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58화 (558/1,277)

##  558화

에르네스트는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의지하듯 고개를 들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작은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느꼈을 때, 타티아나가 갑자기 휙 대화를 열었다.

- 오늘의 풍경을 악보에 그리는 일은 끝났나요?

상냥한 목소리였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책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완전히 다른 일에 신경을 빼앗겨 있었다.

음악을 불성실하게 대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고, 타티아나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에르네스트는 짧게 대꾸했다.

“아직.”

- 그래요? 미안해요. 그럼 이따가 다시 전화할…….

“아니, 끊지 마. 타티아나.”

어차피 지금 끊는다고 해서 바로 펜을 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그녀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냥…… 나중에 하게. 전화는 왜? 무슨 일이야?”

용건을 묻자 그제야 타티아나는 잠시 주저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 주말에 시간 있으시나요?

“……어?”

분명히 연주회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되물었다.

“갑자기?”

- 갑자기이긴 하죠……. 그래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타티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 이번 연주회에 대한 답례로 셋이서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은데…… 어떨까요?

“셋?”

- 예. 저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까지 세 명이요.

안 그래도 이 세 명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말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둘이서 놀다 오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넌지시 빠져 주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그는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떠한 기망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괜히 머리를 굴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티아나의 답례라는 건 있는 그대로의 의미다. 다른 건 없다.

“갈 수 있어.”

-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내일…… 아니, 모레 즈음 제가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시간만 비워 주세요. 아셨죠?

에르네스트가 긍정적인 답변을 하자 타티아나의 목소리에 금방 생기가 깃들었다.

한동안 그녀는 주말까지 무엇을 계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던 타티아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살짝 진지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 연주회도, 준비하는 일주일도 모두 좋았지만…… 그만큼 즐거운 주말이 될 수 있었으면 해요. 에르네스트.

타티아나는 하루하루를 기적처럼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로 말을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에 감사하라는 격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말이었지만, 타티아나같이 정말 그 격언을 실천하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흔하게 볼 수 없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와닿는 감사를 느끼곤 했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말했다.

- 이만 끊을게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방해라니? 아니야.”

- 후후.

그녀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저 어딘가로 옅어져 갈 즈음, 전화가 끊어졌다.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타티아나와 이야기하면서 생각의 타래가 조금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에르네스트에게 직접적으로 부딪혀 올 날이 온다.

그때 에르네스트는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진지하게 아나스타샤를 마주 볼 생각이었다.

한승우나 다른 녀석들이라면 또 모를까, 아나스타샤는 의외이긴 했다. 그러나 바뀐 건 그다지 없었다.

“후…….”

에르네스트는 대충 걸쳐 놓은 턱시도 상의를 다시 옷걸이에 펴서 걸었다.

깨끗하게 해 놓고, 일단 씻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곡을 쓰며 오늘 하루를 정리해야 했다.

오늘을 대충 넘긴다면 이후에도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오늘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떴다. 혹시나 해서 알람을 두 개나 맞춰 놓았는데 필요가 없어졌다. 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토요일 새벽이었다.

“…….”

이불 속에서 뒹굴어도 되는 시간이지만, 눈을 뜬 나는 습관처럼 길게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깨워 나갔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지난 며칠간 오늘을 위해 얼마나 고민했었는지 모른다.

처음엔 조금 멀리 나가는 걸 생각해 봤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전용기만 쓸 수 있다면 꽤 먼 곳까지도 갈 수 있었다.

저번에 루슬란 오빠와 함께 당일 여행으로 야쿠츠크에 갔다 온 적도 있었고.

하지만 여행지를 물색해 보다가 이건 이것대로 마음 편히 쉬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보단 휴양 쪽을 살펴보았다. 휴양지로 유명한 소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하면서 이곳저곳 알아보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마침 잘되었다면서 티켓을 몇 장 주었다.

비즈니스적으로 아버지와 연관이 있는 분께서 주신 VIP 초대권이라고 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차로 갈 수 있는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곳이었다. 특별히 멀리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에게도 의견을 물어 보았더니 둘 모두 괜찮다고 했고, 그렇게 일정은 결정되었다.

“…….”

이 정도로 답례가 될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걸로 모두 끝난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그저 가볍게, 하루 놀러 갔다 오는 것으로 기분을 환기시키고 다시 방학 동안 피아노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난 가볍게 아침 연습을 조금 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나제즈다가 머리 하는 것을 조금 도와주었다.

여름이라 얇은 옷차림을 했지만,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에도 오래 있을 것 같아서 니트로 된 카디건도 하나 챙겼다. 충분할 것 같다.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소로킨과 빅토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잘 부탁할게요. 소로킨, 빅토르.”

