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66화 (566/1,277)

##  566화

오후 시간은 크로커스 시티의 쇼핑몰, 베가스에서 거의 다 보냈다.

워낙에 큰 쇼핑몰이고 엔터테인먼트적인 공간도 너무나 잘 갖추어져 있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심지어 걸어서 조금만 나가면 엑스포도 있었다.

“오늘은 기업들이 전시 박람회 하는가 본데…….”

전 세계의 문화별 유산 등을 전시하는 것이 이 세계 박람회의 일반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기업들이 자랑할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서 전시하는 날인 모양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굳이 찾으려 애를 쓸 것도 없이 엑스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큰 자리에 바로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기업들이 입점해 있었다.

“…….”

내가 멀찌감치에서 그쪽으로 시선을 주니 아나스타샤가 다가와선 어깨를 콕콕 찔렀다. 혹시 가 보고 싶냐는 의미였다.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당연히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어떤 기별도 없이 찾아간다 한들 저기 열심히 일하고 계신 분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그냥 피아노밖에 칠 줄 모르는 연주자일 뿐이었고, 이런 거대한 박람회에선 뭔가 도움이 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베르체노프의 부스에 간다면 오늘 내 친구들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내 약속도 조금 퇴색되어 버리게 된다.

“괜찮아요. 제가 가서 할 일도 없는걸요.”

“그러니.”

“예. 그러니까 다른 곳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 하기로 해요.”

아나스타샤는 약간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었다.

엑스포 곳곳을 구경하고, 다음으로는 시간에 맞추어 근처의 크로커스 시티 홀로 향했다.

대리석과 유리로 마감된 고급스러운 건물은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콘서트홀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규모였다. 7000석의 거대한 강당, 그리고 2000석의 극장. 4200석이나 되는 콘서트홀을 갖춘 거대한 행사장이었다.

그 크기가 굉장히 크니만큼 대부분의 음향적 효과는 스피커로 증폭된 소리에 맞추어져 있었고, 때문에 클래식 공연보다는 팝 음악 공연을 주목적으로 하는 홀이다.

하지만 때때로 오페라나 발레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내가 오늘 예약한 티켓은 바로 발레 공연으로 잡혀 있었다. 상연되는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백조의 호수 안 본 지 진짜 오래됐어.”

“나도. 조만간 다시 한 번 보려고 했었는데. 잘되었네.”

나도 먼 기억 속에 어렴풋이 한 번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잘 기억이 안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백조의 호수에 쓰인 음악들이라면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막상 공연은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래선 안 될 일이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비슷한 생각으로 기대감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공연이 아니라 발레 공연이라 어떻게 봐 줄지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난 다시 한 번 포스터를 확인했다. 공연 시간은 인터미션을 합쳐서 1시간 40분. 원래 본래 버전이 2시간이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짧은 버전이었다.

잠시 로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방송으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 곧 아르카사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상연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관객 여러분들은 홀로 입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일어났다. 생각보다 꽤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난 친구들과 함께 홀 안으로 입장했다.

밝은 조명이 켜지고, 발레리노 한 명이 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풍부한 음색의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지그프리트 왕자와 저주를 받아 백조가 된 공주 오데트. 그리고 왕자를 속이기 위해 등장하는 사악한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딸, 흑조 오딜.

이 인물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과 발레로 표현해 내는 작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복합예술의 총합체였다. 난 이 공연이 상연되는 내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기억을 조금 되새겨 보려 했던 건데, 옛날에 봤던 거랑은 감상이 약간 달라지네.”

“어릴 때랑은 기분이 다르지.”

백조의 호수의 스토리는 굉장히 명료한 편이어서 그리 복잡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듦에 따라 느껴지는 건 항상 바뀌기 마련이다.

아나스타샤는 홀 쪽을 일견하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결말이 좋게 끝나서 참 좋더라. 볼쇼이 발레단 버전은 비극이잖아. 진짜 무슨 말 하려는 건지 모르겠던데.”

“아나스타샤, 너도 볼쇼이 발레단에서 봤었어?”

“응. 오데트는 죽고 지그프리트만 남는 결말로.”

“그거 말 많지.”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임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공연이 상당히 많은 작품이었다. 디테일한 부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각 발레단과 디렉터의 베리에이션에 따라 결말 자체가 극과 극으로 바뀌어서 완전한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반대로 완전히 비극이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게 다양한 결말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마지막 음악이 어느 한쪽의 결말로 들리지 않고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게 들리는 덕분이었다. 그것이 후대의 공연자들에게 무한한 자유도를 쥐여 준 것이다.

때문에 백조의 호수는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변주되어 지금까지도 상연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대표 발레단이라 할 수 있는 볼쇼이 발레단의 버전은 오데트가 죽는 버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게 굉장히 싫었는지 로트바르트의 저주를 깨고 오데트가 백조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이 결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타티아나.”

“저도 마음에 들어요. 차이코프스키의 피날레 음악으로는 이 광경을 그렸을 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역시 그렇지?”

