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60화 (560/1,277)

##  560화

봐도 봐도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바다라고 해서 다 같은 바다가 아니었다. 한곳에선 대서양에서만 사는 해양생물들만 다루고, 다른 한곳에선 인도양과 태평양도 따로 모아놓았다.

하나로 이어져 있는 바다이지만 이렇게 나누어 놓고 한눈에 보니 그 각각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고래만 빼고 지구상의 모든 해양생물들을 모아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조금 더 따뜻한 파충류관으로 가니 심지어 악어도 있었다. 덩달아 도마뱀 등의 작은 파충류들도 함께 돌아다닌다. 오셔너리움이라고 해서 딱딱하게 오로지 해양생물들만을 관리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우리는 1층을 한 바퀴 다 돌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선 조금 더 직접적인 체험이 가능했다.

펭귄에게 먹이를 줄 수도 있었고, 터치풀touch pool에서는 불가사리나 소라 등을 만져 보는 것도 가능했다.

아나스타샤는 그곳을 그냥 스쳐 지나가다 말고 내게 물었다.

“저것도 해 볼까?”

온순한 가오리는 조금 만져 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미 풀 주변으로 아이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는데 굳이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난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2층에서 정말 보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돌고래?”

“예. 곧 쇼를 한다고 해서요.”

실내에서 하는 돌고래 쇼는 꼭 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인기가 많을 것 같으니 빨리 가서 자리를 잡고 싶기도 했고.

아나스타샤 역시 내 조급함을 눈치챘는지 다른 곳은 천천히 보자고 말하곤 날 이끌었다.

쇼를 위해 준비된 곳으로 가니 따로 관람료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티켓을 보여 주고 관람료를 내면 티켓 위에 표시를 해 주는 방식인 것 같았다.

관람료가 얼마라든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난 곧장 티켓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지갑을 꺼내기도 전에, 직원이 티켓을 기계에 넣고 무언가 찍더니 곧바로 돌려주었다. 티켓엔 좌석 번호가 찍혀 있었다.

“VIP석으로 가시면 됩니다.”

“……예?”

“……티켓을 받으시면서 아무 설명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 티켓만 보여 주면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듣긴 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들었어요.”

“부디 즐겁게 관람해 주시길.”

너무 자연스럽게 응대해 주니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옆으로 물러서자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다 합쳐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니 익숙한 형태의 원형 홀이 우리를 맞이했다. 무대를 중심으로 좌석들이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눈대중으로 본 규모는 1000명 정도가 관중석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인 콘서트홀과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가운데에 목재로 된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연못처럼 수상공연용 무대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실내에 있는 공연장인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컸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면서, 티켓에 있는 좌석을 체크하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여기쯤…….”

어느 공연이든 가장 좋은 자리는 따로 배정되어 있다. 보통은 공연자들을 가까이에서 편하게 볼 수 있고, 음향적으로도 최고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한 자리들이다. 비싼 자리들은 그렇지 않은 자리에 비해 몇 배씩 비싸기도 하다.

일단은 콘서트홀과 비슷하리라 생각하며 앞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살짝 당겼다.

“이쪽이야.”

그녀를 따라가니 정중앙에선 살짝 떨어진 곳이었다. 물론 무대와 가깝긴 하지만, 위치가 살짝 어긋나 있다. 우리 세 명은 나란히 좌석에 앉았다.

수상무대를 옆쪽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앞쪽엔 더 가까운 좌석들도 많이 있었다. 난 이 좌석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일 좋은 곳이라면 보다 앞쪽이라 생각했었기에 약간 의아해했다.

무대 앞쪽 좌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저기는 거의 아이들을 위한 자리야.”

“아이들요?”

“응. 스플래쉬 존splash zone이라고 해서, 쇼를 하면서 물을 뿌려 주는 곳이거든.”

설명을 들어 보니 쇼를 관람하면서 직접 물세례를 맞고 싶다면 저 좌석에 앉으면 된다고 한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쇼를 즐기기 위해선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저쪽 티켓으로 바꿔 달라고 해도 들어줄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원한다면 앞으로 가 보자는 듯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젖으면 어떡해요?”

“기본적으로 수건 같은 건 줄걸? 그리고 아까 돌아다니면서 봤겠지만 여기선 조금 젖었다고 해서 신경 쓰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 말대로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 아이들이라면 좋아할지 몰라도 난 애도 아니고……. 일단은 물이 튈 염려가 없는 여기서 그냥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시 아나스타샤와 이러저런 이 수상공연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곧 비어 있던 좌석들에도 사람들이 앉기 시작했다.

1000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연장이 꽉 차는 데엔 겨우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앞쪽의 스플래쉬 존에도 아이들이 가득했다.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왔다. 사회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환영합니다! 본 공연을 찾아 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콘서트에 온 것처럼 뜨거운 박수가 무대 쪽으로 향했다.

잠시 유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있었고, 다음으로 공연의 주인공이 될 돌고래들이 물로 된 무대로 입장했다. 분명히 물속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온 걸 보니, 수중에 터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 쟤 좀 봐. 이쪽으로 인사하는데?”

