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7화
에르네스트는 어머니, 동생과 택시를 탔다.
좌석에 머리를 파묻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살짝 눈을 감았다. 어둠 위로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오늘 즉흥 연주를 하면서 얻게 된 몇 가지 선율, 그리고 연주회장의 분위기…… 타티아나가 연주에 임하는 태도, 아나스타샤가 했던 말과 거기에 담겨 있던 감정.
앙코르 연주를 하며 음악 밑에 묻어 두었던 생각들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고 저마다 떠다녔다.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재빠르게 낚아채서 필요한 건 차곡차곡 쌓고 필요 없는 건 멀리 던져 버렸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무엇을 내던질 수 있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눈을 감고 생각에 파묻혀 있자 어머니 이자벨라가 조용히 물었다.
“연주회가 저녁이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구나.”
저녁 시간이었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왔을지도 모르고, 오찬이 아니라 파티를 했을 수도 있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그냥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조금 하고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눈을 뜨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별로요.”
“왜 시큰둥하니?”
에르네스트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이어진 이자벨라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역시 작곡이 잘 안 됐니?”
“……네?”
눈을 뜨자 이자벨라가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작곡에 대한 것을 묻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손으로 목 옆을 눌러 스트레칭하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이자벨라는 이 연주회의 주 프로그램이나 기획에 대해 모르고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내용을 모르고 있었더라도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자벨라는 자신이 예상하고 있었던 내용을 연주회가 끝난 뒤인 지금에서야 천천히 이야기했다.
“저번에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직접 와서 널 찾았잖니? 난 그게 새 곡을 작곡해 달라 부탁한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그냥 연주자로 참가해 달란 거였어요.”
“그랬니?”
이자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르네스트는 어머니가 착각하실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느닷없이 두 친구가 찾아오고 그 후로 에르네스트는 연주회 준비에 나섰다.
계속 작곡에만 매달리고 있던 에르네스트였으니 작곡가로서 연주회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해 불과 몇 주 전에 본 적도 있었고.
“난 타티아나가 이번에도 네가 쓴 곡을 연주할 줄 알았지 뭐니.”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겨울의 표리. 그 곡은 타티아나에게 헌정되어 그녀의 손에서 초연되었다. 이자벨라는 그 일을 굉장히 기뻐했었다.
하지만 매번 그녀에게 곡을 헌정하고 초연을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에르네스트의 두 번째 곡은 완성되지도 않았다.
이번엔 정말 피아노를 다룰 수 있는 연주자로서 도와준 것이었고, 이자벨라가 약간 착각한 것이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착각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안 되어서 바흐를 연주했고요?”
“그래서 네 기분이 별로고.”
“왜요? 연주회도 완벽했는데.”
“연주회가 완벽한 거랑은 별개잖니? 내가 에르네스트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에르네스트는 뜨끔함을 느끼며 대꾸했다.
“……저 기분 좋은데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걸? 사샤에게 물어보렴. 얘, 사샤. 네 형 기분이 어때 보이니?”
이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사샤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툭 이야기했다.
“빵 대신 토마토를 먹은 표정이야.”
“……뭐니 그게?”
“요즘 시 배우냐? 사샤.”
하지만 사샤는 그 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농담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동생이 그냥 스마트폰에 신경이 팔려서 아무 말이나 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샤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위를 잘 살피는 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동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샤의 말을 듣고 나니 진짜 입맛이 신 것 같기도 하다. 황당했다.
이자벨라는 사샤의 말은 대충 접어 두고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할 말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애써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인상 쓰지 말렴. 아까 타티아나도 은근히 네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러니?”
“……제가 그랬어요?”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앞에서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세심한 그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걱정을 끼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미안했다.
그의 표정을 본 이자벨라가 이어 말했다.
“그래. 그 착한 애가 걱정하는 것도 몰랐니? 에르네스트.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있으면 사나워 보인단다. 타티아나에겐 걱정 끼치지 말아야지.”
그가 타티아나와 친하게 된 이후로 아버지 스테판은 상당히 직접적으로 베르체노프가와 베샤스트니흐의 오래된 인연을 언급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신경 쓸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 말을 무시했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다 보니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에르네스트는 음악가로서 타티아나와 함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이에 음악을 두고 있을 땐 음악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타티아나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적어도 미워하고 있진 않다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에르네스트는 누가 봐도 명확해 보이는 모양이다.
