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6화
오찬을 마치니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부터 한나절이 온전히 남아 있으니 무엇을 해도 괜찮을 시간이지만,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데다가 모두들 집중하여 연주에 임한 바람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럼 갈게.”
에르네스트가 쿨하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난 여전히 턱시도 차림인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주일 동안 열성적으로 무대를 준비해서 오늘 완벽하게 선보였다.
막바지엔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잘 연주하지 않던 앙코르 연주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잘 가요, 에르네스트. 푹 쉬세요.”
“글쎄.”
그런데 그는 인사를 평범하게 받지 않았다. 이런 점은 구세프 선생님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말을 하면 화내겠지.
푹 쉬지 않으면 무엇을 할 거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가 장난스레 웃었다.
“악보 붙잡고 있을 것 같은데. 여기 남아 있는 것들을 좀 그려 놔야 할 것 같아.”
그러면서 손가락을 들어 자기 머리 쪽을 쿡쿡 친다.
오늘 무대에서 겪은 일들.
홀의 어쿠스틱과 청중들의 열기에 영향을 받은 음악이 변형되며 그 공간에만 존재하는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변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 피아노 연주자였다.
거기에다가 에르네스트는 작곡가이기도 했기에 보이는 또 다른 풍경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풍경을 봤을지, 그걸 어떻게 악보 위에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그런가요.”
힘든 연주회가 끝나고도 다시 음악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난 이해한다.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이해해 준다는 걸 느낀 것 같았다.
이젠 보내 주어야 할 때였다. 난 그의 어깨 너머를 보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기다리세요.”
“아, 그래. 가야겠어.”
“나중에 전화할게요.”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손을 슥 흔들고는 뒤돌았다.
나도 그를 보내고 뒤돌아서니 크리스티나와 구세프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한때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긴 했으나 다루는 악기가 다르기 때문에 접점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구세프 선생님과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두 분에게 다가갔더니 크리스티나가 한쪽 눈을 윙크하며 물었다.
“저 애를 그냥 보낸 걸 보니까, 지금부터 어디 놀러 가려는 건 아닌 것 같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도 그렇고, 나도 오늘은 쉬면서 각자의 무대와 음악을 복기하고 점검하는 걸로 끝낼 것 같다.
연주자인 우리는 그렇게 되겠지만, 사회자인 크리스티나는 어떨까? 난 그녀에게도 물어보았다.
“크리스티나는요?”
“난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지. 곧 열차 시간이야.”
여유를 두고 차표를 예매했다면 집으로 초대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곧 시간이라고 하는 걸 보니 정말 일정에 딱 맞춰 스케줄을 잡은 모양이다.
크리스티나도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오늘 시간을 내준 것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옆의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그때까진 학교에 가서 구경도 좀 하고, 선생님이랑 이야기도 하려고 해.”
“학교로요?”
“응.”
두 분이 이야기 속엔 자연스레 중앙음악학교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었다. 직접 오랜만에 학교에 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구세프 선생님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런 크리스티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학교로 갔다가 역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내가 하마.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라.”
“말을 어쩜 그렇게 하세요? 신경 쓰지 말라니. 타티아나가 그럴 애처럼 보여요?”
“제발 조용히 좀 하면 안 되나?”
퉁명스레 말하곤 있지만 나도 크리스티나도 선생님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내심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내 착각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내 눈빛마저 마음에 안 드는지 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가 봐라. 타티아나.”
“예,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해요.”
“감사할 것도 많군.”
끝까지 툴툴거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크리스티나와 함께 떠났다. 오늘 학교를 다시 보면서 두 분이 좋은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남은 건 두 명뿐이었다.
“우리도 갈까요? 아나스타샤.”
“그러자.”
다시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여전히 연주회용 드레스 차림이긴 하지만, 렌탈한 게 아니라 구매한 것이기 때문에 도로 드레스룸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우선 아나스타샤를 데려다주기 위해 프리스넨스키 지구로 향하는 길, 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진짜 방학 시작인가?”
“그렇겠죠?”
내가 연주회에 끌어들인 바람에 2주일이나 빠져 버렸지만, 아직 두 달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앞으로의 시간을 따져보는지 곰곰이 생각하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도 별로 달라진 건 없겠네. 어차피 피아노 연습만 하게 될 것 같으니까.”
아나스타샤는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과는 달라서 본래 방학에도 다양한 활동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지금 반응은 작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우리에겐 중요한 콩쿠르가 꽤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에 집중해야 할 시즌이기도 했지만……. 난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응?”
막 떠오르는 생각과 단어들을 이것저것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이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난 작년에 아나스타샤가 어떤 생각으로 날 보고 있었을지, 알 것 같았다.
한참 고민 끝에 나온 말 역시 작년 그녀의 말과 닮아 있었다.
“며칠 이따가 주말에, 어딘가 놀러가지 않으실래요?”
아나스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역시 지금 무언가 입장이 바뀐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녀 역시 날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난 이번에도 네가 빅토르와 소로킨, 자하르를 휴가 보내고 연습실에 틀어박히리라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나도 연습이나 하려 했지.”
