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63화 (563/1,277)

##  563화

우리가 찾아낸 곳은 음향기기를 판매하는 메이커 매장이었다. 공장에서 제작된 기성품만을 파는 게 아니라 수작업으로 만드는 예술품 같은 기기들을 주력으로 만드는 곳이라, 이곳의 제품들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한 명품으로 인정받는 편이다.

에르네스트가 써야 한다면 이 정도 제품은 써 줘야 하지 않나 싶다. 난 그 생각만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선뜻 좋다고 하지 않고 이번에도 한 번 만류했다.

“나 이미 이어폰은 있어. 더 늘릴 생각은 없는데.”

음악과 늘 붙어 있는 우리들은 음향기기들과도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가 적당한 리시버를 몇 개나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들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밖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 대신 쓸 만한 해상력 좋은 이어폰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건 사실이잖아요?”

“…….”

피아노 연주자로만 살 것이라면 사실 음악을 듣는 기기보다는 피아노를 직접 만지는 쪽이 훨씬 더 중요했다. 때문에 연주할 곡들에 대한 레퍼런스만 콕 집어서 집에서 헤드폰이나 스피커로 감상하면 된다.

하지만 작곡가를 꿈꾼다면 그 비중이 감상 쪽으로 조금 더 옮겨 갈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그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음악적 레퍼런스가 굉장히 깊고 풍부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막상 시작하고 나니 자신의 공부가 얕다면서 정말 어느 때나 음악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음악가들의 음악이라면 정말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음반을 다 섭렵하다시피 하고, 낭만과 고전, 심지어 훨씬 더 오래 전의 교회 음악까지 모조리 자신의 레퍼런스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의 음악에 파묻히려면 집에서 잠깐 듣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그는 학교에도 이어폰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더 좋은 리시버에 대한 욕심도 조금씩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최고로 좋은 이어폰을 쓰면 될 일이다. 학생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에르네스트는 최고의 장비들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 제가 하나 맞춰 드릴게요. 아까 그냥 지나치신 옷 대신이에요.”

“가격 차이가 확 뛰는데?”

“그러니 옷으로 하시지 그러셨어요.”

농담을 던지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난 그가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한마디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바기트 아라조비치께서 사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쓰는 모든 비용을 바기트께서 내 주시겠다 했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내가 낼 생각이었다. 그래야 진짜 의미가 있는 일이기도 하고.

에르네스트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납득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고, 고개를 휙 저었다.

“그러니까 내가…….”

“제가 선물해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

진심으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거부의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다시 저울의 눈금을 확인하는 듯한 눈빛을 한다. 무언가를 가늠한다. 난 그가 단지 부담스러워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무엇을 되돌려줄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난 에르네스트의 그런 성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절대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도록 두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 사이는 시소를 타듯 위아래도 계속해서 움직인다.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동시에 균형이 잡혀 있었다. 어느 한쪽이 응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관계이다.

그리고 내 곁엔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내 팔을 껴안으며 물었다. 그녀 역시 잊고 있었던 게 아니다. 난 내 앞에 온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아나스타샤는 다른 걸로요.”

“왜?”

“이어폰 가지고 계시잖아요?”

저번 생일 선물로 이미 아나스타샤에겐 상당히 괜찮은 이어폰을 선물한 적 있었다. 똑같은 걸 또 줄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되어 주는 게 내 희망이다.

아나스타샤는 괜히 투정을 부리듯 내게 몸을 기대어 왔지만, 그래도 큰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에르네스트에게도 제대로 된 보답이 필요하다는 데에 그녀도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결정되고,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냥 음향기기 매장에 들어온 것뿐인데도 머리가 약간 복잡했다. 이전까지 있었던 일들처럼 오너가 바로 날 알아본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미리 생각을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멍하니 반문하기나 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준비가 필요했고, 그렇다면 못 할 것도 없다. 무언가를 미리 준비해서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고.

“어서 오십시오.”

막 카운터에서 무언가 하던 오너와 눈이 마주쳤다. 난 머릿속으로 준비해 두었던 상황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잠깐,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오늘따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사실 우리 셋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르네스트였다.

가게 오너는 놀란 목소리로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부르더니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해 왔다.

“이야, 반갑습니다. 저희 매장을 찾아주시다니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라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라딕.”

에르네스트는 늘 그렇듯 점잖은 태도로 대응했다. 난 혼자서 괜히 긴장했던 게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자, 앉으시지요.”

라딕이 우리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손님들을 응대할 때 쓰는 공간인 모양이다.

3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자 곧 라딕이 캔 음료를 하나씩 내주었다. 과일음료라 부담 없이 마시기에 좋았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니 라딕이 씩 웃더니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3년쯤 전이었던가, 그때 봤었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데…… 지금 보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군요. 음, 옆의 분들은 친구분들이십니까?”

“네.”

“그럼 오늘은 친구분들이 쓰실 제품을?”

“……아뇨, 제가 쓰려고 합니다.”

에르네스트는 내 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이미 합의된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라딕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께서 직접 쓸 물건을 찾아오셨다면, 정말 잘 오셨습니다. 다른 그 어떤 메이커를 보시더라도 저희처럼 정확하게 클래식 전문가들을 위한 커스텀 인이어 제품들을 다루는 곳은 없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그에게 있어선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제품을 쓴다는 것이 하나의 자부심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반드시 만족시켜 보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여서, 난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라딕이 용지를 하나 가지고 왔다. 여러 항목으로 구성된 간단한 설문조사처럼 보였다.

