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54화 (554/1,277)

##  554화

리허설 그대로 흘러간 연주회는 예상 종료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에 끝을 앞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레리는 날 불러서 현 시각과 남은 여유 시간, 그리고 필요하다면 연장할 수 있는 시간까지 차례로 설명해 주었다.

혹시 우리가 시간을 더 쓰고 싶어 한다면 편의를 봐 주겠단 의미였다.

잠시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선물을 전해 드리는 것 외에 다른 걸 할 생각은 없어요.”

발레리는 그냥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는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마지막에 계획을 바꾸고 싶어 하고 계시는 분들도 간혹 계셔서 말입니다.

어차피 다시 청중분들과 마주할 테니 사인회를 하고 싶어 하신다거나.”

간혹 본 계획에 없었던 사인회를 갑자기 연주회 끝에 여는 연주자들이 있기도 하다.

여러 방법으로 팬서비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난 그 마음을 이해했다.

본래 난 사인회 같은 걸 할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번 독주회 때 내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 까닭이다.

청중들에게 음악을 전하고, 더 나아가 음악이 닿은 청중들에게서 반향으로 돌아오는 열기를 공유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무대 밖에서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오전에 하는 마티네 연주회는 길게 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었다.

하루 일을 모두 마치고 저녁에 관람하는 스와레 연주회와는 다르다. 모두를 언제까지고 연주회에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만 놓아주어야 한다면, 지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시간이 넉넉했어도 아마 안 했을 거라 생각해요. 제 친구들의 생각도 같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앙코르도 말입니까?”

“예. 되도록 연주회의 여운을 길게 남겨 드리고 싶어요.”

본 무대는 내가 연주한 바흐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고, 나와 아나스타샤가 연주한 카르멘 듀엣 연주가 사실상 앙코르 곡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더 무언가 덧붙이는 건 연주회의 완성도에 사족을 붙이는 일이 될 것이라고 에르네스트가 말했고, 때문에 우리는 아나스타샤를 마지막으로 딱 한 곡만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로 했었다.

지금 귀를 기울여 보니 막 홀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연주 소리였다.

그 피아노 소리는 내 모든 신경을 쏠리게 했다. 빨리 가서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었다.

내가 홀 쪽을 바라보자, 발레리가 붙잡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대로 크리스티나에게 전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만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발레리.”

난 얼른 대답하고는 발레리를 보내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 안엔 홀 직원 한 분과 에르네스트만이 있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연주 중인 무대에 집중하고 있지 않고 무언가 생각 중인 것처럼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의아했다. 두 사람은 늘 장난도 잦고 친하게 지내지만 그만큼 피아노를 연주할 때만큼은 서로의 음악에 진지하다.

한눈을 팔 이유가 없을 텐데. 난 가만히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왔어?”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같은 연주자로서 콘서트 매니저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는 건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의 목소리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앞세우면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덮어 버리려는 듯한 태도. 일견 프로의 태도이지만 동시에 아마추어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연주회 외에 생각할 만한 것이 있는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는 그냥 발레리와 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이후 일정에 대해서요. 변동 사항은 없어요. 아나스타샤를 끝으로 더 앙코르는 없이 마무리하는 것으로 괜찮으시죠?”

그는 연주회의 완성도가 마음에 안 들면 앙코르를 채워 넣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전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앙코르 없이 끝을 맺어도 흡족해할 터였다.

“그래…….”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앙코르라는 단어에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지만, 난 그런 그의 반응에 신경이 쓰였다.

“왜 그러시나요?”

“생각할 게 조금…….”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아니, 그건 아니야.”

에르네스트는 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모니터를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가만히 내버려 둬 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생각 때문에 그렇게 고민 중이냐고 직접 물어보면 단숨에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물어본다면 모를까, 지금 물어봐야 그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 같단 직감만 들었다.

난 혼자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발레리와 나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였는데,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고민에 빠지게 된 걸까?

딱히 생각나는 건 별로 없었다.

굳이 한 가지 꼽자면 같이 있던 아나스타샤와 무슨 일이 있는 경우 정도인데…….

각자 생각에 빠져 침묵이 흐르길 잠시, 이윽고 에르네스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라도 쳐야겠어.”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이것저것 머릿속에 가득 차 있을 때, 연주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내뱉곤 하는 말이다. 회피하는 말이기도 하고.

난 그가 고민에서 회피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 같았다. 약간 놀랍기도 하고,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해져서 연습실에 있는 피아노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서 900명도 넘는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겠다는 것도 조금 걱정스럽다.

에르네스트라면 언제라도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난 당장이라도 무대로 나갈 것처럼 목을 까딱이는 에르네스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에르네스트, 혹시 앙코르가 필요하다 생각하신다면 제가 나갈…….”

“내가 하게 해 줘.”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민으로부터는 회피했지만, 또 다른 분명한 확신이 있는 대답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난 그를 믿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고마워.”

