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52화 (552/1,277)

##  552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각각 두 곡 씩 준비한 것에 비해 타티아나는 한 곡만을 준비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다음 연주자로 무대에 올라서 꺼낼 수 있는 음악으로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타티아나가 그렇게 준비한 한 곡에 들어간 집중력과 노력은 어마어마했다. 그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음악을 통해 똑똑히 들려왔다.

“…….”

바흐-부조니 샤콘느chaconne

원곡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BWV1004의 5번째 곡. 샤콘느이다.

1720년 바이올린 솔로로 연주하도록 작곡된 곡을 100여년이 흐른 뒤 이탈리아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조니가 피아노 솔로로 편곡했다.

이 느릿한 4분의 3박자 춤곡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었던 춤곡 형식이었다. 안토니오 비발디나 요한 파헬벨, 아르칸젤로 코렐리처럼 당대 유명했던 작곡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작곡했던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많은 샤콘느 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한 곡을 꼽자면 바로 이 바흐의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일 것이다.

타티아나는 화려한 라흐마니노프도 리스트도 아닌 바흐의 곡으로 무대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

모든 색이 사라졌다.

이전까지 들려왔던 곡들이 다채로운 색이 화려한 음악이었다면 이 곡은 흑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흑백의 세상에선 더더욱 빛과 어둠이 잘 드러난다.

빛이 밝은 무대는 흰색으로 물들어 있고, 검은 피아노에선 음표를 따라 검은 어둠이 서서히 새어 나온다. 그 주변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회색빛 음악은 장엄하다. 그러나 음악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서정적인 애수는 마음 속 깊은 곳을 찌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화려한 퍼포먼스보다 더 견디기 어렵군…….’

심장이 아려오는 몰입감이다. 발레리는 침을 삼키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타티아나는 본래 선명한 이미지와 색채감을 사용하는 인상주의적 연주를 잘 하는 연주자였다. 협회에서 아무런 이견 없이 타티아나의 실력을 인정한 데엔 그 표현력이 한몫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을 거두어 내고 이렇게 담백한 음영의 깊이만으로 하는 연주에서도 타티아나는 노련한 연주자들에게서나 볼 법한 음색을 정말 인상적으로 드러냈다.

타티아나는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고 샤콘느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연보라빛 드레스는 흑백의 세상을 지배하는 회색빛으로 보였다. 발레리는 이미 노랫소리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리허설에서 몇 번이나 들은 곡이었지만 소용없었다.

“…….”

빛이 눈앞을 밝히는가 싶으면 곧 그림자처럼 어둠이 주변을 뒤덮는다. 발레리는 이 음악으로부터 인간이 이름 지은 특정한 주제 등을 떠올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어딘가에 닿아 있다.

원숙한 음악성은 숨 쉬는 것도 잊게 했다.

***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목을 틀어쥐고 있던 무언가가 간신히 힘을 놓아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일 줄은…….’

그녀는 연주회의 사회자를 맡겠다고 하고 바로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사회 준비에 집중했기 때문에 연주자들의 리허설을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듣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무대에서 보는 쪽이 훨씬 더 감상하기에 좋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크리스티나는 지금 타티아나의 연주에서 이루 말하기 힘든 전율을 느꼈다.

“…….”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그 어려움과 아름다움은 이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있어선 성서나 다름없었다. 최고의 연주자들이 이 곡의 연주를 위해 매달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자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크리스티나 역시 레퍼토리에 넣고 있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곡의 편곡 연주도 수없이 많이 들어 보았다. 피아노뿐만이 아니다. 오케스트라, 기타, 첼로 등등 수많은 기악 편곡이 존재했으므로 크리스티나는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이런 연주는 없었다.

그동안 바흐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연주에서 드러나는 바흐의 해석은 크리스티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저번 협연 때에도 느꼈지만, 연주자의 실력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는 한참이나 어린 타티아나에게 음악적으로 배울 점이 정말 많음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집중했다.

“…….”

피아노의 기술을 잘 몰라도 알 수 있다. 타티아나의 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높다는 걸. 그녀가 손에 넣고 있는 그 기술은 악기의 한계조차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스윙하는 것 같은 리듬으로 음이 오간다.

각각의 손가락으로 건반을 짚으면서 연주하는 음이지만, 크리스티나는 타티아나의 연주에서 바이올린의 데타셰detache를 떠올렸다.

있어선 안 될 중간 음이 들린다. 어이가 없었다.

바이올린에서야 데타셰가 기본적인 주법이라 할 수 있지만 완전 다른 악기인 피아노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본래 바이올린 솔로로 작곡된 이 곡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특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모조리 끄집어내었다. 대체 어떻게 연주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다성악기로서의 피아노의 장점 역시 여실히 드러난다. 갑자기 아르페지오로 타티아나는 겹쳐지는 음형들을 자연스럽게 엮으면서 부드럽게 연주했다. 옥타브를 연타하는데도 시끄럽지 않고 다만 그 부피만이 거대해질 뿐이다.

바흐의 음악이 가지는 견고한 구조성과 넓은 표현력.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무대 위를 수놓는다.

‘……모든 게 가능하구나.’

피아노 편곡 연주이지만 악기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훌륭한 음악은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훌륭한 법이다.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기타 편곡 연주를 듣고 세계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바이올린보다 낫다고 극찬을 했던 일은 특별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만큼 바흐의 음악의 가치는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불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연주자는 그것을 잘 드러냈을 뿐이다.

