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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67화 (567/1,277)

##  567화

아나스타샤는 잠이 많다.

스스로 게으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잠이 많다는 건 사실이었다.

대신 그녀는 깨어 움직일 땐 미적지근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재능이 많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무엇이든 집중한다면 못해 낼 것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엔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내며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했다. 그러고 난 뒤 미련 없이 충분히 푹 자면서 깨어 있을 때 소모했던 것들을 채워 넣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녀는 잠이 많이 줄었다.

체력이 남아돌기 때문이 아니었다. 되레 몇 배는 더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그에 따른 피로함을 느낀다.

그래도 푹 잠들지 못하고 어느 정도 정신이 들 만하면 일어나서 다시 움직인다.

친구인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이미 몇 걸음이나 앞서 나가고 있다. 그 애들이 하루에 몇 시간 자는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격차를 조금이라도 좁히려면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따라가선 안 된다. 언젠가부터 아나스타샤에겐 그러한 확신이 박혀 있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녀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졸려…….’

삶의 방식의 변화는 아나스타샤의 보폭을 보다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체력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기도 했다.

낮 시간에도 종종 집중력을 잃고 멍하게 되기도 하고, 피부도 푸석푸석해진 것 같다.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생활 패턴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쉴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두 친구는 아직 앞에 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닿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나스타샤에게 갑작스런 온기는 순식간에 수마가 되어 그녀의 의식을 끌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온종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차에 올랐을 때,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타티아나의 어깨로 고개를 떨구었고,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

꿈속에서 아나스타샤는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차갑지 않고 따뜻한 바다였다. 거기에서 그녀는 바닷가재를 한 마리 만났다.

문득 오셔너리움에서 타티아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타티아나는 바닷가재의 숙명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그 이야기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혹시나 타티아나가 바닷가재를 닮고 싶어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사람이니까.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게 그만큼 당연하다면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아나스타샤?”

“……?”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차에, 수면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를 끌어 올렸다.

눈을 뜬 아나스타샤는 끌어안고 있는 팔을 조금 더 세게 당기며 온몸을 쭉 늘어뜨리려다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는 팔로 자신의 어깨를 슬쩍 누르며 말했다.

“도착했어요.”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 손을 올리고 있지만, 어깨가 결리는 걸 스트레칭하려는 모습이었다.

타티아나가 몸 관리에 얼마나 신경 쓰는진 잘 안다. 물론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건 피아니스트로서의 가혹함이었다. 소중히 여기고 관리하는 피아노라도 연주를 할 땐 최선을 다해 건반을 내리쳐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피아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드는 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급히 사과했다.

“아…… 응. 미안해. 팔 괜찮니?”

“괜찮아요.”

“미안해…… 미쳤었나 봐.”

“아하하하, 피로하실 때 어깨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 드릴 수 있어요.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는 한 번 보라는 듯 팔을 들어 보였다. 더 말하는 건 거꾸로 타티아나의 걱정을 사게 될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따라 웃고 말았다.

가볍게 마사지라도 해 줄까 생각하면서 보는데, 저편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에르네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

에르네스트는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감히 억측하건데 그가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나스타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상황 자체가 부끄럽기도 하고, 막 드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싶기도 해서 아나스타샤는 괜히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보지 말고 깨우지 그랬니?”

“깨우면 깨웠다고 뭐라 할 참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그냥 내가 싫다고 말해.”

에르네스트는 빈정거렸다. 아나스타샤는 평소와 같은 그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싫어하긴커녕, 싫어할 수가 없어 문제인 친구였다.

잠시 에르네스트와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창밖을 보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도로의 가장자리에 멈추어 섰다.

가야 할 시간이다.

이 애들과 조금 더 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둘 다 많이 피곤할 테니 어서 보내 주는 게 나았다. 아나스타샤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떠나려고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 오늘 정말 즐거웠어.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아…… 저도 즐거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타티아나도 헤어질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 순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아나스타샤는 가벼운 웃음으로 떨쳐 내고는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다시 출발할 것 같던 차에서 한 명이 더 내렸다.

“넌 왜 내렸니?”

“잠깐 여기 근처에서 사 갈 게 좀 있어서.”

“……그래?”

뒷머리를 쓸면서 내린 에르네스트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차 쪽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두 사람 다 내려 버린 게 아쉬운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어서 가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아나스타샤도 걱정하지 말고 가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더니 결국 짧게 한마디만 남겼다.

“전화할게요.”

“응.”

창문이 올라가고, 곧 타티아나의 모습은 짙게 코팅된 유리에 의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검은 벤츠가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을 눈으로만 슥 훑고는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건물들 사이를 보고 있었다.

어디에 볼일이 있는 걸까.

“에르네스트.”

“응.”

