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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68화 (568/1,277)

##  568화

친구란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위하고 때론 손해도 감수할 수 있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경쟁을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운동, 놀이, 성적 등 그 무엇이든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신체활동이고 놀이이기도 하면서, 다른 그 어떤 평가에도 앞서는 절대적인 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경쟁의 끝은 음악이 된다.

오랜 기간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며 친구로 사귀어 왔지만, 결국 음악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선 늘 뒤처져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에 있어선 에르네스트와 굳이 진지하게 겨루려 하지 않기도 했다. 농담과 장난. 그것이 아나스타샤가 안주한 친구의 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에르네스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샛길로 빠져나갈 방법은 스스로 막아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그 어떤 비겁한 수라도 떠올릴 수 있었지만, 실제로 쓰는 그 순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견디지 못할 것이란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적어도 견딜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멋대로 굴다간 끔찍한 결과를 마주할 일밖에 남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따져 보고 판단을 내렸다. 또한 스스로에게 단 한 번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에르네스트를 앞설 필요가 있음을 자각했다.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음악의 신도라 칭할 정도였고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음악이 전부는 아닐진 몰라도, 음악을 차치하고선 그 어떤 것으로도 그를 앞섰다 할 수 없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긴 준비를 해 나가며 에르네스트를 살폈다. 언젠가 그 앞에 용기를 낼 때가 오리라 생각하면서.

“……아.”

그런데 그때가 코앞에 닥쳤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없다. 전부 착각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남긴 말에서 아나스타샤는 확신의 실마리를 감지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에게 제대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공정하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겨우 그뿐인데도 최악의 상황은 빗겨 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예상했던 최악은 에르네스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그 눈에 경멸을 담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자애라서가 아니라 타티아나라서라고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차분했다.

긴장감을 보이거나 이상한 눈빛을 하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를 대했다. 거기에선 그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아나스타샤가 먼저 설명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에 아나스타샤가 용기를 내어 불을 당기는 순간 에르네스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분명하게 그녀의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

처음에 드는 건 격렬한 희열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 애가 날.

에르네스트는 딱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상상도 못할 일을 상상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상상이 점점 더 범위를 넓혀서 아나스타샤의 본심에까지 닿았다면, 그리고 제대로 경쟁상대가 되어 줄 생각이라면.

그건 아나스타샤가 지금까지 그를 따라잡기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들에 대한 완벽한 충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에게 모든 심정을 제대로 말한다면 진지하게 들어 줄 것 같다. 그리고 진지하게 경쟁하려 하겠지. 그 성격상 절대 피하려 하지 않고 맞받아 칠 테지.

아나스타샤가 언젠가 그를 상대하기 위해 예리하게 준비해 온 창칼은 지금도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그렇게 마주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건…….”

곧 어두운 기분이 잠식해 왔다.

에르네스트는 평범하게 엎치락뒤치락할 수 있는 수준의 실력을 지닌 친구가 아니었다. 유수의 음악가들로부터 인정받은, 전 세계를 놓고 봐도 몇 안 되는 천재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무기를 리처드에게도 실험해 보았고, 콩쿠르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도 써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르네스트에게 확실히 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준비한 것들은 그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고 무너질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에르네스트가 지닌 무기들을 유심히 보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게 그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엉망으로 깨어지고 나면, 정말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어떤 방식으로든 견딜 수 있는 결과로 향하길 바라며 지금까지 준비해 왔지만, 막상 정말로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오늘 같은 외출을 영영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그렇게 만든 게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 자신이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

회색빛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았다.

항상 알아채 주길 바라면서도, 아무 말도 직접 할 수 없었던 도피 심리는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두 친구와 다른 입장에서 마주할 준비를 하면서 마음의 준비도 해 왔지만, 이번이 정말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를 흔들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오늘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나? 그냥 이대로라도 괜찮지 않나.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나스타샤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된다. 불분명함 사이에서 간신히 그러모은 것들을 그냥 묻어 버리는 일은 그녀 스스로를 땅에 파묻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초연한 성격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를 묻어 버린 후에도 타티아나나 에르네스트를 이전과 똑같이 볼 수 있을지, 그녀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아, 모르겠어.”

중얼거리며 아나스타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르겠다고 해서 그냥 백지를 써서 내면 편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쪽이든 다시 한 번 확고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통 각오로는 할 수 없는 결정을.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아나스타샤는 방 밖으로 나왔다. 일단 뭐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부엌으로 향하니 이미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졸음이 온 눈으로 일리야가 물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다가 잠이 와서 커피를 끓이러 나온 모양이다.

대학생이 된 그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온 줄도 몰랐지?”

“타티아나랑 만난다며 나갔잖아. 자고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이즈마일로프가에서 타티아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그 이름만 대면 며칠이건 집에 안 들어와도 괜찮을 정도였다.

일리야는 그래도 집에 온 동생이 반가운지 찬장에서 컵을 하나 더 꺼내며 물었다.

“뭐 마실래?”

“커피.”

“자야 할 시간에 무슨 커피야. 코코아 마셔.”