“잘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빅토르가 멋스럽게 인사하며 날 안내했다.

차에 올라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평소와 달라진 건 없었다. 소로킨은 늘 가던 길로 차를 몰았다.

난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서도 이제 창밖을 보고 여기가 대충 어디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조금 지나자 아나스타샤가 사는 곳 앞에 도착했다. 아나스타샤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들며 다가와 차에 올랐다.

“오늘 생각보다 덥지? 타티아나.”

“맞아요. 그래도 비가 안 와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사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갈 곳이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다시 익숙한 도로와 도로를 지나, 에르네스트를 데리러 갔다.

그 역시 시간에 맞추어 근처에 나와 있었다. 차가 잠깐 멈춰서 데리고 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안녕.”

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에르네스트.”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셔츠와 슬랙스로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살짝 캐주얼한 연주회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같이 보인다. 청중이 아닌 연주자로도.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를 반기더니 문득 고양이처럼 미소를 지으며 의뭉스레 말했다.

“다행이야.”

“뭐가?”

“반팔 티셔츠 입고 왔으면 바로 쫓아내려고 했거든.”

“……불합격이야?”

“그래. 거기에 샌들이라도 신고 왔으면…… 으으.”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의 평소 스타일은 나도 잘 안다.

그는 아무리 편하게 다녀도 샌들은 안 신을 사람이었다. 그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내가 평소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아나스타샤.”

“그냥 갑자기 취향이 그렇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럴 일 없어. 말이 되는 소릴 해 좀.”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했다.

아나스타샤는 심심한데 잘되었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워스트 패션에 대한 호불호를 물었고, 에르네스트는 대충 대답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음악 이야기를 할 땐 서로 그렇게나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었는데, 친구로 마주하니 진지함보단 농담과 실없는 이야기들만이 오간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난 중간에 끼어들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 가만 웃으며 지켜보았다.

우리 셋을 태운 차량은 모스크바 서쪽으로 향했다. 여러 구역을 지나 다다른 곳은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크라스노고르스크 지구였다.

모스크바 강이 굽이쳐 흐르고 높은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거 지역으로 보이지만, 모스크바 강을 두르고 있는 만 쪽으로 향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여긴 처음 와 보는데.”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이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아예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면 나갔지, 모스크바 외곽엔 나올 일이 거의 없었던 까닭이었다.

크로커스 시티crocus city라고 명명된 거대한 건물들의 숲이 우리를 반긴다.

모스크바의 건설 개발 전문 기업인 크로커스 그룹이 이 일대를 매입해서 개발한 곳이었다.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그냥 모스크바 외곽의 위성 도시 수준이 아니었다.

크로커스 그룹은 비즈니스 센터, 대형 상가, 소매점, 레스토랑, 심지어 콘서트홀까지, 수많은 상업용 건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이 크로커스 시티에 위치했다.

특히 콘서트홀 같은 경우엔 가장 큰 크로커스 시티 홀이 무려 4000석이 훌쩍 넘는 초대형 홀로 유명하기도 했다.

난 곧장 이 거대한 콘서트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일단 잠깐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엄청 잘 지어 놨네. 저긴 뭐야?”

“글쎄. 백화점인가?”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티격태격했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도 이번엔 두 친구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야기했다.

“오늘 이곳 전부를 둘러볼 순 없을 거예요. 몇 곳만 골라 봤는데, 재미있을지 모르겠네요.”

약간의 걱정이 어린 내 말에 에르네스트는 어디라도 처음이니 괜찮다며 말해 주었다.

곧 우리는 크로커스 시티의 중심부로 들어섰고, 소로킨은 차를 천천히 주차장 쪽에 주차시켰다.

그리고 빅토르와 그는 우리가 다 내린 것을 확인하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호하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

덩그러니 우리 셋만이 남았다. 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디 먼저 갈 거야? 타티아나?”

“음…… 저쪽이에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멋들어지게 생긴 각진 건물이 서 있었다. 높이는 3층 정도인데 너비가 굉장히 넓었다.

미리 열심히 봐 둔 곳이었다. 가장 위에는 크로커스 시티 오셔너리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그 간판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말했다.

“내가 본 수족관 중에 가장 큰 것 같은데?”

“저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수족관이라고 하는데, 아마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것 같았다.

애초에 아쿠아리움이 아니라 오셔너리움oceanarium이라는 이름부터 규모 자체가 다르게 들린다.

“가 볼까요?”

난 두 사람을 이끌고 수족관 입구 쪽으로 향했다.

사실 내색을 많이 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아마 이 중에서 지금 가장 들떠 있는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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