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70화 (570/1,277)

##  570화

원하는 바는 정확하게 전해졌고, 이젠 프로듀서와 피아니스트가 남았다.

마카로프는 찻잔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테이블 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집중하며 무언가를 읽어 내는 중이었다.

마카로프는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조금 더 이야기해 봐야 한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가 어떤 연주를 하는지 콩쿠르 영상을 통해 본 바 있으나, 그걸론 아나스타샤라는 피아니스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음반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이자 파트너로서 제대로 피아니스트의 힘이 되려면 조금 더 가깝게 음악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떤 곡들을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는지, 또 가장 깊게 연구한 작곡가는 누구이며 그중에서도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곡은 어떤 곡인지. 물어봐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음.’

하지만 마카로프는 숨소리마저 방해가 될까 싶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연주를 준비하는 피아니스트를 건드리는 청중은 없다. 지금 여기엔 피아노가 없지만, 마카로프는 벌써 청중석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고요 속에서 아나스타샤는 한동안 집중하다가, 몇 개의 곡들을 끌어내어 손에 쥐었다.

잠시 현실이 아닌 어딘가로 넘어갔었던 에너지가 다시 휙 돌아와선 화르륵 불탄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말씀하시죠.”

“음반에 어떤 곡을 넣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조금 묻고 싶은데요.”

“예.”

“피아노로 물어도 되겠죠?”

말로 자신의 음악들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잘 알았고, 마카로프는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바로 체크하도록 하죠. 아나스타샤.”

두 사람은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는 단독 부스로 향했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그 모든 것을 데이터로 기록하기 위한 목적 단 하나만을 위해 조형된 공간이었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를 잠깐 옆에 서 있게 하고는 곧바로 기본적인 것들을 점검했다. 피아노를 향해 겨누어진 마이크들에 틀어짐이 없는지, 또 피아노 자체엔 큰 문제가 없는지 등등이었다.

당장 녹음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아나스타샤가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에 대한 리허설일 뿐이지만, 이 순간 또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음악은 사라진다. 마카로프는 그 어떤 음악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할 생각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카로프가 피아노 쪽으로 손을 펼쳤다.

“다 되었습니다. 아나스타샤. 앉아서 확인해 보시죠.”

“고마워요. 마카로프.”

아나스타샤는 그를 친밀하게 부르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고, 건반을 본다.

여느 피아니스트들은 일단 건반을 모두 점검해 보면서 그 무게와 성격 등을 가늠한 뒤 손을 풀고 연주에 임하는 편인데,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손으로 만져야 하는 공간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타티아나가 연주에 임하기 직전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여기에 존재한다.

혹시라도 늦을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메인 컨트롤룸으로 돌아온 마카로프는 유리 너머의 부스를 바라보면서 빠르게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마이크들이 부스 안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면서 파형을 그린다. 아나스타샤의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마저 미세하게 살아 있다.

“…….”

마카로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원래 같았으면 준비되었다고 사인을 주어야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건반들은 오밀조밀 모여 있지만 그 숫자가 88개나 되어서 너무 넓고 길다. 아나스타샤는 그 너비를 더 압축하고 압축한다. 시야에 닿지 않는 부분까지 모두 자신의 감각 안에 집어넣은 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

어떤 곡을 시작할지 말도 없이 아나스타샤는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의 소리가 멎고, 음악만이 남는다.

한 음이 피아노를 부유하게 한다. 음악을 시작하며 깊숙이 박아 넣는 음이지만 건반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대조적으로 피아노와 음악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급격하게 무언가가 쓸려 내려가며 무너지는 음형.

마카로프는 이 음악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 본 구조인데 바로 와닿지가 않는다. 간질거리면서 스쳐 지나가고, 어디 한번 알아맞혀 보라는 듯 너울거린다.

하지만 노련한 음악 프로듀서 마카로프의 귀를 속이는 건 10초 남짓이었다. 같은 음형이 두 번 반복되기 전에 마카로프는 한 곡을 떠올려 냈다.

‘고도프스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는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였다.

그는 기교를 갈고 닦는 것이야말로 피아니스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성을 마음껏 떨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수많은 에튀드들을 남겼다.

거기엔 쇼팽의 에튀드를 편곡한 53개의 고난이도 에튀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구성은…… op.10의 5번 같고…….’

마카로프는 빠르게 기억을 되살렸다. 오래전 고도프스키를 녹음하면서 그가 편곡한 에튀드들에 대해서도 알아본 바 있었다.

고도프스키는 24개의 에튀드를 53개로 확장했다. 한 곡을 모티브로 여러 개의 에튀드를 써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op.10의 5번째 곡은 여러 개의 편곡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은 내림사장조이지만 이건 어떻게 들어도 단조의 곡이야. 그리고 이 뭉그러뜨리는 화음은…….’

