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75화 (575/1,277)

##  575화

아나스타샤는 판단이 빠르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한다.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이 닥쳐도 여유로움을 잘 잃지 않고 유리한 말들을 골라서 할 줄 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있었지만 난 그녀의 표정 뒤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질문을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지금 빠르게 생각해 보고도 답을 내지 못했고, 심지어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몇 초 사이 흐른 다채로운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나 또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아나스타샤가 왜 한 번에 몇 계단씩 올라가듯 고난도의 곡들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누군가 아나스타샤를 본다면 원래부터 화려한 과시욕을 지닌 연주자로 오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실 그렇게 실력을 마구 드러내고 선망을 사는 걸 좋아하거나 즐기는 성격도 아닌데.

“하고 싶었냐니…….”

어색해지기 전에 먼저 입을 연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내 말을 반복하다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왜? 잘했잖아.”

“잘했죠.”

“연주하기 싫은 곡이라면 이렇게 못 쳐. 알잖니?”

“싫었던 건 아닐 거예요.”

정말 싫었다면 곡에 다 드러난다. 해석을 게을리한다든가 터치를 대충 한다는 식으로.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곡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피에르 상캉의 토카타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굳이 좋아할 필요는 없다.

아나스타샤는 어떠한 목적성만을 가지고 이 곡을 준비했다.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예리하고 차가운 목적성이었다. 거기에 애정이 실리진 않는다. 그저 무감각한 연마만이 실릴 뿐이다.

누군가가 시켜서 혹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연습한 곡은 결코 이렇게 들리지 않는다.

“아나스타샤. 그 곡을 어떻게 쓰실 건가요?”

단순히 생각한다면 내가 했던 것처럼 열여섯 살의 음악을 남기려는 목적이겠지만, 직접 들어 본 음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그 목적을 다 할 수 있는 음악을 구태여 음반에 구겨 넣을 이유가 없다.

리처드가 했었던 말이 기억났다. 그는 아나스타샤와 대결했을 때 그녀의 알캉을 듣고 말했었다. 이건 연주자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라고.

“…….”

다시 한 번 날 속이려는 눈빛이 번뜩인다. 하지만 곧 아나스타샤는 그 생각을 내려놓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도구로.”

“역시 그렇나요.”

“그러면…… 안 되니? 너도, 타티아나 너도 그랬었잖아. 그렇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난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몇 번이고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야단을 맞았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망치를 들고 세상 모든 것을 못으로 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망령으로서 그 방법밖에 몰랐으니까. 사실 지금도 내 본질은 거기에 가깝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피아노 앞에 앉는, 그런 이상한 사람.

하지만 내가 이상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때문에 난 사샤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틀렸다고. 나처럼 하면 안 된다고.

“…….”

사샤에게 하듯 아나스타샤에게 말할 순 없었다. 그녀 역시 피아노 연주자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사람이었고, 그 결과로 나와 비슷한 곳에 도달한 사람일 테니까.

하지만 비슷한 방법에 도달했더라도, 아나스타샤에겐 조금 더 많은 길이 주어져 있으리라.

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음을 자각함에 창피함을 느끼고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전 바보라서 하나밖에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현명하시니까 피아노를 저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연주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어떤 분명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아나스타샤라는 사람을 사귀어 오면서 느꼈던 것들. 거기에서 비롯된 귀납적 귀결.

허술한 예언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의심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의심했다.

“아니야, 타티아나. 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못 돼…….”

무엇이든 잘 해내고 뛰어난 아나스타샤는 잔뜩 지쳐 있었다. 힘없이 그녀가 자조했다.

“어떻게 하면 더 공격적으로…… 그런 생각밖에 못 하는 사람이야 나는.”

난 그녀가 정말로 나와 비슷한 사고를 따라왔다는 걸 느꼈다. 오로지 피아노에 매달리며 무엇이든 이 여든여덟 개의 해머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때.

물론 그때 내 연습량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고 집중력 또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시야를 한곳으로 집중해서 주변을 볼 수 없었다는 건 단점이지만, 모든 시간을 피아노에 집중하면서 엄청나게 실력이 높아졌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도 어떠한 계기와 동기로 공격적인 피아노에 몰두했고, 그 결과로 난곡들을 소화해 내는 무시무시한 테크닉을 얻어 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곡을 칭찬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정말 피아노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나? 어느 한순간 파고드는 의문을, 그녀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나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르다.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으로 피아노만을 택했지만, 전적으로 내면을 향해 있던 내 망치와 달리 그녀의 칼날은 외부로 향하는 것 같다.

밖을 겨누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의문과 죄책감 등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정말 그렇다면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자조할 정도로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 증거로…….”

“그 증거로 아나스타샤는 지금 스튜디오에 녹음을 하러 오셨지 않나요.”

“……내가 그 말 하려 했는데.”

우리는 스튜디오에 왔다는 같은 증거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아나스타샤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얼마나 다정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난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했을 부분을 짚어 주었다.

“아나스타샤, 음악을 날카롭게 다루려면 굳이 음반에 새길 필요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직접 귀에 와닿는 한순간 번뜩이는 칼날이 훨씬 더 예리하고 치명적이에요.”

“……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연주자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 즉 정면에서 기선을 잡거나 피아노 대결 등에 쓰기 위한 도구라면 음반은 큰 의미가 없다.

정말 피아노를 무기로 사용하고 싶다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그 자체를 그렇게 써야 한다.