이어폰 하나 사는데 웬 설문조사?

하지만 수제로 만들어지는 고급 제품들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디테일을 추구하곤 한다.

“원하시는 성향을 적어 주시죠. 클래식이라 해서 하나만 적지 않고 세부적으로 적어 주셔도 됩니다.”

음악을 단순히 팝, 락, 클래식 등으로 구분하는 건 너무 뭉뚱그려 구분 짓는 일이다. 클래식만 놓고 보더라도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서로 주력으로 삼는 음역대가 완전히 다르고 관현악으로 가면 표현해야 하는 규모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웅장해지며, 성악은 아예 장르가 달라지기도 한다.

때문에 정확한 감상을 위해 보다 세세한 주문을 받고 그에 맞추어 튜닝하려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용지를 적어 나가며 말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도 정확하게 분리해서 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피아노 연주자로서 집중하고 있지만, 작곡가로서 다양한 레퍼런스를 공부하는 입장에선 들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는 음악가로서 필수적으로 듣고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다.

라딕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분리도에 강점이 있는 드라이버와 멀티웨이 크로스오버는 저희 제품의 자랑이죠. 알겠습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 있으면서 음향기기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꽤 배운 덕분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전문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래도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아나스타샤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에르네스트가 써 낸 용지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라딕은 어느 정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탈로그를 보여 드리죠. 이 정도로 추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보여 준 카탈로그엔 색색별의 이어폰들이 있었다. 작은 이어폰 하나에 소리를 내는 장치인 드라이버가 음역대에 따라 종류별로 8개씩이나 밀집되어 있는 제품도 있었다.

그리고 가격은 일반적인 제품의 8배를 훨씬 넘어갔다.

수십만이 넘는 숫자를 본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적당히…….”

“제일 좋은 것으로 해 주세요.”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나는 에르네스트의 옆에서 휙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답을 하고자 하는데 대충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타티아나.”

“그렇게 하기로 했었죠?”

“뭘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건데?”

“아무 말도 않기로 했었잖아요.”

“내가 언제!?”

에르네스트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지만 어쩔 수 없다. 해 주고 싶으니까, 해 줄 테다. 약간 억지를 쓰며 그와 옥신각신할 때였다.

라딕이 궁금증에 찬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타티아나라면…… 잠시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오늘의 내 입장은 하나였다.

“예. 에르네스트의 친구이기도 하고요.”

“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어떤 경위로 알아보게 되었는진 말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난 바기트가 이사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별것 아니라는 투로 단조롭게 이야기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라딕은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이어폰을 해 주겠다는 내 모습을 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접근해 오진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죠.”

라딕은 가볍게 웃더니 한쪽 선반으로 가서 다양한 이어폰들을 가지고 왔다.

“자, 여기 유니버설 모델들입니다. 일단 청음을 해 보시죠.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에르네스트는 라딕이 가지고 온 샘플 이어폰들을 하나씩 들어 보기 시작했다. 난 가만히 그가 음악에 집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는 그중 한 모델이 괜찮은 것 같다며 내려놓았다. 라딕은 다시 한 번 에르네스트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고는, 어느 정도 확신이 섰는지 다음 단계로 진행했다.

“귓본을 뜰 겁니다.”

“귓본이요?”

“커스텀 인이어는 처음이십니까?”

“대충 뭔지는 아는데…….”

라딕이 이어서 설명했다.

“사람의 귀는 모두 다르게 생겼죠. 그에 따른 음향의 차이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때문에 커스텀 인이어는 외이도에 정확하게 맞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라딕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보여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윽 소리를 내며 물었다.

“주사기로 귀에 실리콘을 넣어요?”

“불안하실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쟁반 위에 주사기 두 개가 보인다. 그 안엔 핑크색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정말 평범한 주사기인데.

난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마주한 주사기 때문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젠 분명 뭐든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이 좋아졌고.

하지만 주사기를 나한테 놓는 것도 아니고 에르네스트의, 그것도 귀에 가져다 댄다는 것 자체가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감을 가져왔다.

“타티아나?”

가만히 뒀으면 좋겠는데, 에르네스트가 날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부른다.

불식간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괘, 괜찮나요?”

“난 괜찮은데.”

“…….”

더 이상 말을 꺼내면, 실수할 것 같아서 조용히 감내했다. 그도 괜찮다고 하고 라딕은 프로였다. 귓본을 뜨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혹시라도 잘못될 일은 없다. 끝없이 되뇌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곧 알아챌지도 모르니 진정해야 하는데, 제어가 잘 안 된다.

“…….”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진다. 잠시 말이 없던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잠깐 나가 있어 줄래. 두 사람 다?”

“……응?”

아나스타샤가 반문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인상을 쓰며 그녀를 내쫓듯 말했다.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아서.”

“뭐가?”

“아무튼 그래. 그러니까 보지 말고 나가 있어.”

난 정말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전 저기서 기다릴게요…….”

최대한 멀쩡해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 난 칸막이 뒤로 나갔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니 터질 것 같이 뛰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온 불안감이지만, 그 이유는 어떤 때보다 명료했다.

저 애들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정말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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