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3화
익숙한 도로를 지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간 몇 번이나 왔었던 곳이지만, 이렇게 내 이유가 아닌 이유로 온 건 처음이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복도를 따라 걷고, 조금 생경한 기분으로 문을 여니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아나스타샤가 대화를 나누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복잡한 표정을 얼른 치워 버리곤 벌떡 일어나선 이쪽으로 뛰듯이 달려왔다.
“타티아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날 껴안았다. 그런데 이전처럼 등까지 껴안는 포옹이 아니라 어깨 부근에서 멈칫거리는 느낌이다. 결국 날 부르게 된 게 부끄러웠던 걸까.
난 그녀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 내 쪽에서 다시 한 번 꽉 안아 주고는 놓았다.
“조금 일찍 보게 되었네요. 아나스타샤.”
“……응. 그러네.”
직접 오지 않고 정오를 넘겨 오후에 만났다면 보지 못했을 얼굴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홀로 스튜디오를 찾아 녹음을 하려고 하는 아나스타샤. 오늘 내가 직접적으로 어떠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그 시선으로 말미암아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옆을 보니 깡마른 남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간만이다. 눈이 마주치니 그가 웃으며 인사해 왔다. 어쩐지 흡족해 보이는 미소였다.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셨나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하하, 덕분에 말입니다.”
“저도 덕분에 추천해 주신 책은 잘 읽었어요. 음향 역학에 대한 공부는 할수록 신기하고 재미있네요.”
“그게 재미있다고 하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제가 처음이라면 영광이에요.”
농담처럼 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로 난 그가 추천해 준 책들을 읽으면서 피아노 연주자로선 평생 배우지 못했을 지식들을 배우고 있었다.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잠시 동안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짧게 나누었고, 곧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고개를 까딱이더니 소파로 안내했다.
“차를 타 드리겠습니다. 앉으시죠.”
“고마워요.”
소파 앞의 테이블엔 이미 몇 개의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과 그 특징 등을 적어 놓은 종이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음반 제작에 대한 회의를 할 때면 늘 이런 풍경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다.
익숙한 풍경을 보면서,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게 되면 그녀와 음악적인 견해를 나누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표명이었다.
“어제 샀었던 옷이네요?”
“응? 아, 맞아.”
일부러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난 어제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었던 쇼핑몰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곳에서 그녀가 골랐던 옷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매장이 아니라 밖에서 보니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여긴 안인데?”
“그 말이 아니라…… 매장용 조명이 아니란 뜻이었어요.”
“아하하, 알아. 알아.”
“아, 맞다…… 어제 찍었던 사진 있잖아요? 집에서 다시 확인해 보니까 보내 드리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
아나스타샤도 바로 옆에 앉은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가벼운 대화에 따라와 주었다.
우리는 어깨를 붙이고 앉아서 한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산뜻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공고히 추억을 액자 속에 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이 생생한 만큼 선명하다.
한참 대화를 하고 있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향긋한 향이 맴도는 찻잔을 우리 앞에 내어 주었다.
그가 찻잔을 드는 것에 맞춰 우리도 똑같이 찻잔을 들었다.
모두 함께 목을 축이고, 찻잔을 내리자 그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어젠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예, 크라스노고르스크에 있는 크로커스 시티에.”
“아, 대형 부동산 기업이 그 구역을 전부 개발해 놨다던…… 아니, 크로커스 홀이 있는 곳이죠? 실내 팝 콘서트 홀치곤 상당히 컸던 걸로 기억하는데.”
“굉장히 커요. 그리고 팝 음악만 공연하진 않아요. 저흰 오페라도 봤는걸요.”
“오페라라고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그곳에 가 본 적은 없는지 꽤 흥미로워했다. 난 우리가 봤었던 것들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수족관, 쇼핑몰 등 음악과 관련 없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어린 애들이 놀러 다녔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지루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어딘가 흡족한 듯 연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스튜디오에서 지내지만, 밖의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것을 흥미롭게 받아들이곤 했다. 그것이 음악이든 아니든 간에.
“재미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그럼 아까 말씀하셨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도 계속 함께……?”
“같이 있었죠.”
“하하.”
뜻 모를 호탕한 웃음소리.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대화에 주도적으로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찻잔만 기울이던 아나스타샤가 그 웃음소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애는 불편했을지도 모르죠.”
“그럴 리가요?”
“아니라면…… 정말 대단한 애고요.”
나도 비슷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어제 헤어질 때 에르네스트의 표정을 본 바로는 모든 것이 괜한 걱정이었음이 분명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해 주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저도 에르네스트를 생각해서 함께 즐길 만한 곳을 골랐었거든요.”
“그런 거였니?”
에르네스트는 얼굴만 보면 자존심 세고 까칠해 보이지만, 사실 정말 그렇기도 하면서 동시에 동물들을 좋아하고 마술 구경 같은 것도 즐기는 순수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이제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데나 다 좋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크로커스 시티의 쇼핑몰엔 일일 액세서리 제작 교습 같은 걸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 가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었다.
