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2화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조금 충동적이었다.
바로 어제 크로커스 시티에서 놀고 온 참이니 오늘 하루 정도는 각자 쉬어도 좋겠지만, 에르네스트에게 커스텀 이어폰을 선물해 주면서 아나스타샤에게도 다른 걸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막상 내가 무언가 해 주겠다고 한다면 극구 사양하겠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다 마무리된 셈치는 건 아무래도 빚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혹시 오늘 뭐 하는지 메시지를 보내 봤는데 답도 없고……. 급한 일은 아니니 나중에 연락해 봐도 될 일이지만, 어쨌건 지금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벨카를 쓰다듬으며 스마트폰을 든 나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벌써부터 가슴 한 부근이 충족되는 기분을 느꼈다.
-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스타샤.”
일단 밝게 인사를 건네긴 했는데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별생각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젠 잘 주무셨나요?”
- 응. 이제 일어났어.
이제 일어나셨다고요?
전화벨이 한참 울고 나서야 받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집이신가요?”
-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답한다. 지금 일어났다니까 집이겠지. 어쩌면 침대 위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리송한 기분이 사로잡혀서 말을 고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먼저 물어왔다.
- 어쩐 일이니? 아침부터.
“그냥요.”
- 응?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평소에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쪽은 거의 늘 아나스타샤 쪽이었고, 난 이런 식으로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늘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약속을 하고 나서 전화를 한다.
모처럼 내 쪽에서 건 생뚱맞은 전화가 아나스타샤는 반가운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 아하하하, 그러니?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좋아.
“그리고 만나고 싶기도 하고요.”
- 어제 봤었잖아?
“어젠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
전화도 갑자기 했는데 만나는 것도 갑자기 못 하리란 법은 없었다.
물론 우린 방학이라고 해서 늘 만나서 놀 수만 있는 게 아니라 각자 써야 할 시간들이 필요했지만, 오늘 하루쯤은 더 괜찮을 거라 억지를 부려 봤다.
아나스타샤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난 전화 너머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 그도 그렇네.
그녀는 늘 주도적으로 날 데리고 다니곤 했지만, 가끔 내가 반대로 그녀를 부르면 그땐 아무 말 없이 따라 주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것 같아서, 살짝 제안해 봤다.
“그래서…… 오늘 별일 없으시다면, 만나지 않으실래요.”
- 응? 응…… 그래. 그러자. 언제?
“전 지금 바로 괜찮아요.”
- 어…… 이따 오후에 볼래?
“오후에요?”
- 응.
여유롭게 약속을 잡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된다. 나도 시간을 가지고 준비해서 오후에 만나면 괜찮겠지.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정오를 기준으로 시간을 딱 잘라 양분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오전의 아나스타샤와 오후의 아나스타샤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바로 일어나서 비몽사몽 침대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후엔 다 끝나시나요?”
- ……뭐가?
“지금 하시는 일요.”
전화 너머의 모든 시간이 딱 멈춰 버린 것처럼 침묵만이 이어졌다.
난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벽면을 커다란 도화지라 생각하며 조용히 그녀가 있을 공간을 그려 나갔다.
말을 할 때, 그리고 웃었을 때 들렸던 소리의 울림. 처음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난 그녀가 방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아나스타샤의 방 역시 방음 처리가 되어 있지만, 그건 바깥쪽으로 향하는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이지 이렇게 내부의 음향을 통제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현실적인 장소를 몇 군데 압축하고, 난 아나스타샤가 지금 피아노 앞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근처의 연습실일까? 그러나 개인 연습실이라기엔 느껴지는 공간감이 굉장히 크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공간은 연습실과 콘서트홀을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 내가 지금 뭘 하는지…….
“…….”
- 아.
아나스타샤는 당황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내가 소리만 가지고도 공간을 추측해 내는 걸 몇 번 보여 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린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다 들리는구나?
“예.”
- 아……. 아…… 진짜 나 왜 이렇게 바보 같지…….
그녀답지 않게 중얼거린다. 난 웃음이 나올 것 같다가도, 문득 슬퍼졌다.
아나스타샤가 이 시간에 피아노 앞에 있다는 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 같은 연주자로서 칭찬하고 응원해야 할 일이다. 나 역시 오전 연습을 마친 후였고.
하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내게 숨기려 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그 이유를 바로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히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솔직하게 오늘은 각자 연습하자고 이야기해도 내가 방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나스타샤도 잘 알 텐데.
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어디신가요?”
- ……스튜디오.
“제가 아는 스튜디오 말씀이세요?”
- 네가 아는 거기야.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줄 깜짝 선물로 음반을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런 이유라면 모든 걸 비밀로 할 만했으니까.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준비하던 걸 내 방해로 망쳤다는 실망감이나 허탈감 등이 아닌, 죄책감이었다.
- 거짓말해서 미안해.
거짓말이라는 단어로 단정 지어 놓고 보니 상당히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느끼는 아나스타샤의 잘못은 티끌만큼 작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일 나는 적어도 모든 거짓말에 선의를 담으려 애써 왔다. 좋은 영향만 끼치도록 노력했다. 어리석은 자기합리화일지 모르겠지만, 망령이 현실에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다짐이었다. 그걸 지켰기에 난 지금은 새가 되었을 그녀에게도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아나스타샤 역시 선의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혹시라도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움츠러들지 않길 바란다. 난 벨카의 귀 뒷부분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야말로 캐물어서 미안해요. 그냥 듣고 있을 걸 그랬죠.”
