음 보는 춤을 직접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귀에서 전신으로 파고든다.
음악은 차분하게 배려하듯 한 발자국씩 춤을 일러 주고는,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약간 복잡해진 손짓과 스텝. 그러나 천천히 곡을 따라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음악을 따라간다. 음악은 보다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빛났다.
“…….”
리스트가 작곡한 스페인 민속음악을 주제로 한 곡들 중엔 서사시도 있고 대환상곡도 있었지만, 이 광시곡이야말로 프란츠 리스트라는 작곡가의 생애와 음악성을 온전히 담아낸 곡이었다.
이 곡이 작곡된 1863년은 리스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불행했던 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순회 연주자 시절엔 피아노의 황제로 전 유럽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바이마르에 정착해선 작곡자이자 궁정음악가로 존경을 받은 리스트였지만 이 생활은 1859년 그의 아들인 다니엘이 스무 살의 나이로 죽으면서 뒤틀리게 된다.
2년 후인 1861년엔 바티칸 교황청과 러시아 황제의 반대로 카롤리네 공주와의 결혼이 불가능해지게 되었고, 이듬해엔 장녀 블랑딘이 사망했다.
불행을 마주하면서 회의감과 절망을 느낀 리스트는 결국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스페인 광시곡은 리스트가 성직자가 되기 직전, 궁정음악가 자리에서 내려와 정처 없이 홀로 떠돌아다닐 때 쓴 곡이었다.
어둡고 우울한 감정들을 악보 위에 적어 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 하지만 리스트는 절망을 쓰지 않았다.
보란듯이 화려하게, 더더욱 장엄하게 인간에게 주어진 음악이란 선물을 옮기고 또 옮겼다.
에르네스트는 그 선물을 다시 우리에게 건넨다. 그 결과물은 숨이 찰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다시 한 번…….’
16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무곡인 폴리아folia 무곡을 변주한 음형이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반복되다가, 이번엔 조금 더 빠른 다른 주제로 변화했다.
8분의 3박자로 알레그로. 19세기 스페인에서 유행했었던 요타 아라고네사jota aragonesa였다. 생기 있고 발랄한 춤곡으로 글린카나 생상스 같은 작곡가들도 이 곡을 주제로 하여 곡을 쓴 바 있었다.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휙 휘날린다. 양손을 들고는 발을 교차하며 발끝으로 바닥을 찍고 콩콩 뛴다.
앞으로 뒤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음형을 보며 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에르네스트는 요타 아라고네사를 추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리듬 등을 연구했다. 원본 춤곡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되니 자연스레 리스트가 옮긴 음악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도 현저히 높아져 있었다.
“…….”
춤은 조금 느릿하게 흘러간다. 햇살처럼 환하게 느껴지는 트릴과 감성적인 멜로디가 사랑스럽게 들려온다. 모든 상념이 스르르 흩어지는 편안한 기분에 실려 간다.
새의 울음소리처럼 높은 곳에서 재잘거리던 음악은 갑자기 주르륵 낙하하더니 리스트 특유의 옥타브 아르페지오로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보다 격렬한 춤곡이 팡 하고 터져 나온다.
따라오기 쉽게 천천히 보여 주던 배려는 온데간데없다. 에르네스트는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로 옥타브를 몰아붙였다. 이 곡이 프란츠 리스트의 기악곡이라는 명백한 증명이 지금 드러났다.
수많은 불행들과 마주하고도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에 집중한 리스트, 그리고 백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대작곡가의 음악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에르네스트.
빠르게 손을 도약시키면서도 충분한 깊이로 음을 새겨 넣는 에르네스트의 테크닉을 보며 난 연주자로서도 상당한 감명을 느꼈다.
저 속도와 정확도는 그 자체로 완성된 기술에 가까웠다. 어마어마한 천재성과 노력이 융합된 연주자의 결실.
후반부로 다다르게 된 곡은 건반 전체를 쓸어 담는 것처럼 연달아 터져 나오다가, 잠시 잦아들며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울리더니 엄청난 속도의 스타카토로 장식하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자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교가 모두 드러난다.
그러고는 마치 마술처럼, 첫 주제인 폴리아 무곡이 다시 되돌아와 훨씬 화려해진 모습을 드러냈다.
조성은 나단조로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상태로 리듬만 변화하니 마치 처음부터 한 곡이었던 것처럼 들린다.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요타 아라고네사의 멜로디가 다가와 섞이고, 곡은 그 두 주제를 모두 이끌고 피날레로 향했다. 주제와 조성, 리듬, 형태 등을 혼합하면서도 이질감은 전혀 없었다.
리스트의 천재적인 작곡 능력과 에르네스트의 연주 실력이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화려하고 경쾌한 피날레가 그 끝을 맺고, 에르네스트는 길게 화음을 내리누르던 손을 들어 올렸다.