“…….”
에르네스트는 딱히 거기에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깊은 경애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2년 동안 그 애와 함께한 시간들은 에르네스트를 음악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거듭나게 해 주었다. 그는 그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없었다면 그 역시 지금 작곡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피아노도 똑바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에르네스트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타티아나 덕분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타티아나와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있으면서 어떻게 불리든 지금은 큰 상관이 없지만, 만약 그녀가 허락만 한다면 이 관계에 더 분명한 이름을 붙이고 싶기도 하다.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도 이상하지 않은 건가?
“…….”
저택으로 돌아와 계단을 오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에르네스트는 복잡한 생각과 의심들을 정리하지 못했다.
복잡한 것뿐만이 아니라 아프기까지 했다. 이상하다거나, 의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그의 기분을 어두운 나락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한 번도 이상한 아이라 생각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건 그렇게 여길 생각이 없었다.
10년 넘게 봐 온 아나스타샤는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으니까.
애초에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와의 관계에 친구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이길 바랄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가 전부 그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정확한 말을 한 마디도 안 했고, 단지 에르네스트가 보인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슬쩍 내비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 감정은 거짓으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확하게 와닿았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는 책상 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오랜 친구인 아나스타샤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거의 전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묘하게 태도가 삐딱해졌는지, 은근히 타티아나와 관계를 도와주려는 것처럼 굴다가도 갑자기 이유 없이 짜증을 내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에르네스트와 어떤 것이든 간에 대결을 해서 승부를 내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에르네스트는 점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있길 바라지 않았다.
“……형, 옷 안 갈아입어?”
책상 위를 보며 생각에 잠긴 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사샤가 살그머니 들어와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에 들어가선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인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어린 동생을 돌아보았다.
“…….”
사샤도 의미심장한 경고를 한 적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보고도 모르는 것이 있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상대도 안 될 것이란 경고.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라 했다.
그 말을 떠올리자, 학교에서 음악사 시간에 음악가들의 생애에 대해 상세하게 배웠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음악을 다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단순한 행적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부분까지 상세하게 파고든다.
가족관계, 종교관, 성격, 버릇, 취향 등등 한 사람에 대한 요소들을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들을 읽고 배운다.
그러면서도 수업에선 그 어떤 것도 특별하게 다루지 않았다.
사샤가 전부 옳았다.
왜 당연하게 공부했던 것을 그동안 상상도 못하고 제외시켜 놓았는지 모르겠다. 시야를 넓게 하고 보았다면 충분히 미리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묻고 싶었다. 넌 알고 있었어? 라고.
“……갈아입어야지.”
“씻을 거야?”
“그래.”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한마디에서 많은 것들을 느꼈지만, 그건 여전히 그의 추론에 머물러 있다.
어떤 일이든 간에 추론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어린 사샤조차도 알고 있는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혼란스럽다면, 아나스타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녀라면 솔직하게 말해 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에르네스트에게라면.
“…….”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었지만, 여전히 깜깜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생각한 대로 추진해 나가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구세프 선생님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지금은 딴생각 하지 말고 내년 콩쿠르에나 집중하라던 말.
그냥 아무 생각 않고 그 말대로 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 느낀 것들을 모른 체하고 평소처럼 지내는 것도 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정하게 에르네스트를 대하려 애써 온 아나스타샤가 어느 순간 지쳐 버린다면, 그땐 훨씬 안 좋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에르네스트에게 보이는 피로감은 오늘처럼 선을 넘어 전해져 오기도 했다.
그게 폭발해 버리면, 세 사람은 이전처럼 지내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단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 좋아함이 어떤 좋아함인지 에르네스트는 이제 확신할 수도 없지만, 이 관계를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타티아나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바람을 깨고 싶지 않았다.
‘돌겠는데…….’
에르네스트는 턱시도 상의를 막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는 또 책상을 짚고는 멈춰 섰다.
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이 현재 그의 행동에도 제약을 걸어온다. 누군가 강제하는 일은 전혀 없는데도 에르네스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에르네스트는 눈만 돌려 스마트폰 위에 뜬 발신자를 확인했다. 타티아나였다.
이 와중에도 그녀가 전화를 해 준 것이 기뻤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자신이 단순하다고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 에르네스트? 저예요.
청량한 목소리가 그를 찾는다. 에르네스트는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