본래 쇼팽의 에튀드 op.10의 5번은 검은 건반만을 이용한 장조의 곡이다. 경쾌하고 청명한 음색을 꾸미면서 정확한 타건 능력과 박자 감각 등을 연습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이 곡은 흰 건반을 기본으로 피아노를 한쪽으로 무너뜨리듯이 연주하고 있었다.

조성은 가단조. 고도프스키가 편곡한 op.10의 5번 중 단조의 곡은 하나뿐이었다.

쇼팽 에튀드에 의한 연구. 그중 9번째 연구. 타란텔라.

“…….”

다시 한 번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두 줄기의 선율이 얽혀서 흘러내리다가, 뒤틀리며 퍼져 나간다.

음산함이 달빛을 타고 흐른다. 처연하며 아름답고, 요사스럽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실루엣은 흐릿하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한낮의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마카로프는 비 오는 새벽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 손엔 긴 칼이 한 자루 쥐여 있다. 칼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순간 번뜩인 섬광이 번개인지 칼날에서 반사된 빛인지 마카로프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잠깐 보여 주었던 칼날을 다시 갈무리하고는 후드를 더 깊게 내리쓰며 빗속을 걷는다. 마카로프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빠른 걸음으로 바닥을 딛고, 진창을 뛰어넘고, 빗방울을 베려는 듯 칼을 휘두른다. 무의미한 일이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며 빗속을 헤쳐 나간다.

아주 잠깐 그 뒤를 따라갔을 뿐인데도 마카로프는 앞서가는 사람의 인생을 따라 걷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연습도 한 번 없이 가볍게 보인 리허설에서 나온 실력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연주.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인 데다가 타티아나의 친구, 게다가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콩쿠르 우승자. 알캉의 곡까지 연주해서 그 위치를 쟁취했으니 실력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이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그 수준이 상상 이상이었다.

일반적인 쇼팽 에튀드를 연주해야 할 열여섯 살의 나이에 고도프스키의 고난도 편곡 에튀드를 연주하면서, 전혀 틀리거나 어색한 부분이 없다. 테크닉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 속에서 들리는 깊은 상념과 아카데믹함은 마카로프를 근원부터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머금은 음악에는 힘이 실린다. 이 음악엔 페이소스가 깃들어 있었다.

“…….”

그는 타티아나와 처음 이 스튜디오에서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타티아나는 많은 것에 달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콩쿠르에서 막 우승했음에도 거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물론 기뻐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마카로프가 음악가의 영생을 언급했을 때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건 일반적이 성취욕이나 과시욕과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지닌 의사였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들으며 그녀 역시 비슷한 의사로 이곳에 당도했다 여겼다. 아니라 부정할지도 모른다. 그냥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당신을 찾았노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음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고뇌하고 지친 끝에 결단을 내리려 음반을 필요로 했다. 그것이 빗속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충동적이고 의미가 모호한 일일지라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선 견딜 수 없어 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들을 순 없어도 의사와 결의는 2분 정도면 충분하다.

“……브라바.”

연주가 끝나고, 마카로프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박수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숙였다. 한 사람밖에 없는 유리 너머의 청중에게도 예를 다하는 인사다.

마카로프는 웃으며 말했다.

“바로 들어 보길 잘했군요.”

지금 녹음된 이 리허설 파일에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느낀다.

마카로프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일어나 부스로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훌륭했습니다. 이 연주 뒤에 있는 연구와 연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아나스타샤.”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몸을 돌려 앉으며 웃었다. 일단 칭찬은 제대로 들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녀는 방금 연주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미소를 보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마카로프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음반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스스로의 음악에 자신이 없어서 묻는 게 아니다. 이 음악을 단단하게 굳혀 놓으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취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

마카로프는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작업합시다.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곧장 그런 말을 뱉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방금 들었던 음악을 되새겨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도프스키의 전문가들에게 이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정도로 좋은 연주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욕망이지, 아나스타샤의 욕망은 아닐 테지요.”

곧장 대답을 주지 않는 마카로프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눈썹 끝을 살짝 세웠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답답해하는 모습이다.

“전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하하,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려서 그렇겠죠?”

답답한 마음을 농담으로 얼버무리며 웃는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상황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미 어리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처신.

마카로프는 옆머리를 짚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와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녀만큼이나 상대하기 버겁다. 아이 다루듯 했다간 곧장 신뢰를 잃고 냉대당할 것이다.

“이건…… 사실 제가 프로듀서로서 조언을 드리기보단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군요.”

“나은 방법요?”

마카로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음악에 서린 무게감은 타티아나가 처음 보여 주었던 것에 비견할 만했습니다. 그러니 타티아나를 불러 함께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피아노를 망치로 여기기도 했었던 타티아나라면 지금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분명 흔쾌히 승낙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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