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55화 (555/1,277)

##  555화

에르네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앙코르도 끝났다.

우리는 앙코르의 함성이 잦아들길 잠시 기다렸다가 함께 무대로 나갔다.

연주자들이 같이 나온 것을 보곤 앙코르가 멎었다. 그러고는 기립박수만이 이어졌다. 난 무대 중앙으로 향하면서 청중석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감정들이 박수 소리에 섞여 쏟아진다. 물에 젖는 것처럼, 그 소리에 젖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바보처럼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앞서 걷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를 따라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

나란히 선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청중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냈다.

감사함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찬사다. 음악을 찾아 연주회에 와 주신 것에 대해, 그리고 열렬하게 보내 준 이 열정에 보내는 찬사.

다시 엄청난 소리의 박수가 무대를 울린다.

우리는 조금 더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지만, 연주자로서 무대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마쳤다. 이젠 내려가야 할 때였다.

분위기가 최고조에서 살짝 내려왔을 시점, 내가 먼저 뒤돌아 무대에서 내려왔다.

“브라비!”

“정말 훌륭했습니다.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니스트들.”

“잘했어요.”

대기실에 있던 관계자분들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연주회가 진행될 때만 해도 긴장감이 서려 있던 얼굴에 이젠 안도의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나 역시 모두를 향해 미소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이에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보람차군요.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계속되는 칭찬에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 혼자 받는 칭찬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함께 받는 것이었으므로.

저마다 한마디씩 건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티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자연스레 포옹했다.

“이런 자리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야. 타티아나.”

크리스티나가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를 내 어깨 위에 내려놓았다. 너무 포근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난 살짝 떨어져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음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초대해도 될까요? 크리스티나.”

“정말? 당연히 더더욱 환영이지!”

그녀는 그 어떤 말보다 기쁘다는 듯 다시 날 끌어안았다.

그렇게 연주회를 위해 열심히 힘써 준 사람들과 칭찬과 감사를 나누며, 막을 내린 무대 뒤의 분위기를 함께했다.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무척이나 즐거운 한때였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다음 순서가 남아 있었다. 뒤편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발레리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가와 말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마지막 일정만 남았으니…… 빠르게 끝마칠 테니 조금만 더 힘내 주십시오.”

사인회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연주회를 시작했을 때 행사에서 이야기했던 선물을 청중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직원분들이 해 주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돌아가는 청중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면서 직접 드리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그냥 갈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한 명당 150명 정도 맡으면 되나?”

“글쎄? 누구 인기가 제일 많은지 줄 길이를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

에르네스트는 현실적으로 숫자를 따졌고, 아나스타샤는 각자 줄 길이가 다를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실제 그럴지도 모르잖아?”

난 두 사람이 또 티격태격할까 싶어서 얼른 발레리에게 준비된 장소로 안내해 달라 부탁했다.

발레리도 이제 막 청중들이 홀 밖으로 나오지 시작했으니 빨리 가야 한다며 우릴 데리고 나왔다.

입구 쪽에 준비된 테이블로 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고는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린 포멀한 의상을 입고 있어서 눈에 띄기도 했다.

“에르네스트!”

“이쪽이요! 이쪽!”

“타티아나!”

이곳저곳에서 이쪽을 봐 달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사방에서 들려와서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이런 일도 자주 겪는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에 시선을 주면서도 똑바로 걸었다. 역시 익숙해지고 봐야 하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도 간간이 눈이 마주친 사람들과는 눈인사를 하는 것 같고, 나도 그녀를 따라 하기로 했다.

이윽고 우리는 나란히 길게 붙어 있는 테이블에 도착했다. 3명이 널찍하게 앉을 수 있게 의자가 세팅되어 있었다.

각 자리 옆에는 미리 준비한 쿠키와 초콜릿이 하나로 포장되어 잔뜩 쌓여 있다. 협회에서 우리의 기획을 듣더니 특별히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자리에 앉자 발레리와 직원들이 청중들을 안내했다.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간 분들도 많지만 그래도 수백 명이 줄을 서니 줄이 굉장히 길었다.