음악이 멎자마자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진다.
“브라보!”
200년 전 프란츠 리스트의 무대의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까?
그 시절에 살아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은 200년 전의 청중들의 기분과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엄청난 박수를 등에 달고 에르네스트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그를 반겼다.
“기대 이상이었어요. 에르네스트.”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그토록 엄청난 연주를 해 놓고도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보아하니 아직 연주에 대한 집중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곡은 끝났지만, 마음속에 흐르는 음악의 잔재가 그를 아직 완전히 현실로 돌려놓지 않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를 보며 웃으며 무대 쪽을 다시 가리켰다.
“커튼콜 해야 하는 것 아니니?”
여전히 환호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연주자로서 그 역할을 마저 다하고 싶다면 다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크리스티나도 마음대로 하라는 듯 웃었다. 빡빡하게 짜여 있는 일정이지만 잠깐 정도 여유를 내는 건 괜찮다는 것 같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모든 집중을 내려놓았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생각은 별로 없어. 난 2부의 막만 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한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내세워도 무방한 곡들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차례에서 모든 것을 매듭지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무대 위에 산처럼 쌓아 올린 것들을 내게 전해 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920명의 열정과 관심, 기대 등이 뭉쳐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난 피아노 한 대로 저 산에 맞서야 했다.
물론, 조금이라도 빨리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뿐이다. 에르네스트의 연주를 보면서 내 손은 연주자로서 움직일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좋은 무대를 받았으니, 잘 해 보일게요.”
조금도 무르거나 모자라지 않게, 잘 준비한 곡들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1부는 아나스타샤가 마무리해 주었고 2부는 에르네스트가 시작해 주었다. 이젠 내가 무대 위에 설 때다.
***
발레리 르포비치 타라소프는 무대 아래쪽에서 스테이지를 관리하는 직원들과 함께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콘서트 매니저로서 이 연주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사실 발레리는 자신이 뭘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이 연주회의 인선부터 프로그램 기획, 그리고 본 무대 연주까지 전부 타티아나와 그녀의 친구들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 나타난 연주회는 발레리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과연 누가 이 연주회를 음악학교 학생들의 무료 연주회라고 생각할까. 이 정도 수준의 연주회는 수 천 루블을 주고서라도 보는 데에 아깝지 않다.
청중석을 올려다보니 터져 나올 것 같은 만족감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미쳐 버리기 직전인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지르고,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치고도 모자라다.
아마 이 연주회가 기부금을 모으는 목적의 자선 연주회였다면 깜짝 놀랄 정도의 액수가 모였으리라 발레리는 자신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타티아나는 자선 연주회라는 아이디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건 다음에 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번만큼은 오로지 음악을 대중들과 공유하는 목적으로만 연주회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금전과 관련된 의도를 완전히 배제해 버린 데엔 아마 렌스키의 영향도 컸으리라. 발레리는 그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청중석의 한 지점을 살폈다. 거기엔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방금 전 에르네스트의 무대는 정말 대단했다.
아마 렌스키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의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걷어차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타티아나는 분명히 이야기했다. 렌스키가 찾아와서 자신들이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지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후회해 줬으면 한다고.
그녀가 말하는 후회는 보복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자성과 반성의 의미에서의 후회를 원한다.
과연 그 뜻대로 되었을까. 발레리는 조용히 청중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라면 몰라도 이번 차례엔 분명하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 무대에 보내 주신 성원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 연주자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자 크리스티나가 말했고, 곧 무대 위로 타티아나가 올라왔다. 엄청난 박수가 뒤따랐다.
그 부담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울 텐데도,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어 나온다. 이 모든 것들을 기껍게 여기는 듯하다.
곧은 자세로 정 가운데에 선 그녀는 예스럽게 묵례했다. 단아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친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타티아나는 실제 키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무언가가 점점 타티아나의 주변에 모이는 것처럼 일렁인다. 그것들을 휘감고,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고요 속에서 모두가 음악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린다.
지금까지 나온 곡들은 전부 테크니컬하고 개성이 짙은 곡들이었다. 처음 듣는 누구라도 지루해하지 않고 음악에 빠져들 수 있도록 10분 내외의 곡들을 선정했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도 20분 정도의 길이로, 소나타 중에선 짧은 축에 속하는 곡이었다.
이 흐름에 따른다면 타티아나 역시 퍼포먼스가 강하고 화려한 곡을 꺼내는 것이 옳았다. 렌스키라면 처음 그랬던 것처럼 라흐마니노프를 추천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주회를 값비싼 파인 다이닝에서의 식사처럼 여긴다. 통일된 테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맛과 신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무료 연주회라고 할지라도 그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빠르게 라흐마니노프를 준비하더라도 그 어떤 청중도 불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특별한 요리를 준비해 왔다.
“……바흐라니. 하하.”
처음 그녀의 의견을 듣고는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