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69화 (569/1,277)

##  569화

전화를 받던 마카로프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바꾼 지 얼마 안 된 스마트폰을 그렇게 고장 내면 손해 보는 건 마카로프뿐이다.

그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면서 스마트폰을 귀에서 살짝 떼 놓았다. 전파 너머의 상대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그 음반과 동일한 수준의 레코딩 환경과 마스터링을 제공해 주시기만 한다면 두 배는 더 쳐 드리겠단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타티아나와 함께 음반을 작업한 뒤로 스튜디오로 걸려 오는 전화가 부쩍 많이 늘었다.

무명 음반에 대한 단순 문의 전화가 제일 많긴 했지만, 가끔은 음반 제작 문의도 따라오곤 했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았지만, 그것을 이 작은 시디 한 장에 충실히 담아 낸 것이 스튜디오와 프로듀서의 실력이라는 것을 알아본 이들 역시 많았던 까닭이다.

홍보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거리가 들어와 주는 것이라면 마다할 필요도 없었다. 더군다나 실력을 알아준 것이니만큼 같이 일할 맛이 났다. 마카로프는 그렇게 음반 제작을 문의해 온 뮤지션들과 함께 지난 1년간 음반을 몇 개 제작하기도 했다.

- 아니라면 어차피 중요한 건 마스터링 능력이니 엔지니어분에게…….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제대로 된 뮤지션이 아닌 사람들의 연락도 오곤 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들을 온전히 음반에 담길 원하지 않는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뮤지션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에 음반에 거짓이 없이 또렷하면 또렷할수록 수준이 여실히 드러나 버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때문에 음악을 가공하는 후처리 기술이 뛰어난 전문가에게 맡겨서 모자란 실력을 감추길 원한다. 이들이 에우테르페 레코즈에 전화를 건 이유는 타티아나의 음반이 전부 뛰어난 마스터링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마스터링을 언급하는진 안 봐도 뻔하다. 같은 수준의 기술이 들어간다면 자신들의 음반도 타티아나의 것과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가 찬 경우였지만, 어떻게 보면 후처리 기술들이 너무 좋아져 버린 현 레코딩 시장이 만들어 낸 문제이기도 했다. 어떤 음원을 가지고 와도 들을 만하게 변신시켜 버리니 뮤지션들이 힘을 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갑갑한 심정으로 마카로프는 스마트폰에 대고 말했다.

“해당 음반에 본사의 특수한 마스터링 기술은 들어간 게 없습니다. 큰 기대를 하셨다면 실망하실 테니 다른 곳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무슨 말입니까? 그 음반이 그럼 그냥 원본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 말도 안 되는……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요즘 세상에 없어서 직접 만들어 드렸으니 아실 때까지 들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그 말 뒤에도 상대는 무어라 말을 이어붙였지만 마카로프는 탁 끊어 버렸다. 지금 전화를 건 상대가 타티아나의 음반을 백 번쯤 들으면 음악이 뭔지 그 본질을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 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며 마카로프는 나지막이 웃었다.

누가 무어라 생각하건 그와 타티아나는 확실히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거기에 따라붙는 의혹이나 망상들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누가 뭐라 한들 실존하는 가치에 변화는 없다.

마카로프는 의자를 빙글 돌리며 발 받침대에 발을 올려놓았다.

당분간 조금 쉴까 싶기도 하다. 1년 동안에도 많은 작업을 해 오면서 누구나 만족할 만한 레코딩과 작업물을 내놓기도 했지만, 타티아나와 일했을 때만큼 그런 전율이나 감동을 느껴 본 기억은 없었다.

타티아나가 자극적인 연주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작곡가들이 안배해 놓은 그대로, 충실하게 그 후계자처럼 연주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거대한 무게감을 완벽하게 담아냈고 타티아나라는 연주자의 음악성과 가치 역시 후련하게 드러냈다.

언제쯤 다시 그런 녹음을 해 볼 수 있을까?

“……크흠.”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와 계속해서 연락도 하고, 종종 스튜디오에 와서 이러저런 공부를 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녀로부터 다시 음반 작업을 하고 싶단 말을 듣진 못했다.

1년에 하나씩 해 주면 가장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마카로프가 처음 말했던 음반으로 영생한다는 말을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때문에 이 음반이 그녀의 1년을 그대로 기록하여 평생 남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준비만 해도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같이 작업해 봐서 잘 안다.

타티아나는 내년에 열일곱 살로 큰 국제 콩쿠르들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런 굵직한 콩쿠르들의 개최와 맞물리기도 했다. 이게 연주자에게 있어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프로듀서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와 함께 다시 음반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어른이자 음악가로선 타티아나가 그냥 콩쿠르 준비에 집중하길 바랐다. 참고 지켜볼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년에 그녀가 국제 콩쿠르에서 정말 우승하게 된다면…….

“프로듀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는 베로니카가 마카로프를 불렀다. 마카로프는 똑바로 앉으며 낮게 한숨부터 쉬었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이어 말했다.

“피곤한 손님은 아니니 긴장 푸세요.”

“누굽니까?”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입니다. 타티아나의 친구분이죠.”

“아!”

그 이름을 들은 마카로프는 팔걸이를 탁 치며 허리를 세웠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1년 전에도 봤었고 그 후에도 타티아나 곁에 있는 것을 봤기에 마카로프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밤샘 작업을 하던 타티아나에게 의지할 기둥이자 음악가 동료로서 함께 있어 준 정말 고마운 친구였다.