“그 애도 재미있어했을걸. 손재주가 좋은 애니까.”
그리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너와 뭘 하든 금방 배웠을 거야.”
“…….”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와 그의 이야기로 좁아졌다.
난 묘한 기분을 느끼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냐는 듯 생긋 웃었다. 순간 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나누는 어떤 이야기라도 똑바로 마주하고 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 말도 골라내지 못하고 있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지금까지 옆으로 밀어 두었던 이야기가 따로 있었다. 난 테이블 위의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회의하시던 중이었나요?”
“응. 이제 막.”
“전 그냥…… 옆에서 견학하고 있을게요. 괜찮죠?”
아나스타샤가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어떤 음반을 제작하려 하는지 일단 가만히 지켜보고 싶어졌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은근히 내게 제안했다.
“타티아나가 의견을 내 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적극적으로 끼어들어서 아나스타샤의 음반에 영향을 주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잘 알면서 이야기를 꺼낸 걸 보니, 아나스타샤에게 분명히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긴 하지만…… 난 그의 판단을 믿으면서도 일단 내 귀로 그녀의 음악을 듣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니 할 말이 없어요. 지켜볼게요. 혹시 나중에라면 할 말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나중……. 알겠습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지켜본 회의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알캉은 시간이 날 때마다 레퍼토리를 늘려놓아서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이 정도예요.”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많은데요.”
“시간이 많이 남았었나 봐요.”
“흠…… 그렇다면 여기에 프로코피예프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아나스타샤.”
“괜찮아요. 얼마 전에 다시 연습해 둬서 자신도 있고요.”
한 음반에 넣을 수 있는 음악의 길이는 약 74분. 고급 음반이면 길어지거나 음질이 올라가면 짧아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 정도에 맞춘다.
때문에 한 음반은 곧 콘서트와도 같다. 그 안에 정렬될 모든 곡들엔 흐름이 있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콘서트에서 연주자와 콘서트 디렉터가 합을 맞추어 프로그램을 짜 나가는 것처럼, 음반 제작 역시 연주자와 음반 제작자가 섬세하게 74분의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아나스타샤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지금 막 첫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도 마치 예전부터 합을 맞춰 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어떤 특징을 지닌 음반이 될지 윤곽이 드러나는군요. 원하시는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까?”
“생각으로만 하고 있었던 건데, 이렇게 놓고 보니까 조금 더 명확해지긴 하네요.”
나보다 훨씬 나았다. 내가 처음 무턱대고 많은 레퍼토리들을 늘어놓고 몇 달에 걸쳐서 회의했던 것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방향성을 갖춘 곡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능력이 한층 더 빛났다. 그는 순식간에 음악들을 실 하나로 꿰어서 마치 영롱한 목걸이를 만들듯 프로그램을 덧붙여 나갔다.
20분 정도 흘렀을까. 난 약속했던 대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회의를 지켜보았고, 이윽고 아나스타샤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회의 내용을 정리한 종이를 다시 검토했다.
“오늘은 이걸 리허설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습니까? 아나스타샤.”
“물론이죠. 자신 없으면 적어 놓지도 않았어요.”
“이번엔 어디에서 하시겠습니까?”
어디에서? 무슨 말인가 싶어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합주용 부스에서 할게요. 리허설이고, 타티아나도 왔으니까.”
전화에서 느껴졌었던 평소보다 큰 연습실의 공간감은 바로 합주용 부스에서 들려왔던 울림이었다.
우리 세 명은 함께 부스로 향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장치의 녹음을 켜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이미 한차례 연주가 있었는지, 부스 안은 피아노를 위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다른 악기들을 위한 마이크 등은 전부 없었고, 모두 피아노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다. 리허설이 아니라 그냥 녹음을 해도 무방할 세팅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으로 향했고, 난 준비되어 있던 의자에 앉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옆에 섰다.
“바로 하시면 됩니다.”
“예.”
짧은 확인이 오가고, 건반을 내려다보던 아나스타샤가 순간 허리를 살짝 굽히고는 손끝을 세웠다.
“…….”
건반이 요동친다. 빠르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마구 뛰어간다.
아나스타샤의 천부적인 신체적 재능과 이후 연습으로 거머쥔 기교.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건반을 누르자 묵직함이라는 말로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깊이와 경쾌함까지 지닌 음이 연달아 울리며 음악을 이루었다.
바로 옆에서 소리 없는 탄성이 들린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감탄이었다.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하는 것인지 알아보는 데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 역시 감탄했다.
그녀의 음악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이르러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또 한 번 뛰어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훨씬 더 날카롭고, 또렷한 공격성을 지닌다. 어떠한 의도로 이루어졌다는 걸 그저 듣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애초에 그렇게 작곡된 음악이니 너무나 잘 연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난 그녀가 이 곡을 선곡했다는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