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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64화 (564/1,277)

##  564화

휘청거리며 나가는 타티아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에르네스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는 평소엔 그렇게 예민하지 않고 되레 무덤덤한 성격에 가깝지만, 가끔은 약한 공황으로 보일 정도로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엔 어떤 이유로 그렇게 불안에 떠는지 몰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젠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 분의 일 확률이라도 다칠지도 모른다면, 또 그것이 음악가로서의 생활에 치명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타티아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하곤 했다.

“…….”

사실 연주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불안감을 어딘가 지니고 있다.

작년, 한승우의 아버지와 있었던 설전에도 그러한 말들이 오갔었다. 연주자들은 직업적 안정성이 굉장히 낮다. 재능도 노력도 어마어마하게 필요로 하고 그렇게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말 그대로 손끝 하나만 잘못되어도 제 기능을 못 하는 게 연주자였다.

그걸 모르는 연주자는 없다. 때문에 인대나 근육 등이 상하지 않도록 정말 많은 관리를 하며 몸을 지킨다. 그러나 언제나 뜻하지 않은 일이 찾아오리란 것 정도는 늘 각오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그건 겪어 보지 않은 일이기에 할 수 있는 각오에 가까웠다. 죽음을 겪어 보지 않은 인간이 그것을 막연히 여기며 삶에 집중하는 것처럼 연주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겪어 봤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타티아나가 보이는 초연함과 진지함. 가끔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집념. 그 모습에서 에르네스트는 어떠한 숭고마저 느끼곤 했다.

하지만 종종 타티아나는 그 강인함의 기반에 간신히 이겨 낸 공포가 있음을 보인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아무것도 못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상황도 이겨 내려고 이를 악무는 타티아나를 굳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내보내 주는 것 정도였다.

“……후.”

그런데 쟤는 왜 계속 앉아 있는 거야?

“뭐 해? 아나스타샤.”

“폰 보고 있는데.”

“나가 달라니까.”

“싫어.”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강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타티아나를 챙길 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그래서 둘 다 나가 달라고 한 건데, 왜 못 알아듣고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꺼내들었던 핑계를 다시 말했다.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아서 싫다고.”

“뭐 어때? 사진이라도 찍어 줄까?”

“아 진짜…… 당장 안 나가?”

커스텀 인이어의 귓본을 뜨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건 타티아나를 내보내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지만, 절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런 에르네스트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슬쩍 올려다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가 살짝 흔들거리더니, 그녀가 킥 웃었다.

“싫다니까.”

“……야.”

“네가 얼마나 웃겼는지 직접 보고 타티아나에게 전해 줘야 하거든.”

“…….”

이 상황을 그녀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대신 바로 나가서 타티아나와 있어 주는 게 아니라, 지금 에르네스트가 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걸 제대로 설명할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와 함께한 시간은 에르네스트보다 족히 두 배는 될 것이 분명했다. 타티아나가 불안해하는 지점에 대해 훨씬 잘 아는 것도 당연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칸막이 뒤로 나가 있는 친구를 떠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지도 못할 정도일 줄은 몰랐어.”

“솔직히 좀 소름 돋긴 하잖아.”

“그건 그렇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아주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귀에다가 무언가 넣는다는 건 그게 뭐라도 그리 달갑지 않다.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건 그래도…… 뭐, 베토벤이 되기라도 하겠어?”

하지만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들었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에르네스트를 쏘아본다.

음산한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너 혹시라도 타티아나 앞에선 그런 농담 같지도 않은 소리 절대 하지 마. 알지?”

거의 협박조였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바보는 아니었다. 다친다는 상상만 해도 패닉에 빠지는 타티아나가 베토벤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결코 농담으로 넘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안 했잖아.”

“그건 잘했어. 칭찬해 줄만 하네.”

“네 칭찬 같은 건 필요 없는데.”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충 중얼거리며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면서 그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귓본 채집에 필요한 것들을 조금 더 가지러 갔던 라딕이 돌아왔다.

그는 장갑을 끼며 말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래 걸리진 않죠?”

“5분 정도 걸립니다.”

“바로 하죠.”

승낙이 떨어짐과 동시에 라딕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에르네스트의 귀 상태를 확인하고, 실에 매달린 솜뭉치를 귀 안으로 조심스레 밀어 넣는다. 에르네스트는 솜뭉치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준비가 다 된 것을 확인한 라딕이 실리콘이 든 주사기를 들었다.

“지금부턴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입을 열면 외이도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라딕이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곧 차가운 무언가가 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기분이었다.

“바보.”

“…….”

한쪽 귀가 막혀서 먹먹한 와중에, 턱을 괴고 이쪽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한마디 했다. 에르네스트가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하는 짓이었다.