또한 연주자로서 음악적 완성도도 낮지 않았다. 얼마 전엔 미국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의 곁에 있는 아나톨리나 에르네스트 같은 연주자들에게도 욕심을 내곤 했는데, 아나스타샤의 음악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럼 모시고 오겠습니다.”

마카로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로니카가 잠시 나갔다. 마카로프는 그 잠깐 사이를 틈타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큰 문제는 없었지만 얼굴에 피곤이 가득해 있었다. 신뢰할만한 파트너로 보이기 위해선 피곤해 보이면 안 된다. 마카로프는 고개를 까딱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몇 초 정도면 충분했다. 마카로프가 준비를 마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오래간만이에요.”

처음 봤을 때도 느낀 바 있지만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이 굉장했다. 단순히 타티아나보다 키가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흡사 연주자가 아니라 배우들에게서나 찾아볼 법한 에너지가 그녀에게선 느껴졌다.

타티아나 역시 얼굴만 보면 배우를 해도 무방하겠다 싶지만, 생각 외로 평소엔 존재감이 희미하고 그 행동이나 말씨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미약하고 옅은 편이었다. 가만 비교한다면 친구인데도 두 사람은 극과 극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연주자가 된다는 것을 본다면, 아나스타샤 역시 비슷하리라 마카로프는 믿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차 드시겠습니까?”

“홍차로 부탁드려요.”

아나스타샤를 소파에 앉히고 마카로프는 홍차를 끓여 왔다.

식탁에 따뜻한 차 두 잔이 올라가자 자연스레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마카로프는 먼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어 화두를 열었다.

“저번 포트워스 콩쿠르 우승 축하드립니다. 아나스타샤.”

갑자기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아나스타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축하받을 줄은 몰랐는데.”

“축하드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알기는 한참 전부터 알았죠.”

“감사합니다. 상은 타고 볼 일이네요.”

“하하, 그렇죠. 상은 타고 볼 일이죠.”

어린 연주자들에게 국제 대회 수상 같은 것은 단번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커리어였다.

때문에 마카로프는 그 부분을 유연하게 몇 번 칭찬했다. 아나스타샤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추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에 대한 칭찬 등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기뻐하며 마카로프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사실 그렇게까지 큰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았다.

그 태도는 타티아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수상 경력은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태도. 결국 음악가로서 완성되기 위해 거쳐 가는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그 정도의 인식으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예상대로 타티아나만큼의 거물이라 생각하며 마카로프는 그 이상 대화를 돌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저희 스튜디오에 찾아주신 건 어떤 이유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이고는, 마카로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음반을 제작하고 싶어요.”

“흠…… 콩쿠르 제출용 DVD를 음반이라 말씀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연주자 데뷔 음반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용도예요.”

묘한 이유였지만 이런 의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애가 강한 뮤지션들은 종종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남기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곤 한다. 물론 그렇게 꽁꽁 숨겨 둔 음반은 뮤지션을 영생하게 하긴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했다.

아나스타샤도 자기애가 강한 쪽인 건가? 마카로프가 말없이 바라보자 그녀는 이제야 덜컥 생각이 들었는지 조심스레 물어 왔다.

“혹시 최소 제작 매수 같은 것도 있나요?”

마카로프는 손을 저었다.

“딱히 정해져 있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100장 정도는 계약하시는 편이죠.”

“……전 그렇게까지도 필요하지 않아요.”

“정말 개인적인 용도이신가 보군요.”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간에 좋았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기대할 만한 연주자일 테고, 그녀의 음악은 일단 스튜디오에 남는다. 좋은 음악의 파형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도 마카로프는 더 이상 무언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하, 한 장을 녹음하실 계획이라도 저희 스튜디오에 찾아오셨다면 잘 오신 겁니다. 얼마든지 도움을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무작정 찾아와서 한 이야기가 이렇게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듯했다. 아직 어리긴 한 모양이다.

마카로프는 순수하게 그녀를 돕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 이 도움이 나중에 더 큰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에 있는 연주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음반 한 장에 압축하는 일을 도울 뿐이다. 그것이 마카로프의 일이었다.

“그러면…… 음반의 주제로 정해 놓으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인 음반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기준이 되어 줄 주제는 있어야 했다. 마카로프는 그러한 기준 없이 만들어진 음반은 굉장히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잠시 침묵했다. 마카로프가 빠르게 덧붙였다.

“아, 개인적인 것이라 했으니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제가 프로듀서로서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면 큰 틀 정도는 알고 가는 게 나아서 말입니다.”

편안하게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마카로프는 찻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무조건 기분에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조금 막연하게나마 원하는 것은 분명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확답하듯 말했다.

“제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는…… 그런 음반을 만들고 싶어요.”

“확인이라…….”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낼 생각이고요.”

최고의 기량으로 최고의 음반을 만들어 놓고 싶다.

이토록 명료하고 매력적인 의뢰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자기애에 충실한 뮤지션 특유의 흥분된 어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혼자서 무언가 준비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떤 이유로 저런 목소리를 내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손으로 내는 음악을 들어 보면 알 테지. 마카로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나스타샤. 저도 그 음반을 꼭 듣고 싶어졌습니다.”

“…….”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를 마주 보았다. 그 눈엔 음악을 연주하기 직전의 희열과 약간의 긴장감 등 여러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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