- 그게…….
아나스타샤는 뭔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스스로도 무언가 정리가 잘 안 된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이랄 것도 없이 어른스럽고 딱 부러진 결론을 내놓는 그녀가 이렇게 고민하는 걸 보니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당장 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과, 괜히 내가 더 그녀를 심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부딪쳤다.
녹음에 대한 고민 중이라면 음악가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날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기분에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녀를 우선시하는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일단 스튜디오라면 혼자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오후에 저 때문에 시간 비우실 필요 없어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유능하고 믿음직스러운 분이시니 잘 이야기하셔서…….”
- 잠깐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툭 끊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 잠깐만 타티아나.
“…….”
옆에 있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아나스타샤의 안에서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난 조용히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다.
-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나마 찾아낸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네게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설픈 설명과 사과 속에서 난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다.
나 역시 혼란스러웠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그녀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을 때부터 어느 정도 정리를 한 상태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늘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다짐이 물러지고 기분대로 하는 일이 잦아진 것이.
하지만 가끔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할 때보다 기분이 시키는 대로 할 때, 잘 풀릴 때도 있다. 난 지금이야말로 그런 때라 생각했다.
“아나스타샤.”
무언가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해졌다. 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작년에 기억하죠? 새벽에 아나스타샤가 택시를 타고 왔었던 일.”
- ……응.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냥 작년 내가 녹음할 때 한달음에 와 줬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해도 되겠지만, 일부러 조금 돌아갔다.
아나스타샤는 당시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잘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 어떤 생각이긴…… 한밤중까지 녹음에 매달려 있다고 하니까…… 그냥 같이 밤새 줄려고 했지.
“도와주려 하셨던 것 아니었나요?”
-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라 생각했을걸?
피아노 연주자의 독주 음반 녹음이란 무작정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해서 좋은 음반이 나오지 않는다.
한 연주자가 프로듀서와 상의하여 그간 자신의 음악을 총망라하여 꿰뚫는 커다란 주제를 끌어내고, 그 주제에서부터 비롯된 깊은 사념. 이 시간을 영원히 새겨 넣어도 된다는 자신감. 그런 것들이 정갈하게 작은 음반 위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다.
훌륭한 작품은 고독으로부터 나온다. 그 냉정하면서도 단호한 말은 우리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공부하며 몇 번이나 들어온 말이다. 그리고 연주자로 살아오면서 우린 그 짧은 문장이 깊은 진리에 닿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음악가란 자신의 수명을 분해해서 음악이란 형태로 세상에 흩뿌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그냥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며 무작정 내 옆으로 와 주었다.
언제나 고독하게 혼자 피아노를 붙잡고 피아노와 같은 색이 될 때까지 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만이 연주자의 삶이라 생각했었던 나에게, 아나스타샤는 그것 외의 방법도 있다는 것을 다채롭게 보여 주었다.
난 그 무작정에 힘입어 만족할 수 있는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무작정 그녀를 따라가 줄 때였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 다를 거야. 아마…….
아나스타샤는 머뭇거린다.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작년 내가 음반을 준비하며 생각했던 것처럼, 혼자서 열여섯 살의 완벽한 한순간의 음악을 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해도 분명 잘 해내겠지. 아나스타샤는 천재이니까. 그러나 난 작년에 그녀가 내게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에 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었지.
“그래서, 제가 필요하시나요? 안 필요하시나요?”
- …….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곧 나지막이 마음을 꺼내 놓았다.
- 필요해.
“가도 될까요?”
- ……응.
그렇게 허락을 받고 스마트폰을 꺼서 옆에 내려놓았다.
이야기하던 내내 내 왼손 받침대가 되어 주었던 벨카가 이제야 이야기가 끝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전화를 하면서 쉴 만큼 쉬었으면 다시 놀아 달라는 것 같다. 그 귀여운 눈빛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가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가 봐야 할 곳이 생겼어요. 오늘은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왕.”
벨카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짧게 짖더니 슬금슬금 내 품을 빠져나가선 밖으로 빠져나갔다. 평소에 벨카는 애교도 많고 잘 달라붙는 성격이지만,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할 땐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곤 했다.
벨카가 나가고, 난 혼자가 되었다. 조용히 방금 했었던 전화 통화를 되새겼다.
아나스타샤가 했었던 말과 목소리.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음악을 남기고 싶다고 한 적이 없던 그녀가 내게 한마디로 안 하고 스튜디오를 찾아간 이유.
곁에 있어 주고 싶다. 난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빅토르. 잠시 스튜디오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나요?”
-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갑작스레 한 요청인데도 빅토르는 뭔가 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미안함을 느끼고 그에게 말했다.
“내일 휴가이신데 죄송해요. 마지막 날까지 부려먹다니. 나쁜 고용주죠?”
말해 놓고도 좀 민망했는데, 빅토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아가씨가 나쁜 고용주가 되시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그러니 분발해 주십시오.
더 부려먹어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난 청개구리처럼 그의 휴가를 조금 더 늘릴 수는 없을까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