“그렇네요.”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라면 그렇게 들뜨지 않고 관람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에르네스트는 표정 변화 없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점잖아 보이는 얼굴 이면엔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엿보이기도 했다. 난 안심하며 쇼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고래들이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면서 잠시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잠시 뒤엔 잠수복을 입은 사육사들도 물속으로 뛰어들어서 돌고래들과 함께 여러 볼거리들을 선보였다. 돌고래와 수영 경주를 하거나, 링을 던져서 받아 오게 시키는 일들은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에 열광했다. 앞쪽에 있던 아이들의 호응 소리에 더더욱 흥이 나는지 돌고래가 속도를 내기도 했다.

사람과 돌고래가 하나 되는 무대를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상식적으론 그럴 리가 없고 그동안 계속해 온 훈련의 성과겠지만, 말 한마디 그리고 동작 하나에 정확하게 호흡이 맞는 모습은 합주와 닮아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나스타샤가 내 말을 듣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희 집에도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친구 하나 있잖아?”

“예?”

“벨카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난 이런 감정을 꽤 가까이에서 느낀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벨카와 같이 있을 때면 종종 난 벨카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니, 정말 알아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돌고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걸까? 저 사육사들과 돌고래가 나와 벨카 같은 관계라면, 합이 완벽하게 맞는 멋진 공연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집에 있을 벨카를 생각하니 조금 더 이 공연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창 공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돌고래들의 행동이 수상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앞쪽의 스플래쉬 존으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와!”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터졌다. 사육사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다시 한 번 돌고래가 몸을 뒤튼다. 그냥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기술이 있는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어마어마한 물들이 관중석으로 뿌려졌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서비스였다. 애초에 물에 맞게 되어있 는 자리니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오를 하고 앉은 사람들이겠지만, 뒤에서 보고 있는 나는 저거 정말 괜찮을까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계속 뿌리는데요?”

하지만 걱정은 불필요했다. 스플래쉬 존에 앉은 사람들은 되레 물을 더 뿌려 달라는 듯한 목소리를 무대에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돌고래와 사육사는 다시 물세례로 거기에 답했다.

아나스타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킥킥 웃었다.

“저기 갔으면 진짜 흠뻑 젖었겠네.”

저 정도로 젖어 버리면 분명 곤란해질 테니 안 가길 잘했다 싶지만, 그래도 저기에 앉아 보고 싶기도 했다. 이중적인 마음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이미 이 위쪽에 앉아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밑에서 돌고래의 물장난을 받아 주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물소리. 나쁘지 않다. 난 이렇게 멀리서 관조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지켜보는 건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

한참이나 물장난을 치던 돌고래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사육사가 중단시킨 모양이었다.

관중석 가까이 붙어 있던 돌고래들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맞춰선 다시 무대 저편으로 헤엄쳐 갔다. 이다음엔 무슨 쇼를 보여 줄지 기대하고 있는데, 돌고래 한 마리가 다른 돌고래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관중석 앞쪽으로 돌아와선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사육사가 그 한 마리를 통제하려는 듯 어떠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돌고래는 그 목소리를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

방금 전 스플래쉬 존에 물을 뿌려 댔던 것처럼 돌고래가 몸을 휙 틀더니, 별안간 수면을 휩쓸었다.

이전까진 정확하게 스플래쉬 존에만 물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노리는 방향이 완전히 엇나가 있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정확했다.

“아!?”

아무 대비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물세례가 날아들었다. 뭔가 막거나 할 겨를도 없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번쩍 든다.

“……??”

멍하니 무대쪽을 바라보았다. 사육사들이 당황한 듯 돌고래 옆에 달라붙어선 어르고 달래며 무대 저편으로 데리고 갔다.

“왼측 좌석에 계신 분들 괜찮으십니까?”

사회자 역시 약간 당황했는지 마이크로 물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앞쪽처럼 폭포수처럼 물을 맞은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양동이 정도. 그런데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맞아서 많이 놀랐을 뿐이다.

난 손을 들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옆으로 넘겼다.

옆을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도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아나스타샤도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 없어졌다.

“풉.”

“……타티아나?”

“아하하, 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니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부르다가, 웃음에 전염되었는지 같이 웃었다.

관조하는 입장으로 멀찌감치 있다가 갑자기 현실로 확 끌어내려진 기분이었다. 축축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마냥 즐겁기만 했다.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웃으며 사회자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그제야 사회자도 안심했는지 급작스런 물세례에 죄송하다고 다시 한 번 짧게 사과를 건네곤 다시 공연 진행에 들어갔다.

“너희들 괜찮아……?”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바로 옆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운도 좋게 그는 물벼락에서 피해간 것 같았다. 옷은 조금 젖어 있었지만 얼굴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그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말했다.

“치사하게 혼자서만 피하기야? 에르네스트?”

그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피하긴 뭘 피해? 물이 너희들 쪽으로만 간 건데?”

“그럼 얼굴을 우리 쪽으로 했었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그가 벌컥 역정을 냈다. 하지만 날 보더니 갑자기 고민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세수라도 하고 올까?”

“아하하하.”

의리가 있는 건 좋지만, 그건 너무 엉뚱하지 않나요? 에르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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