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3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마티네 연주회 2부의 마지막은 듀엣 곡이 자리했다. 주된 프로그램은 바흐로 완성되었고, 그다음으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곡이다.
두 대의 피아노가 무대 위에 준비되고, 곧이어 크리스티나가 두 연주자를 불러냈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나란히 무대 위로 올라섰다.
“…….”
에르네스트는 모니터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성격도 성향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어떻게 만나더라도 그냥 스쳐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라는 강력한 접점은 두 사람을 엮어 주었고, 시간이 갈수록 음악도 성격도 점점 닮아 갔다.
그리고 지금 무대에 선 두 사람은 지난 일주일 동안 한 곡을 놓고 얼마나 균형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는지 충분히 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연습을 전부 지켜보았고, 때문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본 무대를 기다렸다.
“모두 즐겁게 감상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마지막으로 멘트를 정리하고 단상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를 비추던 조명마저 꺼지고, 남은 건 피아노와 연주자를 비추는 조명뿐이다.
그랜드 피아노 두 대는 서로를 마주 보고 붙어 있었다. 딱 맞는 퍼즐조각처럼 붙은 모습이 마치 듀오 연주를 위한 최적의 구도처럼 보인다.
그리고 각 피아노 앞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앉아 있었다.
“…….”
타티아나는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만지며 건너편의 아나스타샤를 바라본다.
말없이 눈빛만이 스쳐 지나가고, 타티아나가 먼저 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고요하게 흐르는 음악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 두 연주자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에르네스트의 귀엔 그것이 똑똑히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의 선율에 톡톡 물방울을 튀겨 넣더니, 본격적으로 함께하기 시작했다.
“…….”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의 피아노 듀오 편곡.
세계 3대 오페라를 꼽는다면 흔히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라 보엠. 그리고 이 비제의 카르멘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오페라인 카르멘은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기악곡으로 편곡이 되기도 했는데, 흔히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편곡된 카르멘 판타지가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지만 이렇게 피아노 듀오 편곡도 많았다.
불길하게 울리던 음악은 갑자기 아나스타샤의 손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속도의 아르페지오에 불길이 붙어 화르륵 타올랐다.
비극적인 카르멘의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파멸의 불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뜨거울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
타티아나가 손을 들어 올려 이 운명의 주제를 환하게 불태우고는 천천히 잦아들게 만들었다. 재와 잔불. 연기 속에서 카르멘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바네라habanera는 사랑은 한 마리 새라고 노래하는 카르멘의 첫 등장 아리아이다. 정말 유명하고 많이 불리는 곡으로, 이 노래를 피아노 두 대로 나누어 편곡하니 카르멘의 시니컬한 목소리는 훨씬 더 음산하고 치명적으로 들려온다.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러 연기를 거두고, 조소를 머금는다. 불길은 카르멘의 운명과도 같아 그녀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한다.
음악은 불꽃과 함께 점점 더 번져 나가면서 청중석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닿았다. 영혼으로 파고드는 뜨거움은 피부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변덕스럽고 파멸적인 카르멘의 노래를 주축으로 하여 변주가 이어졌다. 박자도 복잡하고 구현해 내기에도 복잡했다.
보다 화려하게 곡을 꾸미는 음형들이 끼어들면서 음악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조금만 잘못한다면 그냥 번잡한 소음이 되어 버릴 정도로 균형 감각이 중요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마치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절묘하게 호흡을 맞추며 곡을 연주했다.
타티아나가 주 멜로디를 연주하며 카르멘의 이죽거림을 나타내면 아나스타샤는 카르멘의 발에 닿는 무언가를 뻥 차서 날린다. 대담한 표현이지만 듣기에 즐겁다.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의 해석에 찬사를 보내며 음악을 즐겼다.
제멋대로 크게 노래를 하기도 하고, 작게 속삭이기도 하던 카르멘은 곧 노래하는 것도 싫증 났다는 듯 손수건을 휙 던지고는 뒤돌아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집시들이 등장해서 노래를 불렀다. 4분의 2박자로 이어지는 유쾌한 춤곡이다.
카르멘의 아바네라만큼이나 유명한 곡이었다. 여기에 피아노 편곡은 기묘한 불협화음까지 섞여서 특별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피아니스트의 기교 역시 엄청난 수준으로 요구한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건반을 연타하고, 오르내리며 수십 명이나 되는 집시들의 모습들을 그려 냈다.
그 와중에도 한 번도 어긋나거나 잘못되는 일이 없다. 어느 한쪽이 밀려나거나 과하게 나서는 일 없이, 정확한 밸런스로 음악은 나아간다.
‘아나스타샤가 대단한데.’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감탄했다.