그냥 말싸움을 붙어도 이긴 적이 드문데, 이런 상황이라면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희미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진짜 웃긴다.”

“……야.”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

한마디 대꾸하려는 찰나 라딕이 그를 제지했다.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이 눈빛으로만 비겁하게 구는 아나스타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곧 라딕이 반대편 귀에도 똑같이 실리콘을 채워 넣었고, 곧 에르네스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라딕은 주사기 등을 챙겨 칸막이 밖으로 나갔고, 자연스레 두 사람은 눈싸움을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뜻 모를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

왜 나가 달라 했는지 이해는 갔다. 말도 못 하고 귀가 막힌 채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는 건 평상시에 정말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사진이라도 찍어 남겨 둘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에르네스트가 진짜 화를 낼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

부럽네.

진귀한 광경이란 생각 다음으로 가깝게 다가온 건 그런 단순한 생각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드는 생각들에 저항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원래부터 친구들을 위해 가리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그러했다.

에르네스트는 운이 좋았다. 타티아나가 그에게 보답을 하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 딱 맞춰 이런 이어폰 매장에 함께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타티아나는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충격을 받고 나가 있긴 하지만.

아마 기억상실에 빠지기 전에 겪었던 일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덮쳐 온 것이리라.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할 순 없었으니 정확하진 않지만,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진실의 언저리까지 도달해 있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그렇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지금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진 지금 상황만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에르네스트.”

“…….”

완전히 양쪽 귀가 막힌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기만 했다. 무슨 소릴 하든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도전적인 눈빛이 웃긴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너보단…… 내 스스로가 더 웃겨.”

스멀거리는 유치한 감정들을 몇 번이나 억눌러 왔다. 타티아나의 맹목을 악용하지 않고, 에르네스트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채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결국 맴돌기만 할 뿐. 조금이라도 진심을 말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에르네스트의 귀를 막은 뒤였다.

웃긴다.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아나스타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에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또 박차고 나갈 용기는 없음에 한탄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자신이 욕이라도 먹고 있는 줄 알까? 아나스타샤는 실없이 웃었다.

“그래도 내가 웃기다고 하진 않아 줬으면 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훗날 타티아나와 너는 그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

에르네스트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한다. 그냥 놀림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들리지 않는 상대에게 무의미하게, 또 무의미하기에 비로소 아나스타샤는 말할 수 있었다.

“있잖아…….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입 밖으로 말을 낸 아나스타샤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그냥 누가 정해 줬으면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럴 거라면 이렇게 고민 같은 걸 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은 친구에게 의견을 묻고 도움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설령 대적해야 할 사람이 될지언정.

그런데 그때였다.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더니 앞에 있는 펜을 집고는 종이에다가 무어라 빠르게 적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종이를 툭 튕겨서 아나스타샤의 앞에 정확하게 날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듣고 있을 때 제대로 이야기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답답하겠지.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하핫, 그럴게.”

에르네스트는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진지하게 종이에 휙 갈겨썼다.

[기다릴 테니까.]

“…….”

짧은 한마디였지만,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기분들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정말 뜻밖에도 안도감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애에게 직간접적으로 라이벌이 되고자 한다는 태도를 보인 적이 많았다. 그 점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받아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적어도 아나스타샤가 느끼기엔 그랬다.

적어도 완전히 무시당하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예감은 아나스타샤를 하여금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가 있을게.]

에르네스트가 볼 수 있도록 종이에다가 적어 보내 주니 그는 대뜸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실컷 마음대로 이야기해 놓고 이제 와서 놀리냐고 따지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킥 웃어 버리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타티아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놀랐던 게 조금은 진정이 되었나 싶어서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옆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그제야 타티아나가 고개를 돌린다. 풀려 있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에르네스트는요?”

바로 묻는 게 그거였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3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아…… 그런가요.”

“응. 아무것도 아니던데? 오래 걸리지도 않고.”

타티아나에게 괜찮으냐고 묻진 않는다. 그녀에겐 그녀 나름대로 감내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대신 타티아나가 안심할 만할 말들을 해 주었다.

어떻게 상황이 진행되었는지 전해 듣게 된 타티아나는 가면 갈수록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농담도 살짝 섞었다.

“약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

“재미요……?”

“응. 말 못 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 내가 혼자서 떠들었더니 내 말이 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어.”

“……혹시, 화내는 것 아니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모르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랬지만 아나스타샤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 쪽이 걱정된다는 듯 그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아까 전처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타티아나와 가까이 앉으며 말했다.

“뭐 어떠니? 오늘은 선물까지 받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잖아.”

“…….”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아무리 그래도 놀리는 건 너무하다고 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외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담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아나스타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주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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