강철 현과 거대한 음향판은 말 그대로 사람의 몸 전체를 뒤흔드니까. 부정적인 태도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들도 음악의 직접적인 폭력엔 대부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간접적인 폭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녹음시설과 스피커를 사용하더라도 한 번 열화된 피아노 소리는 굉장히 무뎌지고 힘을 많이 잃는다. 소리의 부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날카롭고 공격적인 음악만을 연구했다고 하면서, 이 스튜디오를 찾아 그것을 음반으로 만들려 한다.

아나스타샤도 그 모순을 느꼈는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난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이렇게 간접적인 방법을 찾고 계시잖아요.”

“…….”

“보세요, 저랑은 다르죠?”

나처럼 밑도 끝도 없이 독선적인 성격에 효율적으로 칼을 찾는 방법들도 여럿 아는 이상한 연주자와는 다르다. 아나스타샤는 훨씬 더 상냥한 사람이었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반항하듯 중얼거렸다.

“타티아나 너도 음반은 먼저 만들었었잖아…….”

“저와는 이유가 다르시지 않나요? 전 자기증명의 혼란과 욕심을 망치로 펴고 박제해서 간접적인 평가를 원했었죠. 그건 당시 직접적인 평가를 내심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뭐……?”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간접적으로 우회한 건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되레 너무 믿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생각을 단어와 문장으로 엮어 말로 내면서 반성함과 동시에 설명을 하다가 말고, 난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낚아챘다.

아나스타샤는 음악을 무기로 쓰려 했다.

나는 나 역시도 그랬던 적이 있었기에 음악가 친구로서 그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고, 그녀가 누구를 목표로 두고 그랬는지에 대해선 프라이버시라 생각하여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파고들지 않아도 그 목표로 짐작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일반적인 곡으로 상대해선 어림도 없으니 일부러 알캉 같은 초고난이도의 곡들을 골라 무기로 삼아야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연주자. 그러면서도 악감정을 가지고 직접 공격하기엔 꺼려지는 사람.

그 대상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들었지만, 그렇다면 오늘 철저하게 날 배제했을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한 사람 남는다.

“아나스타샤.”

“…….”

하지만 난 마지막으로 든 확신을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라면 아나스타샤가 어떤 방식으로 도전해 오더라도 기쁘게 받아 줄 사람이었다. 이렇게 칼을 갈 필요 없이 하루에 열 번씩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번의 대결만을 준비했다. 이건 라이벌로서의 준비라기엔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설마 에르네스트를 미워하느냐고,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에 그녀 역시 스스로도 모르게 대답할까 봐,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참아 냈다.

‘그럴 리가…….’

난 갑자기 파고드는 불안을 떨쳐 버리면서 다시 침착하게 생각했다.

아나스타샤가 악감정으로 음반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는 추론은 틀리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아직 스스로도 거기에 대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지만, 부정하지도 않는 걸 보면 아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에르네스트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리라.

그녀는 일부러라도 에르네스트와 어울리려고 하기도 했었고, 어제도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

그냥 라이벌로서 한 번쯤은 반드시 꺾어 보고 싶다는 호승심에서 비롯된 칼날이겠지. 그게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각자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연주자들은 누구의 길이 더 곧고 넓은지 서로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 상대가 연주자 동료이자 친구라면 더더욱 바람직하다. 잠시 반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대결은 두 연주자 모두를 성장시킨다. 때문에 그런 호승심은 꼭 지향해야 하며 연주자로서의 미덕으로 삼아야 하는 부분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런데 미심쩍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 말까?”

“예?”

“내가 작년에 널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네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불쑥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표정에 다 드러난 모양이다. 난 지금 실제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떠한 관계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 무언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

아나스타샤도 그랬던 걸까?

멍하니 올려다보니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실 나도 어젯밤에 충동적으로 든 생각일 뿐이었거든. 그리 깊게 생각한 것도 아니야.”

“…….”

“그냥 조금 더 나중에 할게. 안 그래도 나 지금은 자꾸 기교적인 부분에만 신경이 쓰이고…… 그러니까 네가 듣기에도 그리 좋지 않게 들린 모양인데. 나중에 좀 더 잘하게 되면 그때 하면 되겠지.”

나중에?

난 아나스타샤가 스스로의 말을 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선생님이나 어른이 할 법한 말을 떠올려서 대신 하고 있었다.

그건 보편적으로 옳은 말에 가깝다. 그러나 난 단호하게 마음을 굳혔다.

“아니에요. 하세요.”

음악을 도구로 쓰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나쁠 건 하나도 없겠지. 그러나 배운 대로 하면 손해를 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후회할 일이 생긴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키는 아나스타샤보다 훨씬 작지만 턱을 바짝 치켜드니 똑바로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중에 조금 더 잘하시려면, 지금 하셔야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조금 더도 없을 거예요.”

“……아.”

“제가 말리는 것처럼 말씀드렸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기록할 음악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할 따름이에요. 거기에서 비롯되는 변화가 앞으로를 만들 테니.”

“…….”

어떤 이유에서든 음반을 만들고 싶다면 괜찮다. 여기 있는 전문가는 정말 신뢰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게 꼭 칼날을 뭉툭하게 만든 결과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이곳에서 음반을 만들고 기절한 후에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으로 하고 싶은 음악들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걷어 내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러한 변화를 겪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에게 음반을 받을 에르네스트도.

“어떤 결과가 따라오더라도 괜찮아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타티아나…….”

긍정적으로 웃어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망설였다.

그리고 이윽고 짧게 대답했다.

“할게.”

전화 너머에서 들었던 불안정한 목소리와는 다르다. 그녀의 내부에 있던 한 질문에 내가 대답을 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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