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분명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나 하는 것이었지만, 어떻게 생각해 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긴 힘들 것 같았다. 불과 얼마 전 타티아나와 통화했을 때 그녀에게선 어떠한 위화감이나 문제도 찾아볼 수 없었기도 했고.
그렇다면 친한 친구인 타티아나를 부르기 꺼려 할 이유가 있나?
심지어 타티아나는 의지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실력 있고 영리하며 배려심 깊다. 마카로프조차 요즘 피아니스트에게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을 때면 타티아나의 얼굴부터 떠올릴 정도로, 그녀는 이럴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그 애에게 이건 들려주고 싶지 않아요.”
마카로프가 영문을 모르겠단 눈빛을 하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짧게 이유를 말했다. 마카로프가 재차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녹음을 하러 올 이유도 없잖아요? 바보도 아니고.”
농담할 여유를 되찾았는지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옆머리를 꼬았다.
그리고 그 손이 천천히 멈춘다.
“제가 여기에 온 건, 지금 제가 쥐고 있는 게 최고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손끝은 그저 천장을 향하고 있을 뿐이지만, 마카로프는 거기에 무언가 맺혀 있음을 느꼈다.
저 손이 저기 있는 건반으로 향할 때 무엇이 증명되는지도 보았기 때문에,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가 최고라 칭하는 음악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것 중엔 최고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였던 거지. 마카로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음악이라면, 타티아나 역시 최고라 말해 줄 겁니다.”
작년 타티아나가 이 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으로 밤을 지새울 때,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달려와선 타티아나가 완벽한 상태로 최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드레스를 가지고 온다는 발상을 해내지 못했을 테고, 그날 라흐마니노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반대의 상황일 때 타티아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나스타샤를 도와 더 높은 위치에 올려 줄 것이다.
물론 그건 누구보다 아나스타샤가 잘 아는 부분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안 돼요.”
타티아나를 부르자는 마카로프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무언가 묻거나 제안하는 건 아나스타샤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마카로프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뱉고, 시원스레 말했다.
“좋습니다. 뭐…… 그렇다면.”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예.”
“부탁할게요. 그 애에겐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진지한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했다.
마카로프는 그녀에게 신뢰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여유를 되찾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웃었다.
“그럼 음악 이야기나 할까요.”
무엇이 그녀를 고독하도록 몰아세우는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음악을 파고들다 보면 나올 문제다. 마카로프는 무작정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와 부스를 빠져나왔다.
메인 컨트롤룸은 피아노가 있는 부스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마카로프는 차를 다시 타서 아나스타샤에게 주고,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았다. 가볍게 목을 축인 뒤 마카로프가 말했다.
“고도프스키의 쇼팽 에튀드 연구…… 나쁘지 않죠. 하지만 단독으로 쓰기엔 애매합니다. 몇 곡을 더 묶어서 에튀드집을 내는 게 낫겠죠.”
지극히 음반 제작자로서의 관점을 설명해 준다.
아무리 훌륭한 곡이라도 2분 남짓한 곡으로는 음반의 볼륨을 다 채울 수 없다. 한계가 뚜렷하다. 때문에 같은 수준의 곡들을 묶어서 상승효과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녀도 음반이라면 수백 수천 장은 들었을 음악가이니 지금 마카로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도는 곧바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갖춘 실력자였고, 마카로프는 수십 년간 음악을 다룬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중간에 메시지가 왔는지 스마트폰이 울기도 했지만, 확인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은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주제는 고도프스키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도프스키에 이어 모리스 라벨, 아메데 메로 등 고난도의 피아노 독주곡들을 작곡한 음악가들의 이름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아는 대로 작곡가와 곡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카로프는 내심 감탄했다. 타티아나만큼은 아니지만, 아나스타샤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레퍼토리가 넓고 배움도 깊었다. 이 정도면 이미 음악가로서 기초 토대는 튼튼하게 다져 놨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렇게 음반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마카로프는 조금 더 심층적인 내용으로 들어섰다.
“이 음악을 음반 위에 단단하게 굳혀서 어디에 쓰실 건진 모르겠지만…… 날카롭게 갈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타티아나는 훨씬 더 능숙했었죠.”
“타티아나의 이야기는…….”
“그냥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아나스타샤를 자극할 생각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목적성을 지닌 음반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라는 이름만 나와도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다. 마카로프는 그만큼 아나스타샤를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잘 안다 한들 그래선 안 되니까.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꾸만 이대로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타티아나가 찾아와 원망하는 눈빛이라도 한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고.’
그리 깊게 파고들 것도 없이 아나스타샤는 불안정해 보인다. 이 상황을 가장 걱정할 만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타티아나였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는 잘 몰라도 타티아나가 어떤 성격인지에 대해선 지난 1년간 알게 되었다.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서 마카로프는 생각했다.