“제 경호원 분들의 휴가는 다음 주로 되어 있어요.”
아나스타샤의 예상대로 다음 주부턴 전부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때문에 이번에 나갔다 온다면 그 뒤로 최소 이주일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피아노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먼 곳으로 가긴 어렵겠지만, 어때요? 이번 연주회에 대한 답례도 해 드리고 싶어요.”
“답례? 그런 건 괜찮은데.”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당연하지 않다. 아나스타샤가 내 부탁에 따라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 준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에르네스트도 부르려고?”
“……둘만 갈까요?”
연주회에 대한 답례라면 그도 부르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둘이서만 놀길 원한다면 그것도 상관없었다.
에르네스트에겐 따로 답례를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해 본 말이라는 듯 깔깔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아하하, 아냐. 그럼 안 돼. 그 애한테도 답례를 해 줘야지. 고맙잖아.”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조금 두서없이 늘어서 있던 생각에 정리가 섰다. 에르네스트에게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른하게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나스타샤의 집 앞이었다.
그녀는 경쾌하게 문을 열고 나서더니, 뒤돌아보며 말했다.
“주말엔 시간을 비워 두고 있을게. 구세프 선생님은 놀 생각 말고 연습이나 하라고 하셨지만.”
“전 크리스티나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응, 나도 그래.”
우리는 주말에 만날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중에 봐,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난 빅토르에게 이야기했다.
“집으로 가요. 빅토르.”
“저기, 아가씨…….”
“예?”
빅토르는 차를 바로 출발시키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 휴가가 다음 주라는 건 처음 듣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말해 드린 적이 없으니까.
난 순순히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지 않고 농담조로 말했다.
“빅토르 본인께서 휴가가 언젠지도 모르시면 어떻게 하나요?”
“아니…….”
휴가를 준다는데도 억울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재미있었다. 난 이전처럼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짧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후후, 오늘 말해 주려 했었어요.”
“…….”
빅토르는 별 이견 없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
집으로 돌아온 뒤엔 곧바로 씻고 쉬는 대신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에르네스트가 머릿속에 있는 걸 악보에 그려 놔야겠다고 한 것처럼, 나 역시 확인해 봐야 할 것들이 조금 있었다.
나제즈다는 오자마자 또 연습이냐며 기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다.
딱 30분 정도 그렇게 오늘 연주하고 듣기도 했던 모든 음악을 다시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난 느긋하게 평소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드레스를 벗어 놓고 목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랜 집중으로 지쳐 있던 신경이 따뜻한 물에 노곤노곤 녹아 풀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정원에 나와 앉아 있으니 불과 몇 시간 전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만 같다.
이대로 증발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햇빛을 즐기고 있자, 벨카가 다가와선 어리광을 부렸다. 놀고 싶다는 것 같은데, 정말 힘이 없었다.
“……산책은 싫어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왕.”
벨카는 내 말을 알아듣고는 그냥 내 옆에 앉았다. 난 벨카를 쓰다듬으면서 다시 멍하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갈 평화는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스마트폰이 벨소리로 날 부르기 시작했다. 발레리였다.
“발레리.”
- 하하, 피곤하실 텐데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마지막 보고 전화라 생각해 주시길.
발레리는 이후에 홀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일을 처리한 모양이다.
연주회 실황 녹화 영상을 관리하는 일이나, 우리에게 온 선물들을 다시 분류하고 가져다주는 일 등 남은 일들이 꽤 있었다.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한 뒤,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어 말했다.
- 그리고 렌스키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후에도 그와 만나셨나요?”
그냥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발레리가 어떻게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은 모양이다.
발레리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번에도 짧게 이야기했다.
- 렌스키는 잠시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 있겠다 했습니다.
“……외국으로 가나요?”
-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활동은 쉬려는 것인지…… 그런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발레리의 말만 들으면 렌스키가 나와 아나스타샤를 피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 하지만 협회에서 제명은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 하더군요.
“…….”
- 언제든 제명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의외였습니다.
난 조용히 침묵했다.
아직 렌스키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진 못하겠다. 그가 연주회를 어떻게 봤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피곤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버리지 않고 마주한 일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나에 반해 전화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기색은 살짝 삐딱하다.
발레리는 이 상황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마디만 하면 렌스키에게 억지로라도 사과를 받아 올지도 모른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난 확실하게 말해 줄 필요를 느꼈다.
“거기까지 듣겠어요.”
- ……듣기 싫으신 이야기였습니까?
“아니에요.”
난 렌스키의 이야기를 들어도,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렌스키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제가 이야기를 듣길 바라지 않을 거예요.”
- …….
발레리는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도 서서히 안정되었다. 내 말이 옳다는 걸 그 역시 느낀 것이다.
- 알겠습니다. 타티아나.
“고마워요.”
- 이만……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긴 한숨을 내쉬며 벨카의 목덜미로 손을 내려놓았다.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벨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머리를 내어 준다.
그래도 나는 혹여나 거칠게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