난 내 앞에 첫 번째로 줄 선 사람을 보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미소로 올려다보며 선물을 건넸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저, 저야말로요…… 연주 잘 봤어요.”

그는 조심스레 내게서 쿠키와 초콜릿을 받아 갔다. 곧바로 그다음 사람이 내 앞으로 왔다.

준비한 것들을 건네고,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빠르게 끝내니 사인회처럼 오래 걸리진 않았다.

혹시 중간에 사인을 요청하는 분이 계실까 싶었지만, 다행히 오늘 사인회는 없다는 안내를 모두들 이해해 주신 것 같다.

우리가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키와 초콜릿이 줄어듦과 동시에 우리 테이블 옆엔 꽃다발 등의 선물 등도 쌓이기 시작했다.

한 여성분께선 내게 꽃을 주시곤, 쿠키를 보고는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주자에게 무언가를 직접 받아 본 적은 처음이네요.”

연주회에서 이런 걸 받아 본 적은 있으실 것이다.

인터미션 사이에 있는 리셉션 등에선 샴페인과 간단한 디저트 등을 제공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연주자가 직접 건네주는 일은 드물긴 하다.

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음악을 받으셨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

“이건 무대에서 내려온 저희가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여겨 주세요.”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내 말에 대답하고는 받은 것들을 꼭 쥐었다. 난 그녀의 마음에 오늘의 음악도 흐르고 있길 바랐다.

잠깐 동안 수십 명이 날 스쳐 지나갔다.

난 그 모두를 기억할 수 없지만, 그들이 보내오는 눈빛과 목소리에서 2시간 동안 함께했었던 음악으로 이어져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기쁜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어떤가 싶어 잠깐 틈이 난 사이 살짝 옆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중이었다.

“저 이거 안 먹고 영원히 간직할게요.”

“……되도록 드셔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방부제 뿌리면 돼요.”

“…….”

내 앞에 막 선 사람이 옆의 말을 듣고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제발 바로 드셔 달라 부탁해야만 했다.

“모두 가셨나요…….”

선물을 전달하는 행사는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끝났다. 사인회라면 족히 한 시간도 넘게 걸렸을 텐데, 겨우 30분 정도 만에 끝났다.

오후 1시경이라 이후 볼일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정확하진 않지만 에르네스트가 계산했던 것처럼 920명 중 반 정도가 남아서 선물을 받아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 앞에 선 줄의 길이도 거의 비슷해서 다 같은 시간에 끝났다.

어느 한 사람의 앞에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면 기다리면서 심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테이블 위엔 온갖 선물들이 가득했다. 이걸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나 하는데 직원분께서 직접 집까지 가져다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셨다.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인회보다 나은 것 같네. 이런 거 준비하는 데에도 돈과 품이 드니 문제이지만.”

쿠키와 초콜릿은 작은 선물이지만 수백 명 치를 준비하긴 결코 쉽지 않다. 협회에서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우리가 직접 할 순 없었을 테지.

여러 도움과 기회가 맞아서 이루어진 연주회였다. 난 꽃 한 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좋은 행사였다고 생각해요. 1부에서 했었던 것도요.”

“다행이네.”

청중들을 무대로 불러내어 함께 연주를 하는 건 전부 에르네스트의 아이디어였다.

그 아이디어는 우리 세 명의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청중들의 미소와 그를 향한 인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모든 게 다 끝난 후에야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발레리가 말했다.

“모두 끝마쳤군요. 타티아나.”

“발레리. 마지막까지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하하, 그리고 전 아직 일이 남아 있죠.”

발레리는 콘서트 매니저로서 아직 이것저것 할 일이 있는 듯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가 싶어 올려다보니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신경 쓰진 않으셔도 됩니다. 이후 일들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만 관계자실에 가 보시죠. 기다리는 분들을 그쪽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우릴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면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난 친구들을 이끌고 관계자실로 향했다. 이 홀에서도 다용도로 사용되는 방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안에 흐르던 이야기가 멈추고, 네 쌍의 눈빛이 이쪽으로 향했다.

“어머, 이제 왔구나!”