둘 다 대단하지만,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더 많은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예전부터 두 사람이 같이 연습하면서 연탄곡도 자주 연주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이렇게 온 신경을 연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녀와 손발을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작년에 함께 연주를 해 보면서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낀 바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타티아나와 호흡을 맞추었다. 에르네스트가 듣기엔 적어도 이 곡 안에서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한 사람이 연주하더라도 양손을 이렇게 균형감 있게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좋은 연주였다.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화려해져서 거의 축제나 다름없게 된 집시의 노래를 보란듯이 연주했다. 글리산도로 건반을 긁어내리고, 건반을 한꺼번에 몇 개씩 집어삼킨다.
타티아나도 더더욱 빠르게 연주를 이끌어 나가면서 이 환상곡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에르네스트는 환상적으로 흘러내리는 음악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면서 감탄했다.
“브라바!”
거대한 화성으로 곡이 마무리되고,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하고 미소를 짓고는, 일어서선 나란히 선다.
에르네스트는 두 친구에게 박수를 보냈다.
“마무리까지 멋졌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대기실로 들어온 뒤엔 칭찬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진심을 담아 두 사람에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치켜들며 대꾸했다.
“아무렴, 우리 둘이 한 연주인데.”
“……아무 말 하지 말걸.”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리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연주회 2부의 메인 프로그램은 정말 끝나게 되었다. 타티아나가 연주한 바흐로 긴 흐름을 정리하고 카르멘 판타지라는 매력적인 곡으로 입가심까지 마쳤다.
물론 이 뒤에도 앙코르 연주가 조금 있을 예정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이젠 성공적인 연주회를 자축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메인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충분하다면 다른 건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연주자였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도 약간 힘이 풀린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타티아나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물 마실래? 타티아나.”
“아…… 마실게요.”
“여기.”
옆에서 물어보지 않으면 스스로 목이 마르다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타티아나는 연주회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잠시 후, 발레리가 들어와 타티아나를 찾았다. 타티아나는 곧장 일어나선 발레리를 따라나섰다.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단지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모양이다.
“…….”
타티아나가 나가고,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남은 에르네스트는 괜히 테이블을 건드리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희 둘 피아노 듀오로 연주회 해 보는 건 어때? 그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든 생각이긴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의 듀엣이라면 듣고 싶어 할 사람이 정말 많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물었다.
“진담이니?”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말인데, 그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에르네스트는 실언을 한 것이 있나 다시 되짚어 보았지만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이야기했다.
“충분하지 않겠어? 편곡이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
“정말로.”
방금 연주한 곡도 그렉 엔더슨이라는 미국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듀오 파트너를 위해 편곡한 버전이었다. 에르네스트도 친구들이 듀엣 연주를 위한 편곡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생각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끔찍하게 어려운 곡을 몇 곡이나 이야기하며 당장 편곡해 달라며 농담을 걸어올 만도 한데, 아나스타샤는 진지하게 고민한 뒤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나중에 생각해 볼게.”
“뭘 그렇게 길게 생각하는데?”
“저 애가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뭘 고민하는 건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바라지 않는다는 거지?
에르네스트가 생각컨대 그가 편곡을 해 준다고 해도, 아나스타샤가 듀오 연주회를 하자고 해도 타티아나는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여 줄 사람이었다.
그 애가 어떤 애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나스타샤는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는 것처럼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닐걸.”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분명해.”
“하지만 난 네가 타티아나와 했었던 연주도 기억해.”
이야기가 살짝 어긋나는 것을 느낀다.
에르네스트는 작년 연말에 했었던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를 떠올렸다. 그 역시 그때의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청중석에서 지켜본 광경을 떠올리는지 약간 아련한 눈빛을 하며 작게 말했다.
“그건 정말 좋았지…….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난데없이 반년도 넘게 지난 연주를 칭찬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에르네스트는 얼른 그 칭찬을 도로 돌려주었다.
“방금 연주도 그만큼 훌륭했어.”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게다가 그 위로 약간의 피곤함이 뿌옇게 덮어 씌워져서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보다 뚜렷했다.
“에르네스트. 난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뭐?”
에르네스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말은 에르네스트가 발레리의 앞에서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그는 렌스키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에 대해 비웃는 의미로 감사를 표했다. 그 이면엔 독점욕 혹은 질투 같은 살짝 유치한 감정 또한 없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 연주를 양보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한다면서도, 삐뚜름하게 입술을 뒤튼다.
갑자기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한참 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보고도 잘 몰랐다. 몰랐었다.
“아나스타샤.”
“응?”
“너…….”
갑자기 든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일단 입을 열긴 했지만, 아나스타샤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할지도 헷갈렸다.
한참을 말을 머뭇거리던 에르네스트는 일단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잠깐만…… 아니,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녀에게 지금 해 줄 말은 없었다.
약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 무렵, 크리스티나가 대기실로 뛰어 들어오면서 아나스타샤를 찾았다.
“아나스타샤, 첫 번째 앙코르 준비해 줄래요?”
“알겠어요.”
아나스타샤는 명랑하게 웃으며 다시 찾아온 자신의 차례를 맞이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살면서 처음으로 피아노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 모스크바의 여명 2부 完 -
< 모스크바의 여명 3부 # 황장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