타티아나는 다시 한 번 옥타브를 짚으며 곡을 끌어올리고, 순식간에 낙하시킨다. 이 대비는 너무 자연스럽고도 자유로워서 다시 한 번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왜 바이올린으로 저런 표현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더라도 그 높낮이와 깊이에 있어서 한계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부로 크리스티나는 그 한계를 깨뜨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보다 아름다운 곡조가 지나가고, 그다음은 장조의 다른 주제가 등장했다.

피아노로부터 찬란한 종소리가 울리며 무언가가 청중석 쪽으로 쏟아져 나온다. 천천히 다가온 음의 파도는 그곳에 앉은 모두를 휩쓸고 씻어 낸다.

음악의 세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티나는 그 음들을 만끽하면서 보다 편안하게 어깨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었다.

“…….”

타티아나의 샤콘느는 모두를 음악에 적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끝까지 감쌌다.

숨이 막히거나 답답한 점은 전혀 없었다. 넘실거리는 음악이 충분하니 마치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안락함마저 느껴진다. 한 사람이 한 악기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하다.

그렇게 웅장하게 홀을 뒤덮은 음악은 사랑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줄어들고는, 마지막으로 이어져 나갔다.

방금 들었던 리스트의 음악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아르페지오가 화려하게 뿜어져 나온다. 음악성은 물론이고 그 기교 역시 이전의 어떤 곡에도 모자라지 않다.

바이올린의 빠른 속주가 연상되는 연주 후엔 파이프오르간의 거대한 소리처럼 공기를 통째로 뒤흔드는 소리가 이어져서 장대한 마침점을 찍었다. 단 한 줄의 프레이징이었지만, 이 곡의 끝을 장식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멋졌다.

마지막 음을 연주하고도 다시 고요가 찾아들기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흐의 단 한 곡으로 타티아나는 자신의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분명하게 증명해 냈다.

“……맙소사.”

“브라바!”

홀이 떠나가라 울리는 환호 속에서도 타티아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그대로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보라빛 드레스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멍한 눈으로 청중석을 보던 타티아나는 비로소 일어났다. 피아노와 이어져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고 나서야 타티아나에게 존재감이 되돌아 온 것 같았다. 정말 영혼을 건반에 밀어 넣는 것 같은 연주였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음악에 대한 감동과, 홀 안에 흐르는 청중들과 공유하는 감동을 동시에 느끼면서 박수를 보냈다.

***

바흐를 꺼내기로 한 것은 특별한 선택이었다.

쉽게 생각한다면 프로코피예프와 리스트 다음엔 그에 걸맞은 화려한 낭만 음악가를 고르는 쪽이 나았으니까. 이 연주회의 흐름을 알기 쉽게 만들기 위해선 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콘서트 매니저인 발레리 역시 내게 슈만이나 라흐마니노프를 권했다.

그러나 난 렌스키가 대충 고르라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료 연주회니까 쉽고 편하게 하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일견 합리적으로 들린다.

“…….”

절대 그렇게 하기 싫었다.

어떤 청중이라도 내겐 소중했고 어떤 무대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레퍼토리를 꺼내어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와 맞춰 보았고, 최종적으로 가장 완성도를 기할 수 있는 곡으로 바흐를 골랐다.

어울리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이 곡은 에르네스트가 연주한 스페인 랩소디의 리듬과 형식, 그리고 조성의 조화에도 엄청나게 머리를 쓴 선곡이었다.

마지막까지 음악을 되새기면서 2부의 구성과 흐름을 떠올렸다.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난 스스로의 연주에 상당히 만족하며 일어날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더 환하게 비춰 오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이 보였다.

난 정중하게 사랑스런 청중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최고였어, 타티아나.”

대기실로 돌아오니 아나스타샤가 날 안아 주었다. 그녀에게 안기고 나서야 느꼈는데,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15분 정도 되는 연주이지만 많은 집중력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런 부분을 걱정하는지 내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아? 다음 곡은.”

난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무대에선 다시 크리스티나가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대 위로 피아노가 한 대 더 세팅되기까지 몇 분 정도는 숨을 돌릴 시간이 있었다. 난 살살 어깨를 누르며 다음 연주를 준비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하는 곡이다. 두 명이 한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반만 열심히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되레 혼자 하는 것보다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에르네스트는 몸을 푸는 날 보며 말했다.

“난 네가 바흐를 한 곡만 연주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두 곡을 연주하고 듀엣 연주까지 하면 부담이 크니까.”

다시 생각해 봐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하는지 고개를 주억이던 그는 느닷없이 눈을 흘겼다.

“그런데 한 곡으로 줄이면 뭐 해? 그 한 곡에 전부 집어넣는데.”

“아하하…….”

하지만 전 대충 하는 방법 따윈 모르거든요.

난 그에게 길게 설명할 것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곧 있을 무대에 신경이 쓰이는지 에르네스트가 힐긋 모니터 쪽을 바라보았다. 난 그에게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 아나스타샤로부터 기운을 전해 받았으니까요.”

“……그런 것도 돼?”

“물론이죠?”

혼자선 얼마 못 가 지쳐 쓰러질 것 같다가도 곁에 친구가 있다면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 역시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를 보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자.”

“……?”

뭔가 싶어 올려다보니 그가 말했다.

“난 지금 기운이 넘치거든. 그러니까 가져가라고.”

“어떻게요?”

“아까는 된다며!”

살짝 장난을 치니까 갑자기 역정을 낸다. 난 키득거리면서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내밀고 있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농담이에요.”

“…….”

꽉 잡지도, 흔들지도 않고 맞닿아 있는 악수는 평범한 악수와 다른 연주자들의 악수였다.

잠깐 나눈 악수였지만 충분했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라도 전해져 온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