그곳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사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어쩜 이렇게 예쁘니? 아까 같이 피아노 칠 때 사진 찍고 싶어서 큰일 날 뻔했단다.”

오늘도 와 주신 에르네스트의 어머님은 정작 에르네스트를 빼 놓고 나와 아나스타샤의 칭찬만 잔뜩 해 주셨다.

에르네스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심 섭섭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언제나 똘망똘망한 사샤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엄마가 진짜 핸드폰 켜기까지 했어요.”

“아하하하, 사샤가 말려 줬나요?”

“예.”

난 고맙다는 뜻으로 무릎을 굽히고 사샤를 살짝 안아 주었다. 사샤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나보다 더 커질 것 같아.

사샤를 놓아주고 고개를 드니 구세프 선생님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릴 쭉 둘러보시더니 짧게 말씀하셨다.

“잘했다. 세 사람 다.”

조금 퉁명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오실 정도로 우릴 깊게 생각해 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분이다. 난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물론 인사뿐만은 아니었다.

“저기, 제가 오늘은 감사한 마음으로 오찬 자리를 준비했어요. 오후에 크게 바쁘신 일이 없으시다면 함께해 주셨으면 해요.”

성대하게 준비한 건 아니었다. 근처의 레스토랑에 테이블을 몇 개 빌렸을 뿐이다.

다행히 모두 흔쾌히 내 초대에 응해 주었고, 우린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최고급의 파인다이닝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모두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물과 음료 등이 나왔다. 각자의 잔을 채우고 나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권했다.

“건배사는 선생님이 해 주시는 게 어때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구세프 선생님은 하실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는지, 낮게 헛기침을 하시더니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세 음악가를 위하여.”

선생님이 가끔 이렇게 말씀해 주실 때마다 난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떨리는 걸 참으면서 나도 잔을 들었다.

그렇게 짧은 건배가 끝나고,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환담이 이어졌다. 대부분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나저나 방학엔 뭐 하니? 타티아나. 연주회 일정이라도?”

“연주회 계획은 없어요. 사실 이번 것도 빠르게 준비한 거라…….”

“그래?”

난 연주자 대기실에서 크리스티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만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직접 가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분들도 뵙고 싶었고.

그런데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구세프 선생님은 딱딱하게 말했다.

“지금은 딴생각 말고 내년 콩쿠르나 준비해라. 타티아나.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선생님은 연주회보다는 올림픽처럼 긴 주기를 가지고 돌아오는 콩쿠르에 집중하길 원하는 분이었다. 난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죠.”

내년이면 우린 열일곱 살로 국제 콩쿠르에 참가할 최소 나이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딱 맞춰 돌아오는 거대 콩쿠르들이 몇 개 있다.

만약 거기에서 입상하게 된다면 최연소 콩쿠르 입상자의 타이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 입장에선 결코 허투루 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만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나는 다른 의견이야.”

“……?”

어안이 벙벙해져서 돌아보니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시간이 없는 건 방학 시간이 없는 거지. 이 긴 방학 내내 악기만 붙잡고 있는다고? 슬럼프 와, 슬럼프.”

얼핏 보기에 그냥 놀라는 식으로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난 그녀의 말에서 실제 겪은 경험과 노하우 등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가볍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래도 구세프 선생님은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이봐, 크리스티나. 내 학생들한테 무슨 소리지?”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좋지만요, 9학년 여름방학은 한 번뿐이잖아요? 어디 여행이라도 짧게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단 이야기죠.”

“여행?”

“그래요, 적어도 전 그랬어요.”

구세프 선생님은 한 마디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크리스티나가 오케스트라의 악장이라는 걸 생각하고는 말을 아끼시는 듯했다.

그녀는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충분히 일가를 이룬 사람인 것이다.

선생님은 결국 삐딱하게 한마디 더 쏘아붙이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학교 다닐 때 피아노과가 아니었던 걸 다행인 줄 알았으면 좋겠군.”

“물론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제 때도 과 너머 선생님의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뭐라고?”

크리스티나는 중앙음악학교 바이올린과 출신이었다.

그녀는 당시 학교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낱낱이 이야기해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히죽 웃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난 두 분을 보며 웃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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