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5화
이어폰 하나 사는 것치고는 정말 복잡했다. 단순히 귓본대로 이어폰을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제작으로 이루어지니 이어폰 색이나 겉면에 보일 모양 등 모든 것이 선택이 가능했다.
에르네스트는 심플하게 보라색을 배경으로 펄이 조금 들어간 디자인을 골랐다.
주문을 받은 라딕이 에르네스트에게 이후 절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제작에는 보통 3주에서 4주 정도 소요되지만, 이번엔 1주일 내로 완성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피팅을 해 보신 뒤에 혹 불편함이 있으시다면 수정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1주일도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았지만, 역시 특별 대우이긴 했다. 에르네스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용에 대해선 전부 내가 해결했다. 라딕이 내게 카드를 받아 결제하는 사이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짧게 한마디만 했다.
“나도 줄 수 있는 게 많아. 타티아나.”
“……예?”
“각오는 되어 있다고 믿을게.”
오늘 약간 억지로 보답을 하려고 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역시 나랑 똑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마치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반쯤은 기대 나머지 반은 걱정으로 난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웃기만 했다.
매장을 나오니 시간이 딱 적당했다. 난 두 친구를 돌아보며 제안했다.
“3층으로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요?”
“3층엔 놀 만한 게 많던데.”
“예. 그리고 곧 마술쇼도 한다고 해서요. 보고 싶지 않나요?”
“가 볼까?”
3층엔 여러 엔터테인먼트 시설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고, 즐거운 분위기가 이미 멀리에서부터 물씬 흐른다. 쇼핑몰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지나가면서 보니 정말 없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유행하는 놀이시설이라면 거의 전부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매장을 지나 중심부로 향하자 이미 특설 무대가 준비되어 누군가 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와!”
“어떻게 한 거지?”
요즘은 마술사라고 해도 탑햇top hat을 쓰고 지팡이 등을 들고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캐주얼한 셔츠를 입은 남자가 무대에 서서 카드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트 9라는 카드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마술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저렇게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는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일 텐데……. 그래서 더 일부러 실력이 돋보이는 건가?
신기한 건 신기하지만 이 또한 기술이라 생각하면 약간 건조하게 생각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펼치는 기술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유심히 손끝을 지켜보려던 나는 괜히 마술의 비밀을 파고들려는 생각을 휘휘 저어 흩어 버리곤 그냥 즐겁게 보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퍼포먼스가 뛰어난걸?”
마술사는 카드 마술 외에도 수많은 마술들을 선보였다. 공을 몇 개 꺼내선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오게 만들고, 숟가락을 허공에서 꺼내들었다가 다시 휙 하고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보니 마술이 아니라 마법같이 보일 정도였다.
쇼가 끝나고,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마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까 카드로 했던 건 섞으면서 중간에 본 거라니까?”
“그게 그렇게 단순한 트릭이었으면 너 나 할 거 없이 다 마술사 하지.”
“아, 답답해 정말. 내가 카드로 직접 보여 줄게.”
“마술도 할 줄 알아? 아나스타샤?”
“예전에 몇 번 해 보니까 되던데.”
“…….”
나도 에르네스트도 할 말이 없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아무거나 잘한다는 건 이제 너무나 잘 알지만 가끔 보면 정말 대단할 정도였다.
“카드…… 아, 저기 가면 있겠다.”
“어디?”
“저기, 게임숍. 보니까 다트가 있는 것 같은데 분명 트럼프 카드도 취급할걸?”
아나스타샤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자신 있게 앞장섰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말대로 게임숍에선 여러 게임들은 물론이고 트럼프 카드도 준비되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빌려 온 아나스타샤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대체 그런 건 언제 배우신거예요……?
허공에서 카드가 휘리릭 날아다니다가 한 손에 쌓인다. 아나스타샤는 부채처럼 카드들을 펴들고는 에르네스트 앞에 내밀었다.
“자, 집어.”
“…….”
두 사람 사이엔 어떠한 내기가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신중하게 카드를 골랐고, 날 증인으로 삼아 이쪽으로 보여 주었다. 스페이드 3이었다.
다시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에게 보이지 않게 카드를 카드패에 돌려놓았고, 아나스타샤는 또 현란하게 카드를 섞고는 에르네스트에게도 알아서 섞어 보라고 시켰다.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본격적인 마술이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카드를 맞춰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난 살짝 긴장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카드패를 만지작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에르네스트, 네가 고른 건 스페이드 7…….”
“틀렸…….”
“빼기 4겠네.”
“…….”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다.
에르네스트는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게임숍 내부를 돌아다니며 다른 무언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에게 당하긴 했지만 이대로 있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가 게임을 찾아다니는 사이 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마술사보다 더 마술사 같았어요.”
“뭐니 그게? 자.”
난 그녀에게 카드패를 받았다.
트럼프 카드는 이미 수없이 만져 본 적 있지만 이렇게 마술 같은 걸 해 보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영 어색했다.
이것도 손이 커야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난 불리한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저렇게 카드패를 가지고 놀고 있자, 돌아다니던 에르네스트가 돌아왔다. 다트 화살들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다트 잘 해?”
거의 싸움을 거는 투였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너보다는?”
“해 보면 알겠네. 자, 받아.”
에르네스트는 녹색 다트 세 개를 아나스타샤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도 파란 걸 내밀었다.
“……제 것도 있나요?”
“당연하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려다가, 난 그냥 다트를 받았다.
그냥 원판에 다트를 던져 좋은 위치에 맞추는 게임이다. 복잡한 규칙이 있는 다른 게임보단 그래도 초보자가 하기 쉽지 않을까?