“어디 갈 건데?”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저러고 있는 건가 싶어 가볍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목적지는 너무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음반 좀 사려고. 이쪽 매장이 괜찮더라고.”

“……지금?”

“지금 사면 안 되냐?”

저번 연주회 때 에르네스트와 야간에도 연습을 같이 했었지만, 그래도 저녁 9시도 넘은 이 시간에 음반 매장에 가겠다는 심리는 아나스타샤로서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체 얼마나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거야? 그냥 오늘 하루 정도는 제자리에 있으면 안 돼?

아나스타샤는 잠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같이 가 줄까?”

“?”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다. 사실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솔직히 상처가 될 정도였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그렇게 싫어할 건 없잖니.”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뭐?”

무언가 바로 말하려던 에르네스트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 보이는 습관 중 하나였다.

“혼자 생각 좀 하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데 괜히 달라붙어 봐야 에르네스트의 짜증만 부추길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행복한 하루였으니, 여기서 헤어지고 각자 하루를 마무리 지으면 깔끔하겠지. 쿨하게 생각하기로 정했다.

“그래, 잘 가. 그럼.”

“너도. 조심히 들어가.”

“조심은 무슨. 저긴데.”

엄지손가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키자 에르네스트도 자기 말이 웃겼는지 피식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아파트로 올라가려다가, 다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음반 매장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올라가는 걸 보고 나서 떠날 생각인 것 같았다.

같이 가 줄까란 말엔 인상까지 썼으면서, 막상 헤어질 땐 묘하게 다정한 면모도 있다.

연주회를 하기 전에, 에르네스트를 정말로 필요로 했을 때 그가 바쁜 와중에도 군말 없이 곧바로 응해 준 것을 떠올렸다. 오늘은 거기에 대한 타티아나의 보답 차원이었지.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도 무언가 하나 줄 수도 있었다.

“아 맞다.”

막 생각났다는 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자, 에르네스트.”

“뭐야?”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짐에서 액자를 꺼냈다. 액자 속 사진엔 세 사람이 함께 찍혀 있었다. 일루젼 갤러리에서 찍었던 사진을 인화한 것이었다.

신청을 하면 이렇게 액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기에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하나씩 신청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걸 왜 자신에게 주냐는 듯 말했다.

“난 이런 거 괜찮다고 말했…….”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거 아냐? 난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면 돼.”

남자애 특유의 알 수 없는 자존심 때문인지 에르네스트는 액자를 만들어 갖길 거절했지만, 그래도 저 애가 오늘 타티아나와 함께 놀았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물건을 싫어할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에르네스트는 여자 두 명과 같이 다니면서 그렇게까지 편하진 않았던 것 같다. 보답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냥 이대로라면 무언가 불공평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불공평이란 아나스타샤 혼자만의 기준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대한 에르네스트를 공평하게 대하고 싶었다.

“…….”

에르네스트는 또다시 무언가 생각하는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인다.

이윽고 그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 타티아나와 네가 직접 신청한 거니까 너희가 가지고 있어. 그게 맞아. 아나스타샤.”

그게 맞다는 말이 뭔지 잘 모르겠다.

당연히 우리가 신청해서 받은 거니까 우리가 가지는 게 맞겠지. 네겐 아무 권리도 없어. 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알면서도 너한테 주겠단 거잖아.

갑자기 공격적인 말들이 치솟는다. 아나스타샤는 막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면서 말했다.

“그냥 주겠다고 할 때 받으면 어디 덧나니?”

“왜 짜증인데?”

“짜증이라니? 그냥 묻는 거지.”

공격성을 숨기기 위해선 방어적이 될 필요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시치미를 떼며 비웃듯 물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덧날 것 같아.”

“……뭐? 왜?”

당황한 아나스타샤가 되묻자 에르네스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내가 오늘 그것까지 받아 버리면 불공정하잖아.”

무슨 소리냐고, 똑바로 말해 보라고 하지도 못하고 아나스타샤는 그냥 멍하니 굳어서 지켜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이대로면 계속 길 한복판에 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진짜 간다. 다음에 봐.”

“응…….”

이번엔 정말 떠나간다.

아나스타샤는 길 저편으로 가는 에르네스트를 보면서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그의 말들을 떠올렸다.

불공정하다니?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면 에르네스트의 입장에선 오늘 타티아나에게 고가의 이어폰을 선물받기도 했으니 더 무언가 받기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뉘앙스에선 그런 단순한 셈법이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말하는 불공정이라는 말은,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불공평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인 최상층까지 올라가서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일련의 동작들을 버릇처럼 하면서도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엔 불공정이라는 단어만이 떠돌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윽고 닿은 결론은 그녀를 하여금 희열에 떨게 만들면서도, 두렵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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