방금 전 아무 참견 않겠다고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어른인 양 무언가 가르치는 것처럼 대하는 건 굉장한 실수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카로프는 펜 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피아노 앞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죠. 아나스타샤.”
“바로요?”
“예. 피아니스트들은 건반을 짚었을 때 비로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기도 하니까.”
일단 아나스타샤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리고 음악을 더 들어 보고 싶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도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그게 더 좋은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마카로프는 유리 저편의 부스를 바라보았다. 피아노 한 대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단독 부스.
그는 펜을 탁 내려놓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녹음하실 게 아니라 리허설이라면, 합주용 부스에서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합주용 부스요?”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카로프는 사심 가득한 미소로 웃었다.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듣고 싶은데, 피아노 단독 부스에선 감상하기가 여의치 않아서 말입니다.”
“아. 공간이 좀 좁죠?”
“그것도 그렇고. 음향적 문제도 있고요.”
피아노 한 대만을 위한 단독 부스는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마이크로 수집하고, 그 외에 새어 나가는 모든 소리들을 다 흡수해 없애 버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벽에 맞고 반사되는 소리들도 마이크에 잡히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녹음을 하기엔 깔끔하지만, 옆에 사람이 서 있기만 해도 소리가 바뀔 정도로 예민하다. 그리고 감상하겠다고 서 있어 봤자 제대로 감상하기도 어렵고.
“그래요?”
갑자기 부스 안에서 같이 들으면 안 되겠냐는 요청에 난색을 표하는 연주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저도 개인 연습실에서 듣는 것과 홀에서 듣는 것의 차이 정도는 알거든요.”
“상당히 큰 차이가 나죠.”
아나스타샤는 부스 쪽을 힐끔 보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그런 차이도 고려해 가면서 터치를 바꾸더라고요. 대단한 애죠. 정말로.”
“…….”
마카로프는 갑자기 나온 친구 자랑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타티아나는 마카로프의 어깨너머로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실제로 경험하는 음악적 체험에 입각하여 굉장히 빠르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피아니스트의 수준에서 접목시키고 있었다. 굉장한 천재성이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런 기술들을 부릴 수 있게 되고 싶은 건가? 만약 가르쳐 달라 청한다면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저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 것 같았다. 여기에 없는 그녀를 마치 여기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부르는 건 안 된다고 하면서 왜 타티아나처럼 생각하고, 연주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닮은 연주를 한다 해서 책잡힐 일도 아닌데.
“……가죠. 아나스타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마카로프는 일단 녹음을 실행해 놓고는 아나스타샤를 합주용 부스로 안내했다.
그는 부스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전체적인 세팅을 점검해 나갔다. 피아노용 마이크들을 제외하곤 모조리 치워 버리고, 쓸데없는 물건들도 모두 밖으로 내놓았다.
그렇게 합주용 부스 안엔 피아노와 마이크 두 개, 그리고 마카로프가 앉을 의자 하나만이 남았다.
단독 부스보단 훨씬 더 감상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이곳은 연주자가 여러 악기들의 소리를 동시에 듣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카로프는 감상자의 입장으로 의자에 앉았고, 아나스타샤 역시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 앞에 위치했다. 그녀는 슬쩍 어깨를 스트레칭하더니, 마카로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칠까요?”
“원하실 때, 원하시는 대로.”
“…….”
녹음은 아까 전부터 되고 있다. 아나스타샤가 준비되었을 때 연주를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소리가 잦아들고, 아나스타샤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음악으로 고요를 깨뜨리기 직전이었다.
경망스러운 벨소리가 부스 안을 뒤흔들었다.
“??”
연주회장에서 벨소리가 울린 것만큼이나 두 사람은 당황했다. 특히나 막 연주에 임하려던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는지 발로 피아노의 페달 봉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쾅 소리가 울리고,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악! 아으…….”
“괜찮습니까!?”
“아…… 예, 전 괜찮아요. 그보다 피아노가…….”
피아노와 페달을 이어 놓는 페달 봉은 견고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피아노를 걷어찼다는 것에 놀랐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흠집이 좀 났을진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마카로프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벨소리는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빨리 이 벨소리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스마트폰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 표정을 본 마카로프는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그보다 전화부터 받으시죠.”
“아…….”
아나스타샤를 일어서게 하자 그녀는 벨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엉거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상대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타티아나.”
녹음으로 인한 고민이나 발끝에서 오는 고통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똑같은 어조로 거짓을 말하기도 했다.
“응. 이제 일어났어.”
마카로프는 페달 봉 부근을 살피고 있지만, 온 신경은 아나스타샤의 전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