물론 그건 성대한 착각이었다.
“50점이네.”
시작하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빨간 다트를 던져 불스 아이라 불리는 다트판의 정중앙을 맞춰서 50점을 따냈다.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그다음은 아나스타샤 차례였다. 그녀는 중앙을 노리지 않고 테두리 부근을 노렸다. 점수 계산표를 보니 3배 점수를 주는 부위였다. 그녀가 획득한 점수는 20점의 3배인 60점이었다. 정 가운데를 맞추는 것보다 점수가 높았다.
아나스타샤가 어떠냐는 듯 웃으며 돌아본다.
“난 60점.”
“……다트도 했었냐 너?”
“조금.”
“어이가 없네.”
문제는 그다음이 내 차례란 점이었다.
막상 자리에 서니 다트판은 생각보다 멀었다. 다트를 어떻게 쥐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절망적인 운동신경으로 이걸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내 다트 잡는 법을 조금 교정해 주었고, 난 간신히 첫 다트를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트는 다트판에 맞기는 했지만, 꽂히지 않고 튕겨나가 버렸다.
“억울해요.”
“그냥 저기 맞은 부위 점수를 쳐 줄까……?”
“그건 싫어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게임은 무난하게 흘러가서 결국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나스타샤의 승리가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한 번 더 하자고 했지만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피했다. 그가 무서워서 피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놀리려는 태도였다.
“이런 건 두 번 하지 않는 주의라서.”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그리고 이런 걸로 이겨 봐야 득 볼 것도 없잖니?”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렸다. 난 다트 같은걸 잘 하는 것도 충분히 멋진 일이라 생각하는데……. 3번 총합 0점인 내가 지금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는지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럼 다른 걸로…….”
“안 할래. 이런 건 이제 시시해.”
미련이 남은 에르네스트가 다른 게임을 가지고 오려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거부했다. 정말 뭐든 잘하는 그녀에겐 있어선 무엇이든 시시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시시하다는 단어는 어떠한 오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약간 우울한 어조를 담고 있었다.
우린 다른 게임을 즐기기보단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아나스타샤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일루젼 갤러리?”
게임숍에서도 독립된 방으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커다란 간판에 독특한 글씨체로 갤러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굉장히 들어가 보고 싶게 생겼다.
우리 세 명은 그 안쪽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엄청 잘 해 놨네.”
그야말로 환상적인 공간을 조형해 놓은 방이었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늘 보는 평범한 물건들이다. 테이블이나 세탁기, 시계 등등. 하지만 그 물건들의 크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시계 시침이 내 키만 하겠는데.”
“그러네. 그거 움직여?”
“아니 모형이야.”
마치 우리가 소인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커다랗다. 작은 방인데도 꽉 찬 느낌이 드는 건 그 덕분이었다.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다가, 문득 이대로 지나가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스마트폰을 꺼내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원래 그러라고 되어 있는 공간 같긴 해.”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고, 에르네스트는 멀찌감치 서 있었다.
“에르네스트?”
내가 부르자 그는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찍어 줄게.”
“그러지 마시고요.”
“주변 사물들이 워낙 커서 이렇게 찍어야 구도가 나와.”
솔직히 말하자면 주변 사물들도 좋지만 그냥 사진으로 이 한때를 남기고 싶었을 뿐인데, 왜 그걸 모르나 싶다.
한참 동안 이쪽으로 오니 마니 티격거리자 아나스타샤가 해결책을 냈다.
“그냥 여기 올려놓으면 될 것 같은데.”
“…….”
원래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에르네스트가 서 있는 쪽엔 커다란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 곰 인형의 배 위에 스마트폰을 적당히 거치하니 정확하게 이쪽으로 촬영이 가능했다.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에 섰고, 앞을 보니 곰 인형 사진사가 우릴 찍어 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예약해 두었던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무척 잘 나왔어요.”
“그러네.”
“저에게도 보내 주세요.”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보내 준 사진 파일이 도착했다. 어떻게 봐도 정말 잘 나왔다.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웃었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난 이렇게 또 하나 생긴 여름방학의 추억을 잘 저장해 놓고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사진도 좋지만 지금 가까이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보다 더 집중하고 싶다.
“저희 옆방에도 가 보도록 해요.”
“옆에 또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특별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엔 처음 와 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다음 방엔 무엇이 있을지 기대된다. 난 앞장서서 다른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닫았다.
“뭐야? 왜?”
“……다른 곳으로 갈까요.”
“뭔데 그래.”
아나스타샤가 내 옆에서 문을 열어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재미있어 보이는데.”
“저게 어떻게 재미있나요?”
하필이면 다음 방은 어두침침한 배경의 공간이었다. 척 봐도 공포를 테마로 한 곳이었다.
무서운 건 질색인 나에겐 최악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주변을 빙그르르 돌더니 짓궂게 웃었다.
“이 정도 무서운 건 괜찮아 보이는데?”
“……예?”
“타티아나 넌 무서운 게 싫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런 놀이로 즐길 수 있는 건 꽤 좋아하는 편이잖니?”
“제가 언제요!?”
어이가 없어서 항변했지만, 사실 아나스타샤의 말은 상당히 정확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난 친구들에게 실질적인 위험으로 닥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선 별것 아닌 상황임을 알면서도 겁을 먹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서우라고 만들어 놓은 것들에 대해선 그냥 평범하게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도 싫어서 겪고 싶지 않지만, 아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정도는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그 차이점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자꾸만 괜찮다면서 내 손을 끌어당겼다.
어쩔 수 없이 난 친구들과 함께 방에 들어갔고, 30초 만에 갑자기 튀어나온 유령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