에르네스트의 눈빛은 어느새 다시 연주자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난 대기실의 직원에게 부탁해서 청중석 아래에 있을 크리스티나에게 두 번째 앙코르가 있음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

무대에선 아나스타샤가 앙코르 곡의 하이라이트를 연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연주 중인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의 3악장. 흔히 터키 행진곡이라 불리는 곡이다.

물론 그냥 모차르트의 소나타만을 연주하는 건 아나스타샤에게 너무 쉬운 일인지라, 그녀는 훨씬 어렵게 편곡된 버전을 연주하고 있었다.

정말 복잡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였지만, 그녀의 기교는 이미 알캉의 에튀드를 완성도 있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굉장한 속도로 손이 도약한다. 옥타브 아르페지오도 아나스타샤의 손 아래에선 단선율 멜로디 연주와 다름없었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멍하니 모니터를 올려다보며 벽 너머로 들려오는 연주의 끝을 기다렸다.

이윽고, 엄청난 박수와 함께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다.

“앙코르!”

수많은 앙코르 요청이 메아리친다.

원래는 이 요청들에도 어쩔 수 없이 연주회를 끝마치려 했지만, 다행히 다음으로 나갈 연주자는 준비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고, 에르네스트는 손바닥을 앞으로 하며 그녀에게 향했다.

“하이파이브 하자고?”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그와 손을 마주치지 않고 의도를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다음 순서는 나거든.”

“연주하려고?”

“그래.”

“안 하기로 하지 않았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연주회 프로그램 회의를 마무리하고 앙코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도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부딪혔었다.

아나스타샤는 한 곡씩은 하는 게 좋다는 쪽이었고, 에르네스트는 연주회를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관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다툼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고 아나스타샤만 앙코르를 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의견을 바꾸니 아나스타샤로선 의아할 만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때 광경을 떠올리는지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뭐라 했었잖아.”

“그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젠 들으려고.”

아나스타샤는 의심에 찬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그에게 바턴을 건네주듯 손을 탁 쳤다. 그는 그대로 무대 쪽으로 향했다.

연호되던 앙코르 요청은 에르네스트가 올라오자 함성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모니터로 그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인사를 하는 것까지 보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연주할 생각이니?”

“아뇨.”

에르네스트를 끝으로 연주회는 끝이다. 난 확실하게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고생 많았어요. 아나스타샤.”

“응. 타티아나 너도.”

“앉아서 기다릴까요?”

“그럴까?”

우린 한 테이블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본다.

피아노 앞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건반을 내려다보더니 느닷없이 오른손으로 음을 쿡 찔렀다. 피아노가 소리를 뱉어 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 S139의 2번.

급박한 템포와 기묘한 화음이 뭉치며 혼란스러운 음악을 이룬다. 그 뒤엉키는 혼란 속에서 조화와 음악성을 끌어내서 피아노에 집어넣는다.

에르네스트의 음악은 그렇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만히 모니터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물었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멍한 눈으로 그녀가 이어 말했다.

“오늘 연주하면서 느낀 건데…… 난 역시 너희들과 피아노를 치는 게 좋아.”

난 아나스타샤가 그런 말을 해 준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저도요.”

“응…….”

에르네스트가 연주 중이긴 하지만, 가만히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나 역시 그녀만큼이나 이 순간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예전부터 전 피아노를 그저 고독한 악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솔직한 감상이자 객관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피아노는 다른 그 어떤 악기와도 쉽게 섞이지 못하는 독립성을 지닌 악기였다.

아나스타샤는 달리 말을 하진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견에 동의하고, 또 내가 이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난 이어 말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크게 변함이 없지만…… 피아노가 고독하다 해서 연주자까지 고독할 필요는 없단 걸 느끼곤 해요.”

세계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 중 한 명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강인한 타건과 주관이 뚜렷한 음악성으로 그 위치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외롭기에 협연을 자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난 홀로 연주하는 것이 외롭다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제 아르헤리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그런 것도 네 기억이 돌아오면서 생각이 바뀐 걸까?”

아나스타샤는 늘 이런 부분에 대해선 조심스러워한다. 난 그녀의 이런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전 여러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인걸요.

“몰랐던 걸 깨달은 게 아닐까요?”

“……그러니.”

“예. 하루하루 깨닫고 있어요.”

약간 풀어진 미소가 내게로 향했다. 내가 아나스타샤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듯, 그녀 역시 그러했다.

우리는 함께 마주 보고 웃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그렇다면 듀오 콘서트 같은 것도 같이 할까?”

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듀오 콘서트요? 언제요?”

“지금 말고. 나중에.”

“그러니까요, 나중에 언제요?”

이런 건 날짜를 분명하게 정하지 않으면 흐지부지 되곤 한다. 난 당장 내일이라도 좋으니 정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할 뿐이었다.

“나중에.”

현실적으로 당장은 연주회를 하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제안해 준 사실만 기억해 둬야 할 것 같다.

“언제든 좋아요. 정말 기대되어요.”

잊지 말아 달란 뜻으로 다시 말하니 아나스타샤는 그저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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