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74화 (574/1,277)

##  574화

피에르 상캉pierre sancan.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태어나 작곡가들에게 있어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받고 파리에서 작곡가이자 교사, 그리고 드뷔시의 전문가로 이름을 떨쳤던 음악가의 이름이다.

그는 작곡가로 교육받았고 그에 따른 성취도 거두었지만 연주자로 더 많은 활동을 했기에 직접 쓴 곡은 그리 많지 않다. 프랑스 내에선 굉장히 중요한 음악가임에도 프랑스 밖에서 깊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곡을 많이 남겨 다른 음악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더 완성에 가깝게 끌어올리고, 당대 최고의 연주자로 칭송받던 라흐마니노프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비르투오조였던 그의 음악은 단 몇 곡이라도 폭발적이고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피에르 상캉의 유산 중 하나인 토카타toccata를 허락받기에 충분했다.

“…….”

토카타. 16세기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형식으로서, 보통 푸가 앞에 붙는 빠르고 화려한 전주곡이 그리 불렸다.

그 후 수백 년이 흐르고 피아노가 독립적으로 연주하는 기악곡이 주목받는 시대가 오면서 토카타는 기교를 과시하는 짧은 즉흥곡이나 연습곡 등으로 작곡되었다.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바흐의 토카타에서 현대음악 작곡가인 요크 보웬의 토카타까지. 난 이 소나타와 맞먹을 정도로 긴 역사와 변형을 자랑하는 음악 형식을 수없이 듣고 연주해 보았다.

이 정도로 완성도 있는 연주는 정말 오랜만이다.

‘음형을 만드는 기술이 훨씬 견고해졌어…….’

손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연타다. 마치 기계로 화음을 찍어 벽돌처럼 쌓아 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벽돌도 그냥 쌓아 올리기만 하면 발로 살짝 차기만 해도 무너져 내리기 마련. 아나스타샤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벽돌들을 쌓아 올리면서도 레가토로 순식간에 이어붙여 나갔다. 그녀의 연주는 음악 전체에 단단함을 부여했다.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기술뿐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 알캉의 연주를 들었을 때보다 더 훌륭해졌다. 그때 이미 테크닉적 완성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면, 지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크닉에서 자유로워진 연주자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화음을 쏟아부어 만들어 낸 단단함 위에 세워진 형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피에르 상캉의 토카타는 수백 년간 이어진 토카타의 역사를 그대로 아울러 꿰뚫는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넓은 화음을 다채롭게 사용하고 대위법으로 완벽한 비율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빠르고 세련되었으며 사납다.

고전과 현대의 장점들만을 섞어 만든 음악이다. 바쁘고, 복잡하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는 자신만의 발음으로 다시 한 번 재현해 냈다.

“…….”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달음박질치던 음악이 서서히 제자리걸음을 하며 멈춰 서고는 길게 날숨을 내뱉는다.

긴 글리산도가 지나간 후엔 템포가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훨씬 느린 속도로 음악이 흘러가며 주변 풍경을 그렸다. 여기에선 드뷔시풍의 인상주의적 표현력이 돋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표현에 약한 면모를 보이곤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층 더 피아노에 빠져들며 하나가 되려 한다.

스스로를 피아노에 산제물로 바치고 그 대가로 음악을 받는다.

난 그게 어떠한 몰입인지 잘 안다.

그렇게 얻은 음악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아나스타샤.’

돌아올 길은 생각하지 않는 집중력. 잠시 느려졌던 음악은 곧 주제를 확 뒤틀며 건반 전체를 사용하다시피 하는 거대한 옥타브 아르페지오로 나아간다.

순간 합주 연습실이 아니라 피아노 독립 부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거대한 공간조차 좁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음의 폭풍이 부스 전체를 후려갈긴다. 흡음재가 미처 음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도로 반사하여 내 뒷머리를 흔든다. 난 그 모든 반향을 느끼며 팔을 쓰다듬었다. 소름이 돋아 있었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글리산도로 이리저리 흩날리며 주변에 뿌려놓았던 음들을 휘젓는다. 그러고는 다시 첫 주제를 되찾아갔다.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조차도 농담의 일환처럼 아나스타샤는 음악을 반복하는 시늉을 슬쩍 하다가 갑작스레 와르르 무너뜨리고, 방점을 찍었다.

음악에 압도당했던 사람들의 긴장을 확 풀어 주는 듯한 마무리로 3분가량의 토카타는 끝났고,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테크닉은 확실히 세계적이군요.”

난 가볍게 박수를 쳤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찬사를 보냈다. 아나스타샤는 바지 양 주머니를 손끝으로 살짝 당기며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인사와 비슷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고난도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낸 연주자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인다.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마냥 즐거워하고 있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더 찬사를 듣거나 곡을 선보이지 않고 그대로 내 옆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내 옆의 벽에 기대어 서선 숨을 골랐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내 팔을 붙잡고 곡이 어떠했느냐고 감상을 원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벽에 기대어 피아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격렬한 연주 끝의 쉼표 같은 순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아나스타샤.”