“그냥 커피 주면 안 돼?”

“안 돼.”

“…….”

은근히 애 취급 하는 게 거슬린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여느 때처럼 짜증을 내지 않고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았다.

말 없는 남매 사이로 주전자 물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일리야가 끓는 물을 컵에 옮겨 부었다. 칵테일 등을 잘 만들기도 해서 그런지 그냥 컵에 물을 붓는 동작인데도 어딘가 절도가 있어 보인다.

“일리야.”

“어.”

아나스타샤는 아무 생각 없이 일리야를 불렀다. 그리고 말이 나간 후에야 뒤에 생각이 달라붙었다.

살짝만 이야기해 볼까.

일리야는 그리 믿음직스럽다 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자기 주관이 올곧고 행동력도 강한 부분이 있었다. 그와 그렇게까지 털어놓고 지내는 남매관계라 할 순 없었지만, 살짝 비틀어서 이야기하고 의견을 듣는 정도는…….

“…….”

하지만 그건 곧 일리야를 상대로 시험하는 행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아나스타샤는 괜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몇 번이고 뒤집히고 꼬인 질문을 뜬금없이 던졌다.

“세상에 금기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고, 일리야 역시 잠깐 생각해 보고는 곧장 답했다.

“당연히 있지.”

“어떤 거?”

“예전에 기억 안 나? 문지방에서 인사하지 말라고 배웠던 거.”

어릴 적이었다. 현관에서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가 부모님에게 혼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문을 가운데에 놓고 인사하거나 악수하지 마라, 식사할 땐 거울을 보면 안 된다 등등 미신이라면 미신이라 할 수 있는 금기들이 여럿 존재했다.

일리야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이어 말했다.

“라이터 하나로 담배 여러 개에 불을 붙이면 안 된다던가. 이건 나도 얼마 전에 들었어.”

“왜?”

“나도 몰라. 재수가 없다더라.”

그건 좀 신기한 금기이긴 한데…… 사실 아나스타샤가 원했던 건 이런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리야는 제대로 대답했을 뿐이니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가 타 준 코코아를 홀짝였다. 이것만 다 마시고 얼른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일리야는 아나스타샤를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나네.”

“작년?”

“조금 덜 더웠을 때였지 아마. 타티아나가 음반 기획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때니까.”

살짝 노곤해지려던 아나스타샤는 뜻밖의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극소수의 몇 명 빼고는 비밀일 음반에 대해서도 일리야는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애랑 이야기를 했었거든.”

“언제?”

“작년 이맘때라니까?”

시간을 떠올려 보니 타티아나가 음반을 만든 것도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바로였다. 그때 고민하다가 어디선가 일리야를 만났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제대로 설명해 보란 눈으로 바라보자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고 이야기했었어.”

우연히 만났다면 할 말 없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약간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코코아 잔을 살짝 흔들었다.

일리야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 1년 전의 기억을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때 그 애가 고민하던 게 뭔지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대충은 알겠더라고. 음반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될지 확신이 없다는 걸.”

그 말을 듣고는 짚이는 부분이 많았다. 타티아나는 그렇게 많은 음악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면서도 음반에 수록할 곡들을 정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항상 단번에 하려고 하는 법이 없었다. 늘 생각하고, 자신이 해도 되는지 몇 번이고 고심한다.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 부분을 일리야도 알아봤구나. 아나스타샤는 가끔 예리한 오빠가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해 줬어?”

“일단 잘하는 걸 먼저 보여 주라고 했지. 그렇게 인정받고 나면 뭐든 해도 될 테니까.”

“…….”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원론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야말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었다.

잘하는 것으로 공평하게 마주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이 흔들리면 결국 그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하게 되리란 것을 아나스타샤는 다시 되새겼다.

일리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어떻게 되었는진 모르겠네.”

“잘됐어.”

아나스타샤는 그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네.”

성의 없는 대답이었는데도 일리야는 그 정도면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타티아나라면 알아서 잘했을 것이란 믿음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러던 그 믿음은 반 바퀴 돌더니 그의 동생에게로 향했다.

“아나스타샤, 너도 음반 만들어 혹시?”

그 믿음에 부응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미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엔 일련의 계획이 차곡차곡 쌓아올려지고 있었다.

“원래 계획엔 없었는데, 하려고.”

“방금 결정한 거야?”

“응.”

옆에서 지켜본 타티아나는 음반을 만든 뒤로 모든 일들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녀의 속에서 어떠한 매듭이 정리된 것이다.

타티아나가 했었던 일이라면 이유로선 충분했다.

갑자기 음반을 만들 계획이라는 동생을 보고도 일리야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작품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 경우도 종종 있는 법이지.”

음반 자체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꿰뚫어 본 듯한 말에 아나스타샤는 모른 척하며 컵을 기울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일리야는 옅게 웃기만 했다.

이윽고 남매의 짧은 티타임이 끝났고, 컵을 씻어 놓은 일리야가 말했다.

“난 들어갈게.”

“응.”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자.”

“응.”

아나스타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시 후 일리야가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아나스타샤는 식탁에 앉은 채 천천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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