아나스타샤는 좋은 발레 공연을 본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었다.

난 사실 결말이 좋아서 만족하기보단 그저 아나스타샤가 기뻐하기에 행복해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난 기뻐하는 아나스타샤를 조금 더 기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예약해 둔 곳이 있어요.”

이미 저녁 7시였다. 때문에 당연히 마지막 갈 곳은 저녁식사를 할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크로커스 시티 홀에서 나와 대로를 따라 조금 걸었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모스크바 강이 보였고, 근처에는 미리 봐 두었던 요트 클럽이 있었다.

요트를 타고 모스크바 강을 돌거나, 강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니면 둘 다 하거나.

“선상 레스토랑…… 뭘 이렇게 준비했니? 타티아나.”

“저번 연주회에 대한 보답이잖아요?”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난 싱긋 웃으며 두 친구와 배 위로 향했다.

갑판 위에는 우리 세 명만을 위한 테이블이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저녁의 강바람이 휙 스쳐 지나갔다. 7월의 모스크바는 해가 굉장히 늦게 지는 편이라 어둑어둑한 저녁 분위기가 강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선선한 여름 날씨가 바로 코앞에 와 닿는다.

난 조명이 어른거리는 모스크바 강을 바라보다가, 다시 친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분.”

“응?”

“정말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리 돌발적이진 않았다. 늘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말이 자연스레 나온 것이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갑자기?”

“후후…… 다시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요. 오늘은 즐거우셨나 모르겠네요.”

내내 혹시 피곤하진 않을지 지루하진 않을지 살피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땠을진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킥킥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당연하지. 이미 지난 연주회 피로 같은 건 싹 날아갔어.”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는요?”

“나도 그래. 넘치네. 많은 게.”

에르네스트는 살짝 시선을 강 쪽으로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하게 감상적인 어투로, 그는 그런 말을 했다. 들고 있는 잔에 담긴 음료는 채 반도 차지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에선 무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정말로.”

물어서 대답을 구한다 한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에르네스트가 지금 나나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걸 공유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난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제안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자, 건배하도록 해요.”

“그럴까.”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본격적인 저녁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피타이저로는 문어 카르파치오가 나왔다. 생 문어를 소스로 조리한 음식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담백하고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으로는 캐비어와 양파를 볶아 만든 요리, 그리고 푸알레 생선 요리가 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이 생선 요리 정말 맛있다. 혹시 여기서 바로 잡은 걸까?”

“그거 불법이야. 아나스타샤. 모스크바 강 수질은 괜찮은 편이니까 그렇게 먹어도 별 탈은 없겠지만.”

“아…… 그런가?”

선상 레스토랑이라는 장소가 주는 분위기는 묘하게 목소리를 들뜨게 하고 보다 많이 말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나도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식사를 마치고 나니 완연한 저녁이었다.

배에서 내려오니 빅토르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르.”

“오늘 즐거우셨던 모양이군요. 여러분.”

“덕분이죠.”

에르네스트의 대답에 빅토르는 피식 웃더니 깍듯하게 한편으로 손짓했다.

“자택까지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차량에 오르자 소로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자 도로의 가로등이 지나쳐 간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고,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친구들과 논 것뿐인데도 꿈만 같기도 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하루 중 최고의 하루에 가까웠다.

혹시라도 잊을까 싶어 아침에 수족관에 갔던 것부터 차례차례 기억을 되새기면서 떠올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 쪽으로 살짝 무게가 실려 왔다.

무언가 싶어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이쪽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

그간 아나스타샤와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 버린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드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에너지가 그렇게 넘치는데도 어디에서나 항상 피곤한 기색 없이 늘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도 사람이고 겨우 열여섯 살이다. 피곤함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단지 내가 워낙에 못미더우니 지금까지 늘 신경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곤히 잠든 아나스타샤를 보니 적어도 지금은 이 공간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나 역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마 걔 자?”

옆자리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약간 놀란 눈으로 작게 속삭였다. 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오…… 가만히 있어야겠네.”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던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깨울 생각은 없는지 옆으로 슬쩍 더 자리를 비켰다. 난 그에게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도 조금 주무시겠어요? 도착하실 때까지만이라도.”

“뭐? 아니.”

“사양하실 것 없어요.”

“잠이 오겠냐고 여기서.”

“…….”

내가 말없이 내 어깨 쪽을 눈짓하자 에르네스트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예전에 집에 초대했을 때도 그랬지. 에르네스트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잠든 와중에도 끝까지 안 자려고 버티기도 했었다. 자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걸까?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땐 반 억지로 자게 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졸려.

“그럼 전 잘래요.”

“……어?”

“안녕히.”

인사를 건네고, 난 눈을 감고 아나스타샤가 기대 오는 방향으로 지탱하듯 힘을 실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에르네스트가 당황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난 속으로 웃으면서 아나스타샤를 따라 짧은 잠 속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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