그는 내 쪽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다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악을 잡아채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특유의 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도프스키의 쇼팽 에튀드 연구도 그렇고, 피에르 상캉의 토카타도…… 이미 알캉에도 깊게 손을 담갔다 하셨고 말이죠.”

“어쩌다 보니.”

“장담컨대 같은 또래에 테크닉적으로 아나스타샤보다 더 뛰어난 연주자는 전 세계를 둘러봐도 없을 겁니다.”

전 세계를 봐도 없을 거라니, 여기 듣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추켜세워 주는 칭찬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쉽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그제야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실례.”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마어마한 칭찬이라는 걸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난 동의하고 있었다.

딱히 거기에 반박할 만한 연주자를 떠올려 낼 수 없었던 까닭이다. 꼭 한 명 꼽자면 에르네스트 정도인데 그는 요즘 펜을 쥐고 작곡에 힘을 쏟느라 연주자로서는 살짝 정체되어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무, 무슨 소리니? 타티아나. 마카로프 씨는 그냥 농담한 건데.”

아나스타샤가 앞으로 휙 나섰다. 그녀는 당황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눈짓했다. 그런 과분한 칭찬은 장난으로 넘겨 달라는 것 같다.

하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내 쪽을 바라보았고, 아나스타샤도 곧 그 시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난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농담은 거짓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아요.”

세상 모든 열여섯 살 연주자들을 만나 본 사람은 없을 테니 최고를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정말 긴 시간 동안 음악을 다루면서 많은 연주자들을 만나 본 사람이다.

아나스타샤만 한 사람이 없을 거란 말은 꽤 두터운 근거 위에 올라가 있는 말이었다.

살짝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잡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연주자의 손. 내가 그녀를 위해 한 건 없겠지만,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보람을 느낀다.

“충분히 월등하신걸요.”

“…….”

“매번 말씀드렸었잖아요? 아나스타샤는 천재라고.”

이미 2년 전에 봤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신체적 우월성과 운동신경 등의 재능, 냉정한 이해력과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음악성까지. 그런 건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나에 비해 그녀는 진짜 천재의 재목이었다.

머지않아 나 같은 건 순식간에 넘어서 버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최근 그 확신은 점점 현실이 되어 갔다.

“그때가 온 거예요.”

물론 나 역시 최선을 다해서 잠재성을 최대로 끌어내는 데에 집중했고, 신체적 한계도 기술로 몇 번이고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연주자라 소개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또 한계가 온다면 깨어 내고 나아가야겠지. 바닷가재처럼.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진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끝은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들지 않는다.

2년 전엔 거울을 보자마자 기대조차 안 했다. 상상조차 못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은.

하지만 해냈고, 아나스타샤 역시 내가 기대했던 대로 착실히 올라와선 더 높은 곳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 두 사람이 함께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

아나스타샤는 내 눈을 피한다. 이 상황이 부담스러운 걸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하고 있고, 또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이니?”

어떤 확인인지 바로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묘하게 자신 없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 정말 열심히 했어. 물론 네가 보기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간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열심히 했고 어떻게 성장했는진 곁에서 봐서 잘 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끌어안아 주고 싶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칭찬해 줄 수 있니? 이 곡으로?”

칭찬, 정말 쉬운 일이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보다 백 배는 더 그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금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연주만을 보고 기계적으로 칭찬하는 건, 그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또한 친구로서 할 필요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뇨.”

“……응?”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얼이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늘 똑 부러지는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일은 흔치 않은데. 최근엔 오셔너리움에서 돌고래에게 물벼락을 맞았을 때 한 번 본 것 같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서 웃어 버릴 뻔했다. 내가 미소를 짓자 아나스타샤가 살풋 인상을 썼다. 내게 화를 내는 모습도 흔치 않은 모습이다.

“잠깐만…… 왜 장난쳐? 타티아나. 미안한데 나 진지해 지금.”

“저도 진지한걸요. 아나스타샤.”

장난을 치는 건 저기 옆에 있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겠지.

프로듀서는 짐짓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속으론 우리 두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길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회의를 할 때 내게 의견을 구했던 것이나, 아나스타샤를 추켜세우면서 날 끌어들인 것도 그가 일부러 유도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분명 유능하고 훌륭한 어른이었지만, 음악가로서의 마카로프는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는 어린애 같은 순수한 구석이 있다. 난 그런 그의 모습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살짝 얄밉다.

그렇다고 나가 달라고 하면 정말 슬퍼할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들려주신 곡은 좋았어요. 분명히 저보다 나아요. 하지만 그걸로 칭찬을 해 드릴 수는 없겠는걸요.”

“어렵게 말하지 말고…….”

아나스타샤는 이 곡을 내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애초에 솔직하게 스튜디오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날 속이려 하고, 곡을 연주하고 나서도 감상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감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내 평가의 초점이 곡이 아닌 연주자 쪽으로 향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 곡을 연주하고 싶으셨나요?”

“……응?”

난 빙 두르던 말의 궤도를 바꾸어 그녀의 정면에 던졌고, 아나스타샤는